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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너에게 17년>과 타임 슬립 연애 이야기들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너에게 17년>과 타임 슬립 연애 이야기들

OneTiger 2019. 2. 3. 18:30

[이 소설은 타임 슬립 소설입니다. 그래서 이게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을까요?]



소설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이 시간 여행 소설일까요? 네, 물론 그렇습니다. 타마라 아일랜드 스톤이 쓴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은 시간 여행 소설입니다.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소설은 17년이라는 격차를 이야기합니다. 소설 등장인물들에게 17년이라는 격차는 커다란 갈등이 됩니다. 소설 등장인물들이 17년이라는 격차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아무도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이 시간 여행 소설이 아니라고 의심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SF 소설이 될까요? 어떤 독자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게 그저 타임 슬립 소설에 불과하다고 대답할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시간 여행이 나온다고 해도 무조건 이야기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할 겁니다. 분명히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은 SF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양치기가 양떼 사이에서 늑대를 쫓아내는 것처럼, 어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쫓아내기 원하겠으나, 그건 쉽지 않겠죠. 독자들이 <너에게 17년>을 쫓아내고 싶다면, 독자들은 다른 소설들을 함께 쫓아내야 합니다. 솔직히 소설 <너에게 17년>은 소설 <시간 여행자의 아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시간 여행자의 아내>와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을 함께 쫓아내고 싶어할 겁니다. 이런 독자들은 <시간 여행자의 아내>와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에 상상 과학이 없다고 말할 겁니다. 타임 슬립은 상상 과학이 아닙니다. 이건 마법과 다르지 않습니다. 소설 <시간 여행자의 아내>에서 시간 여행자는 아무 이유 없이 과거로 돌아갑니다. 소설 속에서 독자는 논리적인 상상 과학을 찾지 못합니다.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등장인물 베넷 쿠퍼는 시간 여행자입니다. 하지만 베넷 쿠퍼는 왜 자신이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베넷 쿠퍼는 그걸 특별히 파고들지 않고, 다른 등장인물 애나 그린 역시 거기에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시간 여행은 존재합니다. 베넷 쿠퍼와 애나 그린은 그저 거기에 만족할 뿐입니다. 베넷과 애나는 평행 세계나 시간 모순이나 그런 것들을 자세히 논의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소설은 자세한 상상 과학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제목이 풍기는 분위기처럼,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에서 중요한 것은 연애입니다. 베넷 쿠퍼와 애나 그린은 운명적인 연인이 됩니다. 두 사람은 시간을 거스르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건 어려운 과정이고, 소설은 그걸 강조합니다. 타마라 스톤 역시 그걸 강조하기 원했겠죠.



작가 후기에서 타마라 아일랜드 스톤은 왜 이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타마라 스톤은 <너에게 17년>이 시간 여행 소설이라고 인정하나, 이게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작가에게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에 연애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너에게 17년>을 읽을 때, 독자는 두근거리고 설레는 연애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애나 그린은 사랑에 빠지고 이른바 사랑의 콩깍지는 두 눈을 덮습니다. 애나 그린에게 베넷 쿠퍼는 최고의 남자이고 최고의 미남이고 최고의 연인입니다. 베넷 쿠퍼 역시 그렇게 생각하죠.


이런 설레는 감성은 소설을 관통하고, 작가는 거기에 주목했을 겁니다. 독자들 역시 거기에 주목하겠죠. 이런 상황에서 평행 세계나 자세한 상상 과학은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가장 멋진 남자 친구가 곁에 있다면, 상상 과학 따위가 중요하겠습니까? 시간 여행 이야기가 나온다고 해도, <너에게 17년>에게는 상상 과학을 자세히 늘어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너에게 17년>은 자세한 상상 과학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연애 이야기에 치중할 수 있습니다. 타임 슬립은 두근거리고 애타는 연애를 뒷받침하는 요소입니다. 타임 슬립은 그저 그런 역할에 만족할 뿐이고 다른 역할들을 맡지 않습니다.



타임 슬립이 다른 역할들을 맡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책임을 묻지 않을 겁니다. 이건 시간 여행 논문이 아닙니다. 이건 소설이죠. 소설은 어떤 특정한 뭔가가 아닙니다. 소설은 온갖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은 시간 여행보다 연애 이야기에 비중을 할애했고, 아무도 이 소설이 시간 여행을 무책임하게 방치했다고 지적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SF 독자들이 <너에게 17년>을 싫어한다고 해도, 그들은 책임을 묻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너에게 17년>이 SF 울타리에 들어오고 싶다면, 책임에 상관없이, <너에게 17년>은 뭔가를 증명해야 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장르입니다. 장르에는 특정한 장르 공식들이 있습니다. 장르 작가들은 공식들을 활용하고, 독자들은 공식들을 기대합니다. 종종 장르 작가들은 장르 공식들을 자조적으로 활용하거나 장르 공식들을 풍자합니다. 소설 <드라큐라>는 어떻게 흡혈귀가 존재할 수 있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 <나는 전설이다>는 과학적으로 흡혈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하드 SF 장르로서 소설 <블라인드 사이트>는 흡혈귀를 깊게 파고듭니다. 어떤 이야기가 장르 공식들을 만족할 때, 그 이야기는 장르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겠죠. 그래서 <너에게 17년>이 SF 장르 공식들을 만족할까요? 대답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타임 슬립 '판타지'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런 분류는 틀리지 않겠죠.]



장르 공식들을 따질 때, 사람들은 문제에 부딪힙니다. 장르 공식들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확실하게 선을 긋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체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들은 이미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생명체들을 만들기 전에 이미 생명체들은 존재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생명체들을 만들지 못합니다. 여자는 임신할 수 있으나, 임신은 생명 창조와 많이 다르죠. 생명체들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명체들을 관찰하고 생명체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습니다. 장르 소설은 다릅니다. 장르 소설은 인류 사회 밖에 있지 않습니다.


장르 소설은 인간들의 창조물입니다. 사람들은 장르 소설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장르 소설을 인위적으로 부정하거나 왜곡하거나 긍정하거나 과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물 다양성을 직접 만들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생물 다양성을 조절하거나 빌릴 수 있을 뿐이죠. 인간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생물 다양성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나타나기 전에 사이언스 픽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직접 사이언스 픽션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이언스 픽션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죠. SF 작가들과 독자들과 평론가들에게 이건 꽤나 골치가 아픈 문제입니다. SF 작가는 SF 소설을 쓰기 원합니다. 하지만 SF 소설이 뭡니까?



숱한 SF 작가들과 독자들과 평론가들은 서로 다르게 사이언스 픽션을 규정합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지 합의하지 못합니다. 어떤 SF 작가가 "이것이 사이언스 픽션이다."라고 말할 때, 다른 SF 평론가는 "사이언스 픽션은 저것이다."라고 말할 겁니다. 어떤 스페이스 오페라 작가가 "이것이 사이언스 픽션이다."라고 말할 때, 다른 하드 SF 작가는 "그건 아니야, 이 멍청아! 스페이스 오페라 따위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라고 반박하겠죠. 따라서 SF 작가는 SF 소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SF 소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SF 작가가 SF 소설을 쓸 수 있겠습니까?


"저는 <타우 제로>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이건 하드 SF 장르입니다." 이렇게 폴 앤더슨은 말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폴 앤더슨은 SF 장르가 무엇인지 정확히 규정하지 못합니다. SF 장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규정하지 못함에도, 폴 앤더슨은 자신이 <타우 제로>를 썼고 <타우 제로>가 SF 소설이라고 말했겠죠. 이건 거짓말입니다. 폴 앤더슨은 사기꾼입니다. 폴 앤더슨이 SF 장르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폴 앤더슨은 <타우 제로>가 SF 소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비단 폴 앤더슨만 아니라 숱한 작가들은 SF 소설들이 SF 소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어둠의 왼손>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아머: 개미 전쟁>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신 엔진>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SF 소설이 아닙니다. <아이 엠 넘버 포>는 SF 소설이 아닙니다. 코니 윌리스는 <블랙아웃>이 SF 소설이라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우리는 SF 소설들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SF 장르는 사라져야 합니다. <블랙아웃>이 SF 소설이라고 코니 윌리스가 주장할 때, 사람들은 코니 윌리스를 몰아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도 코니 윌리스를 몰아내지 않을 겁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어둠의 왼손>을 호평한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그걸 인정할 겁니다. 어슐라 르 귄이 "모든 소설은 은유이고 SF 소설 역시 은유이다."라고 말했을 때, 어떤 SF 작가들과 독자들과 평론가들은 고개들을 끄덕였을 겁니다. 아무도 무엇이 사이언스 픽션인지 정확히 정의하지 못하나,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19세기에 메리 셸리와 쥘 베른과 에드거 앨런 포와 허버트 웰즈와 에드워드 벨라미와 다른 여러 작가들이 어떤 새로운 소설들을 썼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설들은 수많은 후계지들을 낳았고, 수많은 후계자들이 퍼지는 동안, 이런 현상은 사이언스 픽션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사이언스 픽션은 흐름이고 누적입니다. 구조주의 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언어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언어가 완전한 형태로 나타났을까요? 이런 논리처럼, 하늘에서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견고한 덩어리가 뚝 떨어졌을까요? 그건 아니겠죠. 사이언스 픽션은 견고한 덩어리가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지속적으로 분열하고, 합치고, 변하고, 다시 분열하고, 다시 합치고, 다시 변합니다. 어슐라 르 귄이 SF 장르를 정의할 때, 어슐라 르 귄은 그런 복잡한 흐름과 누적 속에 끼어듭니다. 어슐라 르 귄은 그저 끼어들 수 있을 뿐입니다. 어슐라 르 귄은 흐름과 누적을 견고한 덩어리로 고정시키지 못합니다.



어떤 SF 평론가들은 자신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SF 평론가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견고한 덩어리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SF 평론가들은 커다란 외곽선을 그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외곽선은 계속 변할 겁니다. 그건 고정적이지 않겠죠. 사이언스 픽션을 완벽하게 정의하고 싶다면, SF 평론가는 자신의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때 SF 평론가는 뻔뻔스럽게 자신이 사이언스 픽션을 완벽하게 정의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죠.


여기 <SF 생태주의>에서 저는 사이언스 픽션이 진보와 진화를 이야기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게 사이언스 픽션을 완전히 정의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수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진보와 진화를 이야기합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미래를 내다보고, 가능성을 꿈꾸고, 진보와 진화에 기반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게 사이언스 픽션을 완벽하게 정의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다면, 저는 제 얼굴에 단단한 철판을 깔아야 할 겁니다. 미래, 가능성, 진보와 진화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하지만 특징은 특징입니다. 특징은 정의가 아닙니다. 특징들이 모인다고 해도, 그것들은 정의가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나, 두 가지는 다르죠.



[대체 역사는 근대적인 관념입니다. 이게 판타지라고 해도, 여기에는 어느 정도 진보적인 시각이 있죠.]



아무르 호랑이에게 무슨 특징들이 있을까요? 황갈색 털가죽과 검은 줄무늬들. 은밀하고 날렵한 행동. 발톱 주머니들. 추운 북방 서식지. 분명히 아무르 호랑이에게는 이런 특징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학자가 이런 특징들을 모은다고 해도, 그건 아무르 호랑이를 정의하지 못합니다. 특징들이 모인다고 해도, 그건 정의가 되지 못합니다. SF 소설들을 평가하기 위해 SF 평론가는 '편의상' 사이언스 픽션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완벽한' 정의가 아니겠죠. 사이언스 픽션은 고정적이지 않은 형상입니다.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 나오는 혼돈의 생명체(카오틱 비스트)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계속 흐물거리고 모습을 바꿀 겁니다. SF 평론가는 몇몇 뚜렷한 특징을 잡아챌 수 있으나, 혼돈의 생명체를 완벽하게 견고한 덩어리로 고정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을 평가할 때, SF 평론가는 꽤나 흐릿하고 얇은 경계선을 지나야 할지 모릅니다. 종종 SF 소설을 평가할 때, 그건 인류학이나 사회학이나 생태학을 평가하는 것과 비슷할 겁니다. 소설 <듄>을 평가할 때, 평론가가 제국주의나 먹이 그물망을 언급한다면, 그게 SF 문학 비평일까요, 아니면 사회학이나 생태학 비평일까요? 이걸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설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은 SF 울타리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세한 상상 과학이 없으나, 흔히 사람들은 타임 슬립이 SF 설정이라고 간주합니다. 시간 여행자는 고정적이지 않은 시간대들을 여행할 수 있습니다. 시간 여행자는 진보와 진화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소설 <타임 패트롤> 시리즈에서 시간 여행자가 고대 인류 문명이나 선사 시대로 돌아갔을 때, 분명히 시간 여행자는 진보와 진화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타임 패트롤> 시리즈는 대체 역사를 보여주고 미래가 바뀔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시간을 거스른다'는 관념은 근대적인 진보입니다. 고대 사람들 역시 대체 역사를 상상했으나, '시간을 거스른다'는 본격적인 관념은 근대적인 진보입니다.


신이 존재하는 목적론 세계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시간을 거스르고 대체 역사를 만들고 신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시간 여행은 SF 설정이 될 수 있습니다. 타임 슬립 역시 마찬가지죠.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 역시 세상이 고정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시각은 별로 깊지 않습니다. <너에게 17년>은 대체 역사보다 연애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어떤 SF 독자들은 SF 울타리에서 <너에게 17년>을 내쫓기 원하겠죠. 하지만 <너에게 17년>이 대체 역사보다 연애를 고민한다고 해도, 분명히 이 소설에게는 타임 슬립 설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SF 독자들은 쉽게 <너에게 17년>을 내쫓지 못할 겁니다. 이 소설은 SF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SF 독자들이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을 쫓아내고 싶다면, SF 독자들은 소설 <채리티가 남긴 말>을 함께 쫓아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채리티가 남긴 말>은 시간 여행 연애 이야기의 정석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 단편 소설을 감동적으로 읽었을 테고 이걸 쫓아내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채리티가 남긴 말>에 자세한 상상 과학이 없다고 해도, 그건 중요하지 않겠죠. 이건 모든 시간 여행 이야기가 SF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채리티가 남긴 말>이나 <시간 여행자의 아내>나 <너에게 17년>과 달리,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과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는 SF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지 모릅니다.


<채리티가 남긴 말>과 <시간 여행자의 아내>와 <너에게 17년>에는 형식적인 상상 과학이 있습니다. 비록 그게 형식적이라고 해도, 그건 상상 과학이죠. 하지만 <쏘아올린 불꽃>에서 심지어 형식적인 상상 과학조차 희미합니다. <너의 이름은>은 공개적으로 판타지 설정(무스비와 카타와레도키)을 이야기합니다. 체액이 서로 닿는다 운운하는 이야기는 상상 과학보다 판타지에 가깝겠죠. 그래서 <채리티가 남긴 말>과 <시간 여행자의 아내>와 <너에게 17년>과 <너의 이름은>과 <쏘아올린 불꽃>이 모두 시간 여행 연애 이야기라고 해도, <너의 이름은>과 <쏘아올린 불꽃>은 쉽게 SF 울타리에 들어오지 못할지 모릅니다.



한편으로 <채리티가 남긴 말>과 <시간 여행자의 아내>와 <너에게 17년>과 <너의 이름은>과 <쏘아올린 불꽃>은 시간 여행과 연애 이야기의 만남입니다. 이런 사례들처럼, 시간 여행 연애 이야기는 꽤나 인기를 끕니다. 이게 보편적인 현상일까요? 시간 여행과 연애 이야기의 만남이 보편적일까요? 이게 보편적이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런 만남이 어울린다고 생각할 겁니다. 왜 시간 여행과 연애 이야기가 잘 어울릴까요? 시간 여행이 거리를 강조하기 때문일 겁니다.


연인에게는 거리가 없어야 합니다. 연인은 서로 붙고 싶어합니다. 이건 연인들이 서로 포옹한다거나 쪽쪽거리며 서로 빨아준다거나 팔짱을 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애정 행위들 역시 중요하나, 정신적으로 연인은 서로 붙고 싶어합니다. 연인은 섹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섹스를 즐길 때, 두 사람은 하나가 된다고 느낄 겁니다. 여자와 남자는 정말 결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즈비언 커플과 게이 커플 역시 결합할 수 있습니다. 성별이 무엇이든, 끈적거리고 화끈한 섹스 속에서 쾌락적인 오르가즘을 느낄 때, 연인은 하나가 될 수 있죠.


중요한 것은 단순히 생물적인 성별이 아니라 오르가즘을 느끼고 하나가 되는 행위일 겁니다. 서로 오르가즘을 느끼고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두 여자는 얼마든지 연인이 될 수 있겠죠. 어머니와 아들, 오빠와 여동생, 이웃집 주부와 여고생, 작업장의 두 남자 직원 동료, 계모임의 두 할머니, 경로당에서 바둑에 심취한 두 할아버지 역시 연인 관계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번식 때문에 성별이 진화했다고 해도, 우리가 무조건 섹스를 번식과 연결할 이유는 없겠죠. 진화는 우리를 구속하는 법칙이 아닙니다.



[두 연인은 서로 수렴하고 격차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타임 슬립과 연애 이야기는 좋은 궁합이죠.]



다른 사회적인 관계들보다 연인 관계에서 오르가즘과 하나가 되는 행위는 상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가족, 이웃, 친척, 스승과 제자, 친구, 계모임, 동인, 직장 동료, 신앙 공동체, 노동 조합원, 좌파 정당 당원, 온라인 게임 길드 회원, 인터넷 까페 회원 같은 숱한 사회적인 관계들과 달리, 연인 관계에는 오르가즘과 하나됨이라는 특별한 요소가 있습니다. 오르가즘을 느낄 때, 연인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관계들에서는 이게 없죠. 아무리 만국의 노동자들이 서로 단결하고 통합한다고 해도, 그들은 오르가즘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오르가즘과 하나됨은 오직 연인 관계만의 특징일지 모르죠.


물론 연인이 무조건 둘이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을 겁니다. 연인은 셋이나 넷이나 다섯이나 여섯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집단 섹스하고 집단적으로 연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존 발리가 쓴 <잔상>처럼, 집단 섹스가 불가능하다는 법칙은 없을 겁니다. 어쩌면 미래 인류는 연인을 무조건 둘이라고 간주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통념적으로 연인은 둘입니다. <채리티가 남긴 말>과 <시간 여행자의 아내>와 <너에게 17년>과 <너의 이름은>과 <쏘아올린 불꽃>에서도 연인은 두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가까워지고 싶어합니다.



<채리티가 남긴 말>과 <너의 이름은>과 <쏘아올린 불꽃>은 섹스와 오르가즘을 직접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 연인이 섹스하고 오르가즘을 느낄 거라고 상정할 수 있겠죠. <채리티가 남긴 말>은, 음…. 이 소설은 섹스를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두 연인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섹스와 오르가즘을 상정할 수 있을 겁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와 <너에게 17년>은 대놓고 섹스를 이야기합니다. 몸이 가까워질 때, 당연히 마음 역시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아니, 마음들이 맞지 않는다면, 몸들 역시 결합하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연인은 동반자입니다. 연인은 함께 걷습니다. 연인이 함께 걸을 때, 여기에는 거리가 없어야 합니다. 연인은 하나가 되지 못하나, 연인은 끊임없이 서로를 향해 수렴합니다.


따라서 연인에게는 거리가 없어야 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계속 수렴하기 원한다면, 거리는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시간 여행 이야기는 엄청난 거리를 벌릴 수 있습니다. <채리티가 남긴 말>처럼, 심지어 서로 다른 두 시간대에서 두 연인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연인은 이런 격차를 극복해야 합니다. 연인이 엄청난 격차를 극복할 때, 연애 이야기는 훨씬 두근거리고 설렐 겁니다. <너의 이름은>에서 미츠하와 타키가 만날 때, 그건 절정으로 치솟을 수 있습니다. <쏘아올린 불꽃>에서 나즈나와 노리미치가 계속 시간대들을 건너뛸 때, 두근거리는 마음은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할 수 있겠죠. 비록 두 연인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격차를 극복하는 행위는 눈물이 겨울 겁니다.


물론 어떤 관객들은 <너의 이름은> 같은 애니메이션들이 성 희롱을 낭만적인 청춘으로 미화한다고 강렬하게 질타할지 모르죠. 그런 강렬한 질타는 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감히 성 희롱 따위를 미화하는 <너의 이름은>이 감동적인 <채리티가 남긴 말>에 비교될 수 있는지 물을 겁니다. 성 희롱 따위는 낭만적인 청춘이 아니라 범죄입니다. 분명히 범죄는 범죄입니다. 연애 이야기가 성 희롱을 미화한다면,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 속에서 관객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재생산하겠죠. 타임 슬립을 살펴보기 위해 이런 애니메이션을 관람한다고 해도, 관객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타임 슬립이 두 연인을 특별하게 뒷받침한다는 사실입니다.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은 어떨까요? 글쎄요, 이 소설은 타임 슬립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타임 슬립이 형식적인 상상 과학이라고 해도, 형식적인 상상 과학에는 뚜렷한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너에게 17년>에서 타임 슬립 규칙은 너무 어중간합니다. 작가는 타임 슬립을 확실하게 규정하지 않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처럼, 심지어 중세 유럽 판타지조차 마법을 논리적으로 정립하기 원합니다. <너에게 17년>에는 이런 논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타임 슬립은 어중간하고, 베넷 쿠퍼와 애나 그린의 연애 역시 어중간해집니다. 심지어 어떤 것은 어설픈 떡밥에 가깝죠.


<채리티가 남긴 말>에서 타임 슬립은 형식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형식적인 상상 과학에 논리가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적어도 작가는 가상의 개연성을 만들 수 있습니다.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에서 이런 논리는 별로 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극복하는 연인은 별로 두근거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간 여행 연애 이야기가 연애에 치중한다고 해도, 시간 여행은 연애를 뒷받침합니다. 시간 여행은 디딤돌입니다. 디딤돌이 약하다면, 건물 역시 약해질 겁니다. 타마라 아일랜드 스톤은 디딤돌을 약하게 설정했습니다. 분명히 이 소설에는 발랄하고 화사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디딤돌이 약하기 때문에 그것들 역시 쉽게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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