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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마지막 멋진 할 일>과 <별의 눈물>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마지막 멋진 할 일>과 <별의 눈물>

OneTiger 2017. 3. 28. 20:00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은 제임스 팁트리의 소설 모음집의 제목이자 소설 제목입니다. 모두 11개 작품이 실렸고, 대부분 SF 소설에 가깝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크게 1장 '사랑은 운명'과 2장 '운명은 죽음'으로 나뉩니다. 아마 1장에는 존재들이 서로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고, 2장에는 그 존재들이 사랑이나 집착 때문에 비극적인 운명을 맞기 때문인가 봅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크게 흥미가 땡기는 작품은 역시 대표 작품인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이었습니다. <돼지 제국>도 좋았고, <별의 눈물>은 충격적이로군요. 아니, 오히려 <별의 눈물>이 대표작 <마지막 멋진 일>보다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스노우>는 비교적 짧은 분량이지만, 이 소설을 읽고 거대한 서사시를 본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오후>는 괴수물로서도 독특했고 한 인간이 바라보는 종족의 영속성도 그럴 듯했습니다. <서쪽으로 가는 배달 여행>은 SF 소설이 아니지만, 의외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우선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은 신나고 재빠른 소설입니다. 여기에 어떤 소녀가 있습니다. 똑똑하고 재치가 넘치고 활발합니다. 게다가 부모는 부자입니다. 덕분에 이 소녀는 우주선을 구입했습니다. 우주선을 구입했으면, 저기 머나먼 깊은 우주로 떠나야죠. 그게 바로 우주 탐사물의 로망이 아니겠습니까. 우주선 같은 물건을 구입했음에도 알려진 우주만 쏘다닌다면, 그건 인지상정이 아니죠. 주인공은 그렇게 생각하고, 인적이 드문 우주를 향해 떠납니다. 하지만 언제나 이런 탐험의 끝에는 문명의 충돌이 기다립니다. 그 문명은 적대적일 수 있고 아니면 우호적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인간과 외계 존재와의 만남 혹은 갈등. 이거야말로 SF 장르의 분위기를 가장 순수하게 요약하는 소재일 겁니다. 이 소설은 그런 순수함에 충실합니다. 인간이 아닌 어떤 다른 존재. 그 존재와 인간의 차이. 거기에서 비롯하는 각종 기묘한 이야기들. 독자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 머나먼 우주로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그저 인간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만 이 세상에서 북적거리지 않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있고, 우리는 그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는 그런 것들입니다. 주인공 소녀는 어떤 존재와 싸우거나 우정을 나눕니다. 소설 배경이 외딴 행성이기 때문에, 아무도 주변에 없기 때문에 두 존재의 관계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아니면 더욱 아슬아슬하게 보인다고 할 수 있겠죠. 무엇보다 이들은 적막하고 고독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사실 이런 적막함과 고독함은 우주 탐사물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일 겁니다. 알려지지 않는, 발길이 닿지 않는 우주 어딘가에서 떠도는 주인공들….


그들이 처한 고난과 각종 역경은 우주나 외계 행성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합니다. 우리는 문명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적어도 <마지막 멋진 일>을 읽을 수 있는 독자는 문명 사회에서 살아가겠죠. 따라서 우리는 문명의 손길과 도움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우주 탐사물에는 그런 손길이나 도움이 없고, 그래서 이런 소설들은 문명 밖에 다른 장대하고 낯선 세계가 있음을 피력합니다. <마지막 멋진 일>의 주인공들은 그런 적막하고 고독한 세계에 떨어졌어요. 좋든 싫든 주인공들은 서로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 각별한 의지와 갈등이 이 소설의 감동을 한층 뭉클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주인공은 활발하고 똑똑한 소녀입니다. 주인공의 이런 성향 때문에 미지와의 조우는 그저 낯설거나 기괴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청소년 소설, 이른바 영 어덜트 소설이 떠오릅니다. 일단 주인공이 소녀이고, 소설 분위기도 젊고 탄력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존재가 차이를 드러내고 문명 사회가 그 차이를 돕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느 청소년 소설과 좀 더 달리 보이는군요. 어쩌면 로버트 하인라인이 <은하를 넘어서>를 쓴 것처럼 제임스 팁트리도 <마지막 멋진 일>을 썼을 수 있지만, 이 소설은 <은하를 넘어서> 같은 소설과 다릅니다.


아마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과정이 훨씬 극적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은하를 넘어서>도 그런 요소를 다루지만, <마지막 멋진 일>의 주인공들은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마당에 그들을 도와줄 손길도 요청할 수 없죠. 사실 <은하를 넘어서>를 비롯해 아이들이 낯선 세계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소설은 한두 개가 아니지만, <마지막 멋진 일>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배경적 특성 때문에, 그리고 그 존재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별의 눈물>은 노예 제도를 비유하는 것 같습니다. 인류는 약한 외계인들은 정복했고, 그 외계인들은 노예처럼 살아갑니다. 노예의 비참한 일생이 이 짧은 소설 속에 줄줄이 드러납니다. 외계인들은 어떻게든 인류의 손길에서 벗어나기 원하고, 그래서 원대한 탈출을 계획합니다. 이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우선 어떻게 노예 외계인들이 탈출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외계인들이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떠도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요.


전반부에는 탈출을 실행하는 여러 외계인들이 번갈아 등장하고, 그래서 상당히 숨가쁘게 흘러갑니다. 비록 분량은 짧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활약은 아련하고 서글프군요. 이와 달리 후반부는 약간 신화적입니다. 아무래도 위대한 탈출을 감행했기 때문에 그런 사건이 신화가 되기 마련이겠죠. 게다가 이 외계인들은 근본적으로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의 애스시 사람들처럼 이 외계인들도 폭력을 꽤나 경계합니다. 덕분에 이 소설을 읽은 후, 어슐라 르 귄이나 옥타비아 버틀러의 책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노예들의 고통과 탈출이 전부라면, <별의 눈물>은 그리 특이하지 않은 소설이겠죠. 이 작품은 그런 피상적인 교훈만을 남발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이 세상에 압제와 정복이 만연하고, 그 누구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크든 작든 수많은 압제와 정복이 있습니다. 아마 서로 모습은 다를 겁니다. 어떤 것은 좀 더 전형적인 폭력처럼 보이고, 어떤 것은 좀 더 부드럽게 보일 겁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모든 압제들은 동일하고, 그것들은 도처에서 약자들을 짓밟고 수탈합니다.


아마 이런 논리를 현실에 적용한다면, 다양한 강대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가령, 저는 주로 미국이나 유럽의 제국주의를 많이 비판합니다. 미국이나 유럽,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구 사회는 예전부터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고, 지금도 여전히 저지르는 중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것들을 자주 비판하지만, 반면 중국이나 러시아를 미국만큼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중국이나 러시아의 정책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차피 중국이나 러시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많고 많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딱 겉보기에도 전형적인 독재 국가처럼 보입니다. 언론을 통제하고, 주변의 국가들을 위협하고, 심지어 암살까지 저지릅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제국주의 성향에 분노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국을 멀리하고 미국에 붙어야 한다고 말하죠. 중국이나 러시아에 비한다면, 그래도 미국이나 유럽은 자유롭고 문명적으로 보입니다. 언론을 통제하지 않고,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지 않고, 암살 따위 저지르지 않고….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정말 미국이나 유럽은, 우리가 문명 사회의 모범으로 꼽는 그런 국가들은 제국주의 성향이 없나요?


정말 그런 나라들은 중국이나 러시아보다 나을까요. 글쎄요, 만약 어떤 중산층 시민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살아간다면, 중국이나 러시아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할지 모르죠. 하지만 중산층 시민이 아니라 제3세계의 가난한 노동자라면, 미국과 유럽과 중국과 러시아가 모두 똑같아 보일 겁니다. 아니, 저기 북미 보호 구역에서 에너지 대기업에게 착취를 당하는 원주민들은 오히려 중국이나 러시아보다 미국이나 캐나다가 더 밉겠죠. 당장 캐나다 대기업에게 죽을 수 있잖아요.



한국 사람들이 미국보다 중국에게 치를 떠는 것처럼 북미 원주민들은 중국이나 러시아보다 캐나다나 미국에게 치를 떨 수 있습니다. 중산층 시민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겠지만, 가난한 제3세계 노동자들은 모든 강대국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겁니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개발 도상국들은 미국이나 유럽을 향해 사죄하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은 절대 그런 국가들에게 제대로 배상하지 않죠. 언뜻 미국이나 유럽은 중국이나 러시아보다 나아 보이지만, 그 근본적인 면모는 비슷합니다.


만약 제가 시리아의 난민이라면, 중국의 독재보다 미국의 침공을 훨씬 더 크게 비판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국이나 유럽을 문명의 모범으로 칭송하고, 그에 비해 중국이나 러시아를 사정없이 비난합니다. 결국 관점의 차이일 뿐입니다. 자신이 유럽에게 혜택을 입기 때문에 유럽을 선호할 뿐이죠. 만약 그 사람이 유럽 병사에게 죽은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손이라면, 유럽을 문명의 모범이라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별의 눈물>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제국주의는 나쁩니다. 우리의 착각과 달리 좋고 부드러운 제국주의 따위는 없습니다.



<스노우>는 초인 소설입니다. 하지만 단지 초인의 활약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초인의 활약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생명의 거시적인 역사를 바라봅니다. 초인은 그런 역사의 정점을 찍는 듯합니다. 초인의 활약만큼이나 생명의 진화와 어린 아기의 성장 또한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른 초인 소설과 느낌이 많이 달랐습니다. <돼지 제국>은 이른바 왕따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한 마디입니다. 처음에 뭔가 하드하게 시작하지만, 그런 하드함이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 점은 좀 실망이었습니다. <마지막 멋진 일>을 꽤나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인간과 외계 존재의 변주곡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누군가에게 결국 존재의 가치를 말하고, 그런 부분은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군요. 좀 더 하드하게 썼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만약 그랬다면 결말의 여운이 진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오후>는 어느 외계 행성에 정착한 개척민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정착민들은 거대한 갑각류 괴수들과 한바탕 싸워야 합니다.



문제는 이 갑각류 괴수들이 너무 강대하다는 점입니다. 정착민들은 괴수들과 치열하게 싸우지만, 멸망을 피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싸움을 준비하는 동안 과연 어떻게 종족이 이어지는지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조상이 있고, 그 조상에게 또 다른 조상이 있겠죠. 조상은 후손을 낳고, 조상과 후손은 종족 보전을 위한 끈으로 단단하게 연결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끈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요. 결국 종족을 보존한다는 뜻은 자신의 형질을 잇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형질이 후손 때문에 위기를 맞이한다면, 도대체 뭐가 우선이어야 할까요. 만약 제가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어느 날 오후>는 그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부모의 사랑이나 피붙이의 사랑이 거미줄처럼 퍼지겠죠. 이 소설의 제목은 '어느 날 오후'지만, 오히려 '사랑은 운명'이라는 제목이 더욱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서쪽으로 가는 배달 여행>은 일종의 여행기입니다. 여타 여행기처럼 여행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여행자와 그런 주민들의 시선은 서로 다르기 마련이죠. 솔직히 SF 소설은 아니지만, 그런 시선의 차이 때문에 기억에 남는 소설입니다. 시선의 차이를 바라보면 언제나 즐겁죠. 뭐, 그렇게까지 즐겁기만 한 소설은 아닙니다. 어쨌든 이런저런 인상적인 소설들이 많았고, <마지막 멋진 일>은 참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별의 눈물>은 여러 모로 마음이 아픈 소설입니다. <마지막 멋진 일>이 <별의 눈물>보다 더 눈길을 끌었다면 좋았겠지만, 현실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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