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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한다는 것 본문

SF & 판타지/장르 정의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한다는 것

OneTiger 2017. 6. 9. 20:00

여기 블로그 상단에는 'SF/생태/사회주의'라는 제목이 붙었습니다. 사실 저는 사이언스 픽션을 잘 모릅니다. 게다가 사이언스 픽션을 많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SF'라는 명칭을 빼고 싶었지만, 여기에서 SF 이야기를 어느 정도 하기 때문에 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종종 이렇게 자문하곤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SF 팬들 중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을 겁니다. 저는 그런 유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유형은 SF 소설들을 모두 섭렵합니다. 첫째 유형은 그야말로 골수 SF 독자이고, 고전 소설과 최신 소설과 하드한 소설과 뉴 위어드 소설과 해외 소설과 국내 소설을 모두 챙겨봅니다. 둘째 유형은 SF 소설들을 읽고 그 경이감에 감동을 받지만, SF 소설만큼 영화나 게임을 좋아합니다. 어쩌면 일부 둘째 유형은 영화나 게임을 소설보다 훨씬 좋아할 수 있습니다. 셋째 유형은 SF 소설을 거의 읽지 않습니다. 셋째 유형은 몇몇 유명한 작가들을 알지만, 그보다 영화나 게임에 훨씬 많이 시간을 쏟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유형이 모두 SF 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SF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와 게임만 즐긴다고 해도 그 사람은 얼마든지 SF 팬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사이언스 픽션의 정수는 SF 소설일 겁니다. 특히, 하드 SF 소설이야말로 사이언스 픽션의 정수를 담았습니다. SF 소설의 미덕은 논리적인 상상력을 이용해 주류적이고 기성적인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독자는 (논리적인 상상력의) 다른 생명체, 다른 공간, 다른 세계를 보고 주류적인 사고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때 독자는 엄청난 경이를 맛보고 고정 관념을 깰 수 있습니다. 저는 이걸 '인식의 지평선이 넓어진다'고 부릅니다. 뭐라고 부르든 바로 이런 감성이야말로 사이언스 픽션의 미덕일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직 이런 감성만이 사이언스 픽션의 전부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장르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많은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어떤 공통 사항에 합의할 수 있지만, 그런 합의가 명확한 정의로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고 해도 SF 팬들은 본능적으로 무엇이 사이언스 픽션의 본질인지 이해할 겁니다. 필립 딕, 제임스 호건, 할란 엘리슨, 피터 와츠, 찰스 스트로스, 제임스 팁트리, 김보영, 이재창, 김창규 같은 작가들은 그런 본질에 맞닿았어요.



저는 저런 작가들의 작품에서 굉장한 깊이와 넓이를 느낍니다. 그건 마치 우주를 한 바퀴 둘러보고, 인간 세상에서 벗어나고, 모든 것을 관망하는… 그런 느낌입니다. 저는 그런 느낌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SF 소설들을 모두 섭렵하거나 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읽지 않은 SF 소설들이 훨씬 많습니다. 첫째 유형의 독자는 모든 SF 소설들을 최대한 읽으려고 노력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노력하지 않았고 노력할 마음이 없습니다.


저는 저런 작가들의 상상력을 좋아하지만, 동시에 통속적이고 뻔한 코드들도 좋아합니다. 저는 SF 소설만이 아니라 진부하고 상투적인 영화나 비디오 게임도 좋아합니다. (특히 비디오 게임을 좋아합니다.) 저는 아무리 대단한 작가의 소설이 출판되어도 주제나 소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이 사이언스 픽션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사이언스 픽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요. 여기에서 SF 소설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과연 제가 그 소설들의 본질에 닿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몇몇 작가들의 상상력이 마음에 들기 때문에 이야기할 뿐입니다.



물론 사이언스 픽션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무조건 SF 소설의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솔직히 왜 SF 소설을 읽겠어요. 언젠가 듀나가 지적했듯 그냥 재미와 감동입니다. 그게 우선이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스팀펑크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냥 여러 소설과 영화와 비디오 게임의 재미만을 추구해도 하등 무리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여기는 생태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곳이고, 몇몇 SF 소설은 생태 사회주의와 잘 어울립니다.


SF 소설 자체가 좌파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SF 소설은 당파적이거나 경향적이지 않습니다. 좌파적인 SF 소설만큼 우파적인 소설 또한 많습니다. 하지만 SF 소설을 이용해 생태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그걸 위해 여기에서 여러 가지들을 이야기했고 앞으로 계속 할 겁니다. 비록 아는 것은 없고 독서량은 빈약하지만, 뭐시기 위키처럼 스팀펑크가 동화풍이라고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SF 소설과 생태 사회주의를 슬렁슬렁 이야기해도 나쁘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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