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다른 것에게 인격을 전송한다는 의미 본문
[거대 괴수 병기를 조종하기 위해 인격 전송은 좋은 방법일 수 있으나,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한때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전히 <너의 이름은>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일본 로맨스 애니메이션의 어떤 흐름을 상징하죠. 이 애니메이션에는 어떤 소녀와 소년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영혼을 바꾸죠. 소녀의 영혼은 소년의 몸으로 들어가고, 소년의 영혼은 소녀의 몸으로 들어가고요. 영혼이라는 표현이 맞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등장인물들이 영혼이나 인격을 바꾸는 설정은 창작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아무도 그걸 부정하지 않죠.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과 부대낍니다. 당연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 원해요.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 원한다고 해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지 못하고, 오직 개인적인 관점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영혼이나 인격이 바뀌는 설정은 어떤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는 과정을 보여주죠.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떻게 개인이 다른 개인을 이해할 수 있는지 구경할 수 있고요.
어쩌면 이런 방법은 고전적인 <왕자와 거지>와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너의 이름은>은 판타지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추가했죠. 반면, <왕자와 거지>는 훨씬 현실적입니다. 왕자와 거지는 신분(계급)을 바꿨고, 그래서 양쪽은 어떻게 다른 신분(계급)이 살아가는지 피부로 깨달았죠. 하지만 <너의 이름은>에서 소녀와 소년은 아예 서로의 몸을 차지했고, 그래서 상대가 누구인지 훨씬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저 피상적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알지 못해요. 이 블로그에서 저는 여러 글들을 썼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게시글을 모두 읽는다고 해도, 그 사람은 제가 누구인지 제대로 모를 겁니다. 그 사람은 오직 제가 드러내는 생태적인 상상력이나 생태 사회주의나 SF 소설을 바라보는 시각만을 알 수 있을 뿐이죠.
우리가 누군가를 제대로 파악하고 싶다면, 아주 가까이에서 우리는 그 사람을 지켜봐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인터넷 세상에는 오직 글로 상대를 파악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물론 이것 이외에 이런 설정이 사랑을 받는 이유들은 많을 겁니다. 저는 <너의 이름은>이라는 꽤나 낭만적인 연애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으나, 사실 완전히 다른 이야기들을 떠들고 싶습니다. 영혼이나 인격이 바뀔 수 있다면,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몸을 빼앗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설정은 끔찍한 참사를 초래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야생종>은 아주 무시무시하죠.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영혼이나 육체를 함부로 바꾸거나 빼앗는다면…. 그건 낭만적이거나 킥킥거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겠죠. 만약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아진다면, 영혼 도둑들이나 육체 도둑들이 아주 많아진다면,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거나 아주 살벌한 곳이 되겠죠. 생각해보세요. 영혼과 육체는 우리의 태생적인 자산입니다. 태어났을 때, 우리는 영혼과 육체를 가집니다. 영혼과 육체는 오롯히 개인적인 소유이고 다른 사람들이 빼앗지 못하는 자산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하는 영혼은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아무리 근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비인간적이고 잔인하다고 해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조차 육체를 빼앗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있죠. 하지만 이런 영혼과 육체조차 상품이 된다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육체를 빼앗기거나 육체를 바쳐야 한다면? 그때 우리는 우리의 태생적인 자산, 우리가 간직한 최후의 자산을 빼앗겼다고 느낄 겁니다. 그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상황과 비슷하겠죠.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닙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영혼과 육체를 바꾸는 이야기는 이런 상황들을 늘어놓고 자아와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겠죠. 이런 소재는 SF 작가들에게 커다란 인기를 끄는 것 같습니다. <너의 이름은>은 판타지이고, 판타지 소설들은 이런 소재를 열심히 변주합니다. 하지만 SF 소설들 역시 만만하지 않아요.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설정을 '인격 전송'이라고 부릅니다. SF 소설들 속에서 사람들은 인격을 전송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개념은 어색하지 않습니다. 인격 역시 정보이고, 따라서 정보화 시대에서 사람들은 인격을 저장하고 바꾸고 전송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계에게 자신의 인격을 전송하거나 다른 사람과 인격을 바꿉니다. 이런 설정은 쉽게 사이버펑크가 될 수 있고, 하드 SF 영역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런 설정은 좀 더 판타지에 근접할 수 있고요. 로버트 셰클리가 쓴 <불사 판매 주식 회사>는 사후 세계가 정말 존재한다고 가정합니다. 사후 세계에서 사람들은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육체가 죽는다고 해도, 그건 인생의 최종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후 세계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아요. 두 번째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사람들은 특별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훈련조차 두 번째 인생을 완전히 담보하기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예 사후 세계로 안전하게 들어가는 기계를 만듭니다. 기계는 인간의 영혼을 안전하게 사후 세계로 보냅니다. 당연히 소설 속에서 영혼(인격)을 바꾸는 상황은 일상적입니다. 이 사람의 영혼은 저 사람의 육체로 들어가고, 그 사람의 영혼은 또 다른 육체로 들어가거나 사후 세계로 가거나 아예 사라지고, 기타 등등. 소설 속의 세계는 아주 난리법석입니다.
사후 세계를 인정하기 때문에 <불사 판매 주식 회사>는 죽음이 무엇인지 물어봅니다. 하지만 죽음처럼 인격 전송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다른 사람의 육체를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게 무엇을 뜻할까요? 누가 그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을 결정하는 요인이 그 사람의 인격일까요 아니면 육체일까요?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물리적인 상황을 파악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물리적인 상황이나 육체적인 조건이 그 사람을 제대로 대변할까요? 소설 주인공은 다른 사람의 육체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은 이 육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소설 주인공이 다른 사람의 육체를 차지한다고 해도, 그 사람으로서 살지 않는다면, 소설 주인공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런 설정이 재미있는 이유는 (위에서 이미 한 번 말한 것처럼) 우리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인류 사회에서 인간 관계나 사교 관계는 필수적입니다. 인간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어렵죠. 그래서 인격 전송 설정은 독자들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정말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중일까? 그게 그저 편견에 불과하지 않을까?
21세기 초반 인터넷 세상에서 이런 물음은 더욱 중요할지 모르죠. 인터넷 세상에서 우리는 숱한 글들을 씁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직 우리의 일부를 표현할 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글들을 이용해 상대가 누구인지 파악합니다. 인터넷 세상에서 사람들은 글이 그 사람의 모두라고 파악합니다. 이는 꽤나 성급한 판단입니다. 우리는 오직 글들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글을 쓴 사람이 아니라 글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호평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인터넷 세상에서 우리는 글을 넘어 글을 쓴 사람을 비판하거나 호평하죠. 종종 그건 아예 심각한 모욕이나 비난이 되고요.
물론 글은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에 (저도 모르게 아니면 일부러) 자신을 투영할 수 있고요. 따라서 글을 이용해 상대를 파악하는 방법은 어느 정도 논리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끔 저는 이게 정말 논리적인 방법인지 좀 궁금합니다. 저는 <불사 판매 주식 회사>에서 소설 주인공 역시 비슷한 어려움에 부딪힌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개인이 다른 개인을 판단할 수 있는가? 영혼과 인격이 바뀌는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개인이 다른 개인을 판단하는가? <불사 판매 주식 회사>에서 사후 세계는 아주 중요한 설정이나, 인격 전송 역시 거기에 뒤쳐지지 않습니다. 아니, 어떤 독자들은 인격 전송이 더 인상적이라고 여길지 모르겠군요.
게다가 <불사 판매 주식 회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묘사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듭니다. 당연히 인격 역시 상품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격을 팝니다. 여기에는 양극화가 있고,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자신들의 인격을 팝니다. 흔히 사람들은 황금 만능주의나 돈 욕심이 자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잘못 짚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진짜 문제인 이유는 이런 양극화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황금 만능주의나 돈 욕심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계급 구조와 양극화 문제입니다. (하지만 숱한 사람들은 무조건 돈 문제에 자본주의를 갖다붙이죠.)
인격을 전송하는 시대에서 자본주의는 인격을 상품으로 만들고, 영혼의 양극화 문제가 벌어집니다. 이게 올바른 용어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양극화는 <불사 판매 주식 회사>를 대변할 수 있는 용어일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추억이나 일상이나 개인적인 자존심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일생을 (물리적으로) 지키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을 날려버려야 합니다. 나 자신은 (물리적으로) 나 자신이 되지 못합니다. 로버트 셰클리는 온갖 농담들을 곁들이나, 상황 그 자체는 꽤나 암울하죠.
<불사 판매 주식 회사>가 설정을 대충 넘어간다면, 리처드 모건이 쓴 <얼터드 카본>은 이 부분을 좀 더 파고듭니다. 분위기 역시 다릅니다. <불사 판매 주식 회사>가 미래 디스토피아를 웃기게 꾸몄다면, <얼터드 카본>은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입니다. 소설 속에서 인격을 전송할 수 있기 때문에 부자들은 반영구적인 삶을 누립니다. 늙은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젊은 육체를 구입하고, 거기에 자신의 인격을 전송할 수 있습니다. 양극화 문제는 아예 부자들을 반영구적인 신적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건이 터지고, 소설 주인공은 그걸 조사합니다.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들이 현대 사회의 온갖 부조리들을 고발하는 것처럼, <얼터드 카본> 역시 미래 사회의 양극화(영혼의 양극화)를 지적합니다. <불사 판매 주식 회사>보다 <얼터드 카본>은 좀 더 절실합니다. <얼터드 카본>에서 육체와 영혼을 잃는 문제는 훨씬 두드러집니다. <불사 판매 주식 회사>에서 소설 주인공은 시간 여행자이고 게다가 사후 세계를 방문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된 설정은 사후 세계죠. 하지만 <얼터드 카본>은 온전히 영혼의 양극화 문제에 집중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자산인 영혼조차 팔아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인간은 인간을 팔아야 합니다.
만약 <얼터드 카본>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아니라 다른 억압적인 사회를 그렸다면, 분위기나 주제나 느낌은 다소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만약 군사 정부가 사회를 억압적으로 통치하고, 강제로 영혼을 거두어간다면? 글쎄요, <얼터드 카본>은 예브게니 자마친이 쓴 <우리들>에 좀 더 가까워졌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상황은 <얼터드 카본>보다 우아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 역시 억압적인 사회를 보여주나, 적어도 사람들은 돈으로 뭔가를 사고 팔지 않습니다. 군사 정부가 사회를 억압적으로 통치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돈으로 영혼을 팔지 않을 겁니다. 군사 정부의 폭력은 아주 강대한 위협이고, 그런 상황에서 영혼을 잃는다고 해도, 적어도 사람들은 명예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죠.
하지만 돈은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돈이 천박하다고 말하죠. 아무리 군사 정부의 폭력이 강력하고 위험하다고 해도, 우리는 그걸 천박하다고 부르지 않습니다. 반면, 돈은 천박합니다. <얼터드 카본>에서 그런 돈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지막 자존심인 영혼을 넘겨야 합니다. <우리들>은 위험하고 폭력적이고 처절합니다. 반면, <얼터드 카본>은 비참하고 천박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영혼을 판다는 의미는 그런 감정들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얼터드 카본>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그리지 않았다면, 저는 소설이 풍기는 느낌이 아주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SF 소설이 사회 구조에 아주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불사 판매 주식 회사>와 <얼터드 카본>은 문자 그대로 돈으로 영혼을 사는 천박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SF 작가들은 인격 전송으로 다른 의미들을 고찰할 수 있겠죠. 존 스칼지가 쓴 <유령 여단>이 어떨까요? 이 소설은 육체와 영혼이 마구 바뀌는 상황을 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새로운 육체 속에서 새로운 영혼이 자라는 상황을 그립니다. <유령 여단>은 어떻게 자아가 형성되고 세상과 직면하고 다른 자아들과 소통하는지 보여줍니다. 따라서 <유령 여단>과 인격 전송 설정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례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유령 여단>은 분명히 인격 전송 설정을 이용하고, 몇몇 독특한 사례를 늘어놓습니다. 사실 전작 <노인의 전쟁> 역시 그런 사례를 보여줬고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나, 그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가 정말 사랑하는 누군가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만약 제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정말 머리가 어질어질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보다 내면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노인의 전쟁>에서 그건 다소 다른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불사 판매 주식 회사>와 <얼터드 카본> 역시 이런 주제를 다루고요. 이런 관점에서 <불사 판매 주식 회사>와 <얼터드 카본>과 <노인의 전쟁>은 서로 이어질 수 있을지 모르죠.
하지만 저는 이런 어질어질한 상황보다 다른 상황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만약 인격 전송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다른 생명체로 옮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인격을 장수 거북에게 옮긴다면, 그 장수 거북이 인간이 될까요? 우리는 인간의 겉모습보다 인간의 내면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장수 거북 속에 인간의 영혼이 있다면, 그 장수 거북은 인간에 가까울 겁니다. 우리가 그 장수 거북을 인간이라고 인정해야 할까요? 아무리 인간의 내면이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장수 거북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좀 더 상상력을 뻗을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문명: 비욘드 어스>처럼 인류가 제노 타이탄 같은 거대 괴수 병기를 만들었다고 가정하죠. 만약 인류가 인격 전송 장치로 인간의 의식을 제노 타이탄에 옮길 수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제노 타이탄을 바라봐야 할까요? 아니, 장수 거북이나 제노 타이탄 속의 인격이 인간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인격은 주변의 물리적인 환경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받습니다. 육체가 급격하게 바뀐다면, 인격 역시 급격한 변화를 겪겠죠. 이런 상황에서 인격이 계속 자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만약 인간이 인격 전송으로 제노 타이탄을 조종한다면, 거대 괴수에게 동화하지 않기 위해 제노 타이탄 조종사는 험난한 마음 고생을 겪어야 할지 모릅니다.
SF 소설 모음집 <얼터너티브 드림>에는 <사관과 늑대>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사관과 늑대>에서 군견을 조종하기 위해 병사들은 군견에게 인격을 전송합니다. 이게 정말 효율적인 방법일까요? <소년과 개>나 <스타타이드 라이징>처럼 똑똑한 개조 탐지견은 <사관과 늑대>보다 훨씬 효율적인 방법일지 모릅니다. 저는 <사관과 늑대>가 제시한 설정이 꽤나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똑똑한 개조 탐지견은 인격 전송 군견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군견병들이 군견 속에 인격을 집어넣고 군견으로서 살아간다는 상황입니다.
군견에 동화하지 않기 위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군견 속에서 군견병은 여러 고충들에 시달립니다. 이는 물리적인 육체가 영혼과 인격보다 앞선다는 뜻이죠. <사관과 늑대>는 다소 상투적인 단편 소설이나, 독자들은 정말 그렇게 영혼이나 인격이 대단한지 물어볼 수 있을 겁니다. 독자들이 훨씬 하드하고 풍부하고 깊은 소설을 원한다면, <블라인드 사이트>는 좋은 대답이 될 수 있겠고요. 우리는 영혼이 아주 엄청나게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나, 영혼은 그저 물리적인 육체가 조성한 전기 신호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전기 신호 때문에 우리는 웃고 떠들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블라인드 사이트>는 인간성을 구석구석 해체하고, 인간성을 밑바닥으로 떨어뜨립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거기에서 뭔가 가치를 발견하고 그걸 다시 띄웁니다. 네, 우리의 영혼이 고작 전기 신호에 불과하다고 해도, 우리의 영혼은 소중하죠.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 그런 전기 신호는 소중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마음대로 인격과 육체를 바꿀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사실은 크게 바뀌지 않을지 모르죠. 아니, 우리가 마음대로 인격과 육체를 바꿀 수 있다면, 아예 영혼들을 하나로 묶고 집단 지성을 이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싶으나, 육체는 장애물일지 모릅니다. 왜 우리가 육체에 얽매여야 할까요? 우리는 육체를 없애고 정신적으로 통합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를 훨씬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죠. 어쩌면 온갖 폭력과 차별을 없애는 방법은 그런 것일지 모릅니다. 뭐, 인류 전체가 텔레파시 능력을 각성한다면, 구태여 육체를 버릴 이유는 없겠죠. 하지만 정신적인 통합은 집단 텔레파시 각성보다 훨씬 현실적일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인격과 육체를 마음대로 전송한다고 해도 정신적인 통합이 너무 비약적인 상상이라고 지적할지 모르겠군요.
여기에서 저는 몇몇 소설을 언급했으나, 저는 다른 사례들을 계속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영화들이나 비디오 게임들을 언급한다면, 목록은 훨씬 길어지겠죠. 인격을 전송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육체를 복사할 수 있다면, 똑같은 인간이 두 명 생길까요? 원본과 복제가 똑같이 인간일까요? 크리스토퍼 프리스트가 쓴 <프레스티지>가 이런 사례에 해당할 수 있을까요? 뭐, 이렇게 계속 사례들과 물음들을 늘어놓는다면, 저는 밑도 끝도 없이 계속 이야기할 수 있겠군요. 하지만 저는 그것보다 인격 전송을 이용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잠시 떠들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세월이 담긴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 우리를 지탱한다고 믿습니다. 영혼은 그런 것이겠죠.
하지만 인격 전송 설정은 그걸 아주 쉽게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격 전송 설정은 우리의 폐부 깊숙한 곳을 찌를 수 있어요. 저는 이런 설정이 꽤나 자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유령 여단>처럼 우리가 아예 다른 생명체가 되는 설정은 재미있어요. 정말 인간이 거대 괴수 병기에게 인격을 전송한다면…. 저는 거대 괴수가 로망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이 거대 괴수로 변하는 꿈을 꿉니다. 하지만 거대 괴수 속에 인격을 집어넣는 설정은 상당히 끔찍할 것 같군요. 인간의 인격이 거대 괴수라는 물리적인 조건에게 잠식당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인격 전송은 거대 괴수 병기를 조종하는 좋은 방법일지 모릅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조화 친화력의 최종 병기는 제노 타이탄입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어떻게 사람들이 제노 타이탄을 조종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설정상 제노 타이탄은 100m를 넘기는 거대 괴수입니다. 불러오기 화면을 보세요. 사막 지대에서 솟아오르는 제노 타이탄은 정말 압도적(!)입니다. (공중 부양 구축함은 저리 가세요.) 만약 사람들이 제노 타이탄을 잘못 조종한다면, 내구력이 빵빵한 100m짜리 거대 괴수는 아군 부대를 짓밟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어설픈 조종 방법은 위험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인격 전송은 해결책이 될 수 있겠죠. 인간 조종사가 제노 타이탄에게 자신의 인격을 전송하고 제노 타이탄의 육체를 조종한다면…. 이게 별로 하드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방법은 <유령 여단>을 어설프게 따라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노 타이탄의 육체 속에서 인간 조종사의 인격은 급격한 물리적인 환경과 싸워야 할지 모릅니다. 제노 타이탄의 육체가 인간 조종사의 인격을 잠식하고, 결국 인간 조종사의 인격이 제노 타이탄의 육체와 동화한다면…. 슬슬 이건 피터 왓츠가 풍기는 느낌과 비슷할지 모르겠군요. 솔직히 거대 괴수가 되는 상상이 로망임에도, 저는 이런 방법이 다소 거시기하다고 느낍니다.
만약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인간 조종사의 인격이 계속 제노 타이탄의 육체 속에 머물러야 할까요? 그렇지 않겠죠. 제노 타이탄은 생체 로봇입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지지 않고 제노 타이탄을 조종할 이유가 없다면, 인간 조종사는 자신의 인격을 다시 회수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인격이 다시 조종사에게 돌아간다고 해도, 그 인격은 제노 타이탄의 육체가 저지른 행위를 기억할지 모릅니다. 인간으로서 조종사는 거대 괴수라는 망령과 싸워야 할지 몰라요. 그건 절대 쉽지 않겠죠. <걸리버 여행기>에서 자신의 나라로 돌아왔을 때 걸리버는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일반적인 사람들임에도, 걸리버는 자신이 거인들과 산다고 착각했어요. 물리적인 환경은 인격에 그런 영향을 미칠 수 있죠.
<노인의 전쟁>에서 인격 전송 이후 병사들이 느꼈던 어색함은 그런 종류입니다. 제노 타이탄을 조종하는 인간 조종사 역시 비슷한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그리고 <걸리버 여행기>를 언급할 이유 없이, 여러 훌륭한 SF 소설들은 그런 사변을 제시하고요. <불사 판매 주식 회사>나 <얼터드 카본>이 제시한 상황들 역시 흥미로우나, 저는 이런 설정이 좀 더 독특하다고 느낍니다. 인격 전송이 가능하다면, 구태여 우리가 인간에서 머물 필요는 없겠죠. 하지만 인간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그 값을 지불해야 할지 모릅니다. 거대 괴수가 된다면, 우리는 훨씬 거대한 값을 지불해야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