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다섯 번째 계절> 번역 판본과 수마트라 호랑이 본문
"모험가 일행은 흡혈귀 성채에 들어갑니다. 흡혈귀 성채는 무시무시하고 음산합니다. 불안한 기운은 사방을 가득 채운 것 같습니다. 복도는 널찍하나, 사악한 공기는 널찍한 복도를 맴돕니다. 복도 천장과 두 벽면, 바닥에는 상스러운 저주 문구들과 잔인한 흑마술 마법진들이 있습니다. 붉은 송곳니 그림들 역시 벽면을 장식했습니다. 을씨년스럽고 낮은 웃음소리는 공기를 희미하게 두드립니다. 전반적으로 성채 복도는 공포를 이용하고 방문자를 압박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건장한 사내가 성채에 들어간다고 해도, 계집애가 질질 짜는 것처럼, 심지어 건장한 사내조차 무너질지 모릅니다."
만약 테이블 던전 탐험 게임에서 이렇게 던전 마스터가 묘사한다면, 이런 묘사에는 여러 문제들이 있을 겁니다. '계집애는 질질 짠다'는 가부장적인 표현입니다. 게다가 이건 현실 속의 가부장적인 표현입니다. 던전 마스터는 흡혈귀 성채를 묘사했습니다. 던전 탐험, 모험가 일행, 흡혈귀 성채는 중세 유럽 판타지 설정입니다. 던전 탐험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던전 마스터는 그 자체로서 중세 유럽 판타지 세계가 존재한다고 인식합니다. 하지만 던전 마스터는 '계집애는 질질 짠다'고 말했고, 중세 유럽 판타지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던전 마스터는 현실 속의 가부장적인 표현을 이용했습니다.
어쩌면 중세 유럽 판타지 세계에는 '계집애는 질질 짠다'는 표현이 없을지 모릅니다. 중세 판타지 세계에서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쓰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건 현실 속의 가부장적인 표현입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가장 지배적인 경제 체제이고,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본주의는 가부장 문화를 형성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남자가 주된 인간이고 여자가 보조적이라고 세뇌합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여자를 비하합니다. 여자는 주된 인간이 아닙니다. 여자가 보조적이고, 미천하고, 열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자를 비하합니다. 남자를 위해 여자는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여자를 비하하기 때문에, 계집애는 질질 짜야 합니다. 사람들이 여자를 비하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표현은 여자를 이용합니다. 이건 현실 속의 가부장적인 표현입니다. 어쩌면 중세 유럽 판타지 세계에는 가부장적인 표현이 없을지 모릅니다. 만약 중세 유럽 판타지 세계에 가부장적인 표현이 있다고 해도, 중세 유럽 판타지 사람들은 '계집애는 질질 짠다'고 말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흡혈귀 성채를 묘사하기 위해 던전 마스터는 언어를 이용했으나, 이 언어는 중세 유럽 판타지 세계보다 현실에 속합니다. 흡혈귀 성채를 묘사하기 위해 던전 마스터는 현실 속의 언어를 이용했습니다.
흡혈귀 성채가 중세 판타지 설정임에도, 중세 판타지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던전 마스터는 현실 속의 언어를 이용했습니다. 아무리 중세 판타지 세계가 비일상적인 상상력이라고 해도, 던전 마스터는 현실 속의 언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중세 판타지 세계보다 현실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중세 판타지는 현실을 뛰어넘지 않습니다. 만약 중세 판타지가 현실을 뛰어넘는다고 해도,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중세 판타지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던전 마스터가 노력한다고 해도, 중세 판타지보다 현실은 우선하고, 던전 마스터는 중세 판타지 세계보다 현실에 속합니다. 현실 속에서 던전 마스터는 흡혈귀 성채와 모험가 일행을 묘사합니다.
던전 마스터가 흡혈귀 성채보다 다른 뭔가를 말한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던전 마스터는 뭔가를 말해야 합니다. 만약 던전 마스터가 드루이드와 자연 신성 주문을 묘사한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던전 마스터는 묘사해야 합니다. 드루이드와 자연 신성 주문은 중세 유럽 판타지 설정이나, 현실 속에서 던전 마스터는 휘감는 덩굴과 맛있는 열매(goodberry)와 마법 송곳니를 묘사해야 합니다. 맛있는 열매 주문을 묘사하기 위해 던전 마스터는 현실 속의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중세 판타지보다 현실이 우선하는 것처럼, 던전 마스터보다 언어(한국어)는 우선합니다. 던전 마스터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언어는 존재해왔습니다. 언어는 지배적입니다.
던전 마스터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남한 사회에서 한국어는 존재해왔습니다. 던전 마스터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남한 사회에서 한국어는 역사를 거쳤습니다. 던전 마스터보다 한국어는 훨씬 거대하고 훨씬 우선합니다. 한국어가 훨씬 거대하고 우선하기 때문에, 한국어는 던전 마스터를 지배합니다. 던전 마스터는 중국어나 스와힐리어나 아랍어를 배울 수 있으나, 한국어처럼, 던전 마스터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중국어와 스와힐리어와 아랍어는 존재해왔습니다. 아랍어는 지배적입니다. 만약 던전 마스터가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다면, 지배적인 언어 문화에서 던전 마스터는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만약 던전 마스터가 새로운 언어를 구사한다면, 소통은 불가능할 겁니다. 언어는 지배적인 기호, 사회적인 기호입니다. 새로운 언어는 오직 던전 마스터만의 개인적인 기호입니다. 만약 던전 마스터가 개인적인 기호를 이용한다면, 소통은 불가능할 겁니다. "와떼사 칼롸하미 아난타시떼." 이게 무슨 뜻인가요? 남한 사람들은 이 문장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이 문장은 "우리는 성 소수자 차별을 없애야 한다."입니다. 하지만 이 문장이 사회적인 기호보다 개인적인 기호이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은 이 문장을 해석하지 못합니다. 던전 마스터는 개인적인 기호보다 사회적인 기호, 한국어를 이용해야 합니다.
WANNA·ONE, Twice, Apink, MOMOLAND, 여자친구, ASTRO, GOT7, NU'EST, B.A.P, BLACKPINK, IZ*ONE, NCT 127. 여기에서 통상적으로 남한 시민들에게 가장 친숙한 명칭이 무엇인가요? 대답들은 다양할 겁니다. 어떤 사람은 IZ*ONE이라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IZ*ONE이 유일하게 특수 문자 '*'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Twice라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Twice가 유일하게 T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BLACKPINK라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BLACKPINK가 유일하게 오직 색깔 이름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무엇보다 많은 남한 시민들에게 가장 친숙한 명칭은 '여자친구'일 겁니다. 왜 '여자친구'가 가장 친숙한 명칭인가요? Red Velvet처럼, 여러 아이돌 그룹 명칭들은 영어입니다.
여러 아이돌 그룹들이 남한 태생이라고 해도, 미국 제국주의가 패권을 휘두르기 때문에, 아이돌 스타들은 한국어 명칭보다 영어 명칭을 따릅니다. 서구 제국주의 속에서 서구(미국) 언어는 가장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다릅니다. 여자친구에게도 GFriend라는 영어 명칭이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국내에서 통상적으로 여자친구는 GFriend보다 '여자친구'입니다. 영어 GFriend보다 한국어 여자친구는 화려함, 우월함보다 친숙함을 강조합니다. 만약 어떤 남한 시민들이 아이돌 그룹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해도, 이런 남한 시민들이 위 명칭들을 본다면, 그들은 '여자친구'가 가장 친숙하다고 간주할 겁니다. 아무리 미국 언어가 패권을 휘두른다고 해도, 여전히 일상에서 한국어는 남한 시민들을 지배합니다.
만약 던전 마스터가 한국어를 이용한다면, 지배적인 언어 문화에서 던전 마스터는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작가들에게 이것은 문제가 아닐지 모릅니다. 상대적으로 조남주 작가와 소설 <82년생 김지영>에게 이건 문제가 아닐지 모릅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비일상적인 세계를 상상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드루이드와 자연 신성 주문을 상상하지 않습니다. <82년생 김지영>에서 드루이드는 맛있는 열매들을 생성하지 않고, 흡혈귀 남작을 휘감기 위해 덩굴을 조종하지 않고, 검치 호랑이 동료에게 마법 송곳니 주문을 걸지 않습니다. 하지만 던전 마스터에게 지배적인 언어 문화는 문제입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달리, 던전 마스터는 중세 판타지, 비일상적인 세계, 흡혈귀 성채와 사악한 흑마술 마법진, 드루이드와 휘감는 덩굴 주문을 묘사해야 합니다. 중세 판타지 세계는 또 다른 세계이고, 또 다른 세계에는 또 다른 언어가 있을 겁니다. 지배적인 한국어 문화에서 던전 마스터가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던전 마스터는 한국어 문화보다 실반 언어 문화를 따라야 할 겁니다. 중세 판타지 세계에서 숲 속 종족들과 드루이드는 실반 언어를 구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던전 마스터가 드루이드와 유니콘과 님프와 그린 드래곤의 대화를 묘사한다고 해도, 던전 마스터는 실반 언어 문화보다 한국어 문화를 따릅니다.
던전 마스터를 비롯해 여러 SF/판타지 작가들은 이런 문제에 부딪힙니다. SF/판타지 번역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던전 마스터처럼, 비일상적인 세계, 또 다른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SF/판타지 번역가들은 지배적인 언어 문화에 부딪혀야 합니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시엔은 반지 정원의 수많은 연못가들 중에서 한 곳에 모여있는 진홍색 제복 무리를 발견한다. 연못 반대편 장미 덩굴에 둘러싸인 옴폭한 공간에서 수호자 한 명은 청중들에게 둘러싸인 어린 오로진 하급자의 노래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소설 <다섯 번째 계절> 한국어 번역 판본은 서술합니다.
여기에서 소설 <다섯 번째 계절> 한국어 번역 판본은 "호랑이도 제말하면 나타난다더니."라고 서술합니다. 이건 좀 이상합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사이언스 판타지입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로서 <다섯 번째 계절>은 또 다른 세계, 비일상적인 세계를 묘사합니다. 또 다른 세계 속에서, 비일상적인 사이언스 판타지 세계에서 호랑이가 존재하나요? 만약 <다섯 번째 계절> 속에서 호랑이가 존재한다면, 이 호랑이가 아무르 호랑이에 가까운가요, 아니면 수마트라 호랑이에 가까운가요? 수마트라 호랑이는 유전적으로 아주 특별합니다. 사이언스 판타지 세계 속에서 수마트라 호랑이가 존재하나요?
"호랑이도 제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이건 한국 속담입니다. 이건 좀 이상합니다. 시에나이트는 오로진입니다. 현실 속에서 네 반지 오로진 시에나이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에나이트는 사이언스 판타지 세계에 속합니다. 시에나이트가 사이언스 판타지 세계에 속함에도, 어떻게 오로진 시에나이트가 한국 속담을 구사하나요? 시에나이트가 수마트라 호랑이를 아나요? 시에나이트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수마트라 호랑이가 유전적으로 특별한가요? 이렇게 소설 독자는 의심할 수 있으나, 이런 의심에는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나타난다더니." 이건 SF 설정보다 한국어 문화입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 번역가 박슬라는 한국어 문화를 따랐고 "호랑이도 제말하면 나타난다더니."라고 번역했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사이언스 판타지이나, 사이언스 판타지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소설 번역가 박슬라는 한국어 문화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이건 번역가 잘못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판타지로서 <다섯 번째 계절>이 신조어들을 줄줄이 늘어놓기 때문에, 한국어 문화와 SF 설정 사이에서 박슬라 번역가는 정말 깊게 고민한 것 같습니다. 소설 곳곳에서 독자는 얼마나 번역가가 고민했는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서 사이언스 판타지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 자체로서 사이언스 판타지 세계가 존재한다고 해도, 허구와 현실, 모순적인 경계선에서 사이언스 판타지 세계는 존재합니다. 박슬라 번역가가 그 자체로서 사이언스 판타지 세계를 인식한다고 해도, 모순적인 경계선에서 박슬라 번역가는 SF 설정을 지배적인 한국어 문화로 전환하거나 SF 설정을 묘사하기 위해 한국어 문화를 따릅니다. 모순적인 경계선에서 오로진 시에나이트는 존재하고, 그래서 독자는 허구와 현실을 완전히 분리하지 못합니다. 허구와 현실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현실을 허구(SF 세계)에 대입할지 모릅니다. SF 설정은 현실 비유가 될지 모릅니다.
"언젠가는 우리처럼 훌륭해질 수 있다고 말해주어라. 어떤 대접을 받든, 우리에게 속한 몸임을 알려주어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존중을 받고 싶다면, 노력하고 얻어야 한다고 말해주어라. 인정을 받기 위해 기준을 충족해야 하고, 이 기준은 완벽함이다. 누군가가 이 모순을 조롱한다면, 죽여라. 그리고 남은 사람들에게 나약함과 의심 때문에 그들이 죽어 마땅했다고 말해주어라. 그러면 불가능한 것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자진해서 망가질 것이다." 이건 SF 설정입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이렇게 어떤 황제는 서술합니다. 이건 펄크럼 오로진들을 구속하고 제약하기 위한 계략 같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이 문구가 계급 투쟁을 가리킨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노동자들이 훌륭해질 수 있다고 세뇌합니다. 개인 창고에서 스티브 잡스가 애플 컴퓨터를 뚝딱뚝딱 만드는 것처럼, 누구나 성공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성공 신화를 미화하고 포장합니다. 성공하기 위해 노동자는 자본가가 되어야 합니다. 노동자 계급이 자본가 계급에게 반드시 속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 계급은 해방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 계급에게 반드시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만약 노동 조합이 기업 경영에 개입한다면, 수구 꼴통 언론들은 지랄지랄거리고 게거품을 부글거릴 겁니다.
만약 피지배 계급이 여기에 저항한다면, 지배 계급은 피지배 계급을 죽일 겁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1차 세계 대전에 반대했고 노동자 계급을 선동했기 때문에, 지배 계급과 사회 민주당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배척했고, 로자는 끔찍하게 죽었습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광신적인 빨갱이 새끼들이 죽어마땅하다고 세뇌합니다. 그래서 피지배 계급, 민중들은 자본가 계급에게 충성합니다. 이른바 '자칭' 페미니즘조차 자본가 계급에게 너무 열심히 충성충성합니다. 아무리 얄팍한 진보들이 바르고 고운 말들을 떠든다고 해도, 바르고 고운 말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고작 바르고 고운 말들 따위는 문제가 아닙니다.
평소에 유럽 사회 민주당들은 바르고 고운 말들을 떠벌였으나, 제국주의 전쟁이 터졌을 때, 유럽 사회 민주당들은 제국주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떠받들었습니다. 아무리 얄팍한 진보들이 바르고 고운 말들을 떠든다고 해도, 바르고 고운 말들보다 이데올로기 투쟁은 훨씬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바르고 고운 말들보다 이데올로기 투쟁 때문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비참하게 죽었음에도, 여전히 얄팍한 진보들, '자칭' 페미니즘은 바르고 고운 말들이 전부라고 간주합니다. '자칭' 페미니스트들이 또 다른 로자 룩셈부르크를 때려죽이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요?
하지만 얄팍한 진보들이 자본주의에게 충성한다고 해도, 이건 얄팍한 진보들 잘못이 아닙니다. 제국 펄크럼을 위해 오로진들이 자진해서 망가지는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 계급을 위해 민중들은 스스로 망가집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리고 민중들을 세뇌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입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학계를 장악하고 사람들을 세뇌함에도, 어떻게 피지배 계급이 자본주의가 나쁘다고 쉽게 깨달을 수 있나요? 이렇게 소설 독자는 현실을 사이언스 판타지에 대입하고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이 자본주의를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허구와 현실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현실을 허구(SF 세계)에 대입할지 모릅니다. 그 자체로서 SF/판타지 장르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매체와 형식 없이, SF/판타지 장르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현실 속에서 매체와 형식 없이, SF/판타지 소설, 만화, 연극, 영화, 게임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던전 마스터가 가부장적인 표현을 이용하고, <다섯 번째 계절> 한국어 판본이 호랑이를 운운하는 것처럼, 매체와 형식은 SF/판타지 세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아무리 이 블로그가 오타들을 사정없이 남발한다고 해도, 이 블로그 역시 언어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