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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메리 셸리와 SF 소설의 내면 탐구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메리 셸리와 SF 소설의 내면 탐구

OneTiger 2017. 6. 6. 20:00

문학동네 출판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를 보면, 말미에 번역자 후기가 달렸습니다. 번역자는 이 소설이 본격적인 SF 소설의 시발점이지만 단지 SF 소설에만 그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을 그저 SF 소설의 시발점으로만 평가한다면, 그건 너무 시시하고 단조로운 평가라고 이야기했어요. 아마 번역자는 메리 셸리의 기구한 삶을 조명하기 위해 <프랑켄슈타인>을 그저 SF 소설로만 평가하는 해석에서 벗어나자고 말했을 겁니다.


아마 이 세상에는 불행한 SF 작가들이 많을 겁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처럼 단행본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작가도 있을 테고, 옥타비아 버틀러처럼 흑인과 여자라는 사회적 약자가 된 작가도 있을 테고, 필립 딕처럼 그야말로 산만하고 혼란스럽고 편집적인 삶을 살아간 작가도 있겠죠. 존 브루너는 <잔지바르에 서다>라는 소설로 유명해졌으나,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극도로 가난했다고 하죠. SF 컨벤션에서 교정을 보는 일이라도 맡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 (이런 작가들을 보면, 안정적인 창작을 위해서라도 정말 사회주의 정책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메리 셸리 역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어머니가 산욕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메리 셸리, 아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은 어머니 없이 자라야 했습니다. 게다가 계모의 핍박 때문에 행복한 가정과 거리가 먼 인생을 보내야 했어요.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은 아마 메리의 이상향이었을 겁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은 퍼시 비시 셸리와 결혼했지만, 이 결혼 때문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많이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아이를 유산하거나 퍼시 셸리와의 관계가 소홀해지거나 등등 정말 불행의 연속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마 이런 고난들은 메리 셸리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을 테고, 이런 영향은 <프랑켄슈타인> 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어쩌면 이런 영향이 더욱 크게 드러나는 작품은 <최후의 인간>일지 모릅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과 인조 인간은 세상에게서 버림을 받은 기분을 느끼거나 사실 버림을 받습니다. <최후의 인간>에서 주인공은 문자 그대로 최후의 인간이고 인류의 멸종을 지켜봅니다. 모든 것들이 눈 앞에서 사라졌고, 주인공은 기구하고 버림을 받은 운명을 상징하기에 딱 좋죠. <최후의 인간>은 단순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아니라 인류 멸종을 상실의 쓴맛에 비유하는 소설 같습니다.



따라서 메리 셸리의 이런 인생을 살펴본다면, <프랑켄슈타인>이나 <최후의 인간>이 그저 SF 소설로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극심한 상실감에 시달리는 한 인간의 내면을 아우르는 소설에 가까워요. 하지만 저는 SF 소설이 이런 상실감이나 고통도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소설이 상실감이나 인생의 비극을 은유하거나 함의한다고 해도 구태여 SF 울타리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SF 울타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할 수 있어요.


사실 뉴웨이브 운동이 그런 것들을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뉴웨이브 작가들은 외부 세계만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주목했고, 그 결과 SF 소설에 새로운 흐름을 더할 수 있었죠. 그렇다면 뉴웨이브 이전에 이런 경향이 없었을까요. 뉴웨이브 운동 이전에 SF 소설은 무조건 자연 과학적인 설정만 늘어놓는 소설이었을까요. 글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를 언급한 것처럼 저는 뉴웨이브 운동 이전에도 심리나 내면을 탐구하는 소설들이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휴고 건즈백 같은 인물이 SF 소설의 기틀, 특히 미국 SF 소설의 기틀을 확립했다는 점입니다. 휴고 건즈백은 <어메이징 스토리즈> 같은 잡지를 이용해 본격적인 SF 소설 시장을 확장했습니다. 건즈백은 분명히 오늘날의 SF 소설 시장을 만들었고, 그 공로가 뚜렷하지만, 한편으로 SF 소설을 '자연 과학적인 모험 소설'로 고정시켰습니다. 좌파적인 사회 비판이나 심리 탐구는 허공으로 날아갔고, 과학자들이 기계류를 이용해 모험하는 이야기들이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SF 소설의 유형은 여기에서 비롯할 겁니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는 휴고 건즈백이나 심지어 존 캠밸 주니어와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 같은 인물과 잡지까지 비판합니다. 아마 아이작 아시모프가 뉴웨이브 운동에 반발한 이유도 휴고 건즈백의 유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시모프 역시 '기계류와 모험'이라는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가죠. 하지만 뉴웨이브 운동은 SF 울타리 안으로 깊이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좀 무리가 있는 주장일 수 있겠으나) 메리 셸리를 초기의 뉴웨이브 SF 작가로 불러도 좋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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