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라마와의 랑데부>가 제임스 쿡 선장에게 본문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는 제임스 쿡 선장에게 바치는 찬가입니다. 주연(?) 우주선 인데버는 제임스 쿡이 탔던 인데버에게서 이름을 땄습니다. 소설 주인공 선장은 꾸준히 제임스 쿡을 회고하고, 자신이 제임스 쿡 같은 탐험가가 되었다고 느낍니다. 소설 <라마와의 랑데부>를 쓴 아서 클라크는 영국 작가입니다. 제임스 쿡 역시 대표적인 대영 제국 탐험가였고요. 따라서 아서 클라크는 위대한 영국 탐험가에게 찬사를 바치고 싶었을 테고, <라마와의 랑데부>에 인데버를 집어넣었을 겁니다. 제임스 쿡이 태평양을 탐험한 것처럼 아서 클라크는 우주 탐사대가 초거대 우주선을 돌아다니기 바랐을 겁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는 정말 거시적이고 감동적인 소설입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저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고 우주를 연상할지 모릅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는 좋은 SF 소설이 따라야 하는 표준적인 절차일지 몰라요. 아득하고 머나먼 우주에서 인류를 돌아보고 외계를 상상하는 것. 이는 SF 소설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큰 미덕일 겁니다. 아마 제임스 쿡이 <라마와의 랑데부>를 읽을 수 있다면, 거시적인 탐험 이야기에 꽤나 기뻐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임스 쿡은 대항해 시대에 속한 탐험가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유럽 탐험가들처럼 제임스 쿡은 식민지 침략으로 이어지는 발판을 열었습니다. 제임스 쿡은 나름대로 마오리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어요. 하지만 이 양반은 원주민들이 야만적인 짐승이라고 생각했고, 대영 제국이 뉴질랜드를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임스 쿡은 위대한 탐험가인 동시에 흔한 제국주의자였어요. 다른 탐험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임스 쿡이 다녀간 이후, 유럽 침략자들은 토착민들을 학살했고 토착 문화들을 파괴했습니다. 오세아니아 사람들에게 제임스 쿡은 대대적인 재앙이었습니다.
위대한 탐험가로서 제임스 쿡. 제국주의를 여는 제임스 쿡. 우리가 두 위상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대항해 시대에 과학 탐사와 식민지 침략은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관계였습니다. 저는 제임스 쿡이 위대한 탐험가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런 탐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라마와의 랑데부> 같은 우주 탐사 소설을 좋아하는 것처럼 저는 이런 탐험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식민지 침략을 외면하지 못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제임스 쿡 선장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일까요? 제임스 쿡 선장이 정말 발견했나요? 인간이 인간을 발견할 수 있나요? 아니죠. 이는 분명히 제국주의적인 시각입니다. 이는 유럽 침략자가 정당하다는 시각이죠. 이런 제국주의적인 시각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식민지 침략이 자본주의를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대항해 시대 동안 유럽은 상업 자본주의를 발달시켰습니다. 대항해 시대와 자본주의 발달은 서로 떨어지지 못하는 관계입니다. 누군가가 대항해 시대를 부정한다면, 그 사람은 자본주의 역시 부정해야 합니다.
유럽은 여전히 자본주의 강대국이고, 그래서 대항해 시대를 좋게 포장하느라 애씁니다. 유럽은 식민지 침략을 사과하고 보상하지 않아요. 유럽은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합니다. 착취와 침략 덕분에 그런 기득권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착취와 침략 덕분에 서구적인 근대화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이유는 그런 착취와 침략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서 정당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이는 강요가 아닙니다. 이는 당연한 논리입니다.
SF 우주 탐사물들은 이런 대항해 시대에서 많은 요소들을 빌립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는 그걸 증명하는 사례가 될 수 있겠죠. 비단 이런 하드 SF 소설만 아니라 비디오 게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스케이프 벨로시티>, <엘리트>, <스타 트레이더스>, <이브 온라인>, <스텔라리스> 같은 게임들은 대항해 시대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우주 해적은 별로 드문 소재가 아니죠. 아마 이런 게임들을 (코에이가 만든) <대항해시대> 시리즈와 비교해도, 그건 어색한 비교가 아닐 겁니다. <에스케이프 벨로시티>와 <대항해시대>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우주선과 범선을 구입하고, 외계 행성들과 외국 항구들을 돌아다니고, 새로운 지역을 발견하거나 교역품을 실어나르고, 해적들과 싸웁니다.
비록 하나는 우주이고 다른 하나는 바다이나, <에스케이프 벨로시티>와 <대항해시대>는 서로 비슷하게 보입니다. 이는 <에스케이프 벨로시티>와 <대항해시대>가 완전히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스페이스 오페라와 근대 해양 탐험이 똑같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근본적인 감성은 비슷합니다. 왜 아서 클라크 같은 저명한 하드 SF 작가가 구태여 제임스 쿡에게 찬사를 바쳤겠어요.
그래서 SF 작가가 우주 탐사를 쓰거나 SF 독자가 우주 탐사를 읽을 때, 비판 의식이 필요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에스케이프 벨로시티>나 <스타 트레이더스> 같은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할 때, 비판 의식이 필요할 겁니다. 비판 의식이 없다면, SF 작가나 게임 플레이어는 저도 모르게 제국주의를 찬성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임스 쿡 선장은 여전히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한 사람이 되고, 오세아니아 사람들은 배제됩니다.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 거시적인 시각을 연출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만약 <라마와의 랑데부>를 읽을 수 있다면, 제임스 쿡은 기뻐하겠죠. 하지만 자신이 무슨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반성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