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다섯 번째 계절>과 종이 위의 글자들 본문
※ 이 게시글은 노라 제미신이 쓴 <다섯 번째 계절>의 아주 치명적인 결말을 포함합니다.
소설은 글자들입니다. 글자들은 소설을 구성합니다. 이사벨 아옌데가 쓴 <영혼의 집>은 세계적인 문학이나, 소설 <영혼의 집>은 물리적으로 하얀 종이 위의 검은 글자들입니다. 하루 종일 독자가 두 눈을 부라리고 <영혼의 집>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하얀 종이 위의 글자들을 읽어야 합니다. 이사벨 아옌데의 다른 소설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사벨 아옌데가 열대 밀림 속의 마법 재규어를 쓴다고 해도, 독자는 마법 재규어를 시각적으로 구경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글자들을 읽고 마법 재규어를 상상해야 합니다. 문제는 글자들이 추상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단 글자들만 아니라 언어는 추상적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이용해 소통하나, 언어는 추상적이고 사물, 사건, 현상, 대상을 직접 가리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언어를 이용하자고 약속하기 때문에, 언어는 뭔가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언어가 뭔가를 가리킨다고 해도, 언어와 대상 사이에는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언어와 대상은 직접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죽 등껍질이 있는 가장 거대한 바다 거북을 장수 거북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이 해양 파충류와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는 직접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어쩌면 나중에 한반도 사람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할지 모릅니다. 그때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는 사라질지 모릅니다.
만약 거대 괴수 덕후가 '모스라'라는 단어를 읽는다면, 거대 괴수 덕후는 거대 괴수 모스라의 형태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거대 괴수 모스라와 '모스라'라는 단어는 직접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거대 괴수 덕후가 아닌 사람들은 모스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들이 단어 모스라를 읽는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대상을 머릿속에서 떠올려야 하는지 알지 못할 겁니다. "어머, 이게 뭐지? 모스라? 이게 모스 부호를 뜻하나?" 이렇게 사람들은 단어 모스라와 거대 나방 괴수를 연결하지 못할 겁니다. 모스라가 특정한 문화(거대 괴수 장르)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모스라'라는 단어는 당장 거대 괴수 모스라를 가리키지 못합니다.
오직 특정한 문화(거대 괴수 장르) 속에서만 모스라는 유명세를 자랑합니다. 그래서 특정한 문화 밖에서 '모스라'라는 기호는 거대 괴수 모스라와 이어지지 못합니다. 단어 모스라와 거대 나방 괴수 사이에는 빈틈이 있습니다. 사실 장수 거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는 보편적인 기호이나, 장수 거북이 특별히 유명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장수 거북이라는 단어를 장수 거북과 연결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마리옹 코티야르라는 단어를 읽는다면, 사람들은 유명한 배우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마리옹 코티야르와 달리, 장수 거북은 인기 스타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단어 장수 거북을 읽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어머, 이게 뭐지? 이게 무슨 동물이지?"라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스탈린은 콧수염을 기른 남자이다." 이 문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이 문장을 읽는다면, 많은 사람들은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스탈린들이 있으나,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은 가장 유명한 스탈린입니다. 하지만 저 문장이 반드시 이오시프 스탈린을 가리키나요? 근거가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이외에 다른 많은 스탈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어떤 스탈린들은 콧수염을 길렀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스탈린들은 열정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인지 모릅니다. 레프 트로츠키가 존경스럽기 때문에, 어떤 스탈린들은 콧수염을 길렀는지 모릅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레프 트로츠키 역시 콧수염을 길렀습니다. 그래서 저 문장은 반드시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만약 저 문장이 이오시프 스탈린을 가리키고 싶다면, 저 문장은 스탈린이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라고 자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스탈린이라는 단어(기호)와 현실 속의 소비에트 연방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의도적으로 관계를 만들 뿐입니다.
이렇게 스탈린이라는 단어는 직접 이오시프 스탈린이라는 대상을 가리키지 못합니다. 언어는 대상을 직접 가리키지 못합니다. 언어는 대상을 우회적으로 가리킵니다. 그래서 언어 활동은 비유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뭔가를 비유하는지 모릅니다. 비유는 대상을 직접 가리키지 않고 우회적으로 가리키는 방법입니다. 만약 언어가 대상을 우회적으로 가리켜야 한다면, 언어 활동은 비유가 될 겁니다. 소설이 글자들이기 때문에, 소설은 비유인지 모릅니다. 이건 비단 문학성만이 아니라 소설을 구성하는 물리적인 요소들 그 자체가 비유라는 뜻입니다.
만약 언어 활동이 비유라면, 우리는 제대로 소통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대상을 직접 가리키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가리켜야 합니다. 이건 불화를 일으킬 겁니다. 그래서 철학자들과 비평가들은 언어가 소통과 문학에 적합한 도구인지 회의합니다. 불행하게도 소설 작가는 이런 도구를 이용해야 합니다. 언어가 소통과 문학에 적합하지 않다고 해도, 소설 작가는 다른 도구를 이용하지 못합니다. 만화 작가, 보드 게임 제작자, 영화 감독, 비디오 게임 프로그래머는 언어 이외에 다른 도구들을 이용할 수 있으나, 소설 작가는 오직 언어만을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종종 소설 작가들은 이런 단점을 거꾸로 이용하고 독특한 상황을 제시합니다. 언어가 비유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언어와 대상을 연결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마리옹 코티야르를 보고 "Noooooooooooon, rien de rien."이라는 가사를 연상하는 것처럼, 비유는 두 가지를 연결합니다. 두 가지(마리옹 코티야르와 "Noooooooooooon, rien de rien.") 사이에 직접 관계가 없다고 해도, 두 가지에는 유사성이 있고, 비유는 두 가지를 연결할 수 있어요. "코끝을 간지럽히는 봄이 찾아온 듯이 꽃 피는 내 맘에 나비가 돼 날아와. 날갯짓에 난 또 설레잖아." 이 노래 가사는 의도적으로 연애 감정과 봄날 나비를 연결합니다. 이 가사는 연애 감정을 봄날 나비에 비유합니다. 연애 감정과 봄날 나비 사이에 직접 관계가 없음에도, 이 가사는 양쪽에 유사성이 있다고 간주하고 양쪽을 연결합니다. 이 노래 가사와 모스라에게 모두 나비(나방)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 가사와 모스라가 비슷하다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연애 감정과 거대 나방 괴수 모스라가 이어질 수 있나요? 모스라가 사랑인가요? 뭐, 영화 <고지라> 시리즈에서 분명히 모스라는 사랑이라는 개념과 가장 가까운 괴수입니다. 하지만 버닝썬 여파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저 노래 가사에서 설레는 감성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연애 감정과 봄날 나비를 연결하지 못할 겁니다. 저 노래 가사와 버닝썬 사태 사이에 직접 관계가 없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를 연결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봄날 나비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연애 감정보다 버닝썬 사태를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봄날 나비는 연애 감정과 떨어지고 심각한 성 차별로 이어질 겁니다.
어떤 학생들은 학교 축제에 위너가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 보이콧을 외칠지 모르고, 어떤 학생들은 거기에 반박할지 모릅니다. ("세상에, 학교 축제에서 위너 라이브를 듣지 못하다니!") 물론 학생들이 버닝썬 사태를 비판하고 위너 보이콧을 외친다고 해도, 이런 학생들은 가부장 문화 그 자체를 뒤집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자칭 페미니스트들조차 가부장 문화를 열렬히 숭배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가부장 문화를 비판할 수 있을까요?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자칭 페미니스트들께서는 그저 노래 가사나 음반이나 아이돌 가수 멤버를 지적할 뿐이에요. 이런 자칭 페미니스트들은 봄날 나비라는 단어를 연애 감정과 떨어뜨리기 원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연애 감정과 봄날 나비 사이에 직접 관계가 없기 때문에, 양쪽은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유는 어떤 두 가지를 의도적으로 연결하거나 떨어뜨립니다. 언어 활동이 비유라면, 이런 연결 작업과 분리 작업처럼,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언어와 대상을 연결할 겁니다.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관계를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관계를 지울 수 있습니다. 연애 감정과 봄날 나비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양쪽이 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소설 작가는 언어 표현과 대상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소설 작가는 의도적으로 관계를 지우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도형은 유명한 착시 그림입니다. 2차원에서 이 도형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도형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이 그림을 보고 도형을 인식할 수 있으나, 동시에 우리는 현실에 이 도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식합니다. 종이 위(2차원)에서 불가능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 사건, 현상, 배경 같은 요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어가 비유이기 때문에, 언어가 대상을 직접 가리키지 않기 때문에, 언어에는 빈틈이 있습니다. 소설 작가는 이 빈틈을 이용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불가능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노라 제미신이 쓴 <다섯 번째 계절>은 크게 세 주연 등장인물들을 보여줍니다. 소녀 다마야, 처녀 시에나이트, 엄마 에쑨은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갑니다. 독자는 어떻게 오로진 초인으로서 세 등장인물들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는지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독자가 재미있게 <다섯 번째 계절>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세 등장인물들이 동일 인물이라고 쉽게 깨닫지 못할 겁니다. 사실 소녀 다마야, 처녀 시에나이트, 엄마 에쑨은 동일 인물입니다. 소녀 다마야는 성장하고 처녀 시에나이트가 되고, 시에나이트는 여러 아이들을 낳고 엄마 에쑨이 됩니다. 하지만 소설 후반부까지 독자는 이걸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다마야와 시에나이트와 에쑨이 동일 인물임에도, 왜 독자가 알아차리지 못하나요? 나이 차이가 있다고 해도, 다마야와 시에나이트는 닮았을 겁니다. 소녀가 성장하고 처녀가 된다고 해도, 얼굴과 인상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습니다. 시에나이트가 나이를 먹고 아이들을 낳는다고 해도, 시에나이트와 에쑨은 닮았을 겁니다. 하지만 독자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소설이 글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소녀 다마야, 처녀 시에나이트, 엄마 에쑨은 글자들입니다. 독자가 이사벨 아옌데 소설을 읽고 마법 재규어를 직접 구경하지 못하는 것처럼, 독자는 소녀 다마야, 처녀 시에나이트, 엄마 에쑨을 직접 구경하지 못합니다.
세 등장인물들은 하얀 종이 위의 검은 글자들입니다. 착시 도형 그림처럼, 오직 특정한 상황(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인 상황)에서만 세 등장인물들은 존재합니다. 소설이 글자들이기 때문에, 노라 제미신은 이런 독특한 상황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섯 번째 계절>이 만화나 실사 영화라면, 이런 독특한 상황은 사라질지 모릅니다. 만화 작가는 시에나이트와 에쑨을 비슷하게 그려야 할 겁니다. 영화 <다섯 번째 계절>에서 시에나이트 배우와 에쑨 배우는 똑같은 배우여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만화 <다섯 번째 계절>과 실사 영화 <다섯 번째 계절>은 세 주연 등장인물들, 다마야와 시에나이트와 에쑨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쉽게 감추지 못할 겁니다.
만약 만화 작가가 다마야와 시에나이트를 너무 다르게 그리거나, 시에나이트 배우와 에쑨 배우가 너무 다르다면, 만화 독자들과 영화 관객들은 불만을 터뜨릴지 모릅니다. "뭐야? 시에나이트와 에쑨이 동일 인물이야? 하지만 두 사람은 별로 닮지 않았어!" 이렇게 영화 관객들은 불만을 터뜨릴지 모릅니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에는 오딘(안소니 홉킨스), 헬라(케이트 블란쳇), 토르(크리스 햄스워스), 로키(톰 히들스턴)가 나옵니다. 하지만 크리스 햄스워스와 케이트 블란쳇과 안소니 홉킨스가 별로 닮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관객들은 캐스팅이 이상하다고 수군거립니다.
크리스 햄스워스가 안소니 홉킨스와 케이트 블란쳇과 닮지 않았다고 해도, 이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토르-로키입니다. 하지만 실사 영화 <다섯 번째 계절>이 배우들을 잘못 배치한다면, 이건 커다란 문제가 될 겁니다. 다마야, 시에나이트, 에쑨은 동일 인물이고, <다섯 번째 계절>에서 이건 가장 중대한 반전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만화 <다섯 번째 계절>이 그림을 잘못 그린다면, 실사 영화 <다섯 번째 계절>에서 배우들이 별로 닮지 않았다면, 이건 가장 중대한 반전을 날려먹을지 모릅니다. 소설이 시각적이지 않기 때문에, 소설은 시각적이지 않은 상황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런 상황과 사이언스 판타지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다마야, 시에나이트, 에쑨은 동일 인물이고, 이건 가장 커다란 반전입니다. 하지만 이건 SF 요소가 아닙니다. 사실 주류 문학 역시 얼마든지 이런 상황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계절>은 SF(Science Fantasy) 소설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계절>이 비단 'SF' 소설일 뿐만 아니라 SF '소설'이기 때문에, <다섯 번째 계절>은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