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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 예술, 과학과 세계관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기적>과 예술, 과학과 세계관

OneTiger 2021. 4. 7. 20:00



어떤 사람은 소설을 읽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화를 봅니다. 어떤 사람은 연극을 관람합니다. 어떤 사람은 노래를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드 게임을 플레이합니다. 소설, 만화, 연극, 노래, 보드 게임은 취미입니다. 취미는 비단 이것들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를 포함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소설, 만화, 연극, 노래, 보드 게임을 비롯해 여러 취미들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에게 취미들이 있나요? 왜 사람들이 소설들을 읽고, 만화들을 보고, 연극들을 관람하고, 노래들을 듣고, 보드 게임들을 플레이하나요? 가장 쉬운 대답은 '재미'입니다. 여러 취미들은 재미로 이어집니다.

 

취미가 무엇이든, 소설과 만화, 연극, 노래, 보드 게임을 비롯해 여러 취미들은 재미로 이어집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재미가 무엇인가요? 우리는 재미를 중시하나, 재미에게 보편적인 기준이 있나요? 글쎄요, 대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분명히 취미는 재미로 이어지나, 구체적인 재미들은 절대 똑같지 않습니다. 재미에게 보편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보편적인 재미를 규정하지 못합니다. 재미는 상대적인 것, 주관적인 것, 개인적인 것입니다. 재미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어떤 소설이 대단하다고 해도, 이건 보편성이 되지 않습니다.



"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 우리는 취미를 논쟁하지 못한다." 이 문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재미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어떤 만화와 연극, 노래, 보드 게임이 훌륭하고 감동적이고 흥미롭고 긴박하다고 해도, 이건 법칙이 되지 않습니다. 재미가 법칙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보편적인 재미를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종 이건 싸움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이 소설이 훌륭하거나 저 소설이 훌륭하다고 싸웁니다. 아니면 사람들은 소설보다 노래가 훌륭하거나 노래보다 보드 게임이 훌륭하다고 싸웁니다. 취미 논란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재미(취미)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들이 열심히 싸운다고 해도, 이 싸움은 정답을 내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왜 재미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가요? 왜 재미가 보편적이지 않은가요? 재미가 관계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재미는 태생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고 느낄 때, 재미는 나타납니다. 이 상황에서 태생적으로 대상은 재미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만약 인간과 상관없이, 대상이 재미를 포함한다면, 이 상황에서 재미는 태생적인 것이 될 겁니다. 태생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미는 후천적으로 나타납니다.



1) 수마트라 호랑이에게는 길다랗고 검은 줄무늬들이 있다.
2) 수마트라 호랑이는 아주 매력적인 열대 밀림 야생 동물이다.



1번 문구와 2번 문구는 다릅니다. 1번 문구는 태생적인 특성을 가리킵니다. 수마트라 호랑이에게는 검은 줄무늬들이 있습니다. 이건 태생적인 특성입니다. 태생적으로 수마트라 호랑이에게는 검은 줄무늬들이 있습니다. 검은 줄무늬들이 태생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비록 인간이 관찰하지 않는다고 해도, 검은 줄무늬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비록 인간이 수마트라 호랑이를 관찰하지 않는다고 해도, 검은 줄무늬들 덕분에, 울창한 열대 밀림에서 수마트라 호랑이는 잠복하고 사냥합니다. 인간과 상관없이, 수마트라 호랑이(대상)에게는 검은 줄무늬들이 있습니다.

 

1번 문구와 달리, 2번 문구는 태생적인 특성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인간이 수마트라 호랑이를 바라보고 감정을 느낄 때, 매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수마트라 호랑이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수마트라 호랑이가 매력적이라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인간이 느끼지 않기 때문에, 수마트라 호랑이는 매력적인 열대 야생 동물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수마트라 호랑이는 매력적인 야생 동물이 아닙니다. 태생적으로 수마트라 호랑이는 매력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호랑이를 바라보고, 인간-호랑이 관계가 성립할 때, 이 관계에서 매력은 비롯합니다.



태생적인 특성보다 후천적인 관계에서 재미는 비롯합니다. 검은 줄무늬들이 태생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이건 법칙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수마트라 호랑이를 바라보고, 후천적인 관계가 성립할 때, 이 관계에서 매력이 비롯하기 때문에, 이건 법칙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자를 과학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예술이라고 부릅니다. 1번 문구는 과학입니다. 수마트라 호랑이에게는 줄무늬들이 있고, 이게 보편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여기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2번 문구는 예술에 가깝습니다. 어떤 사람은 호랑이가 매력적이라고 느끼나, 이건 주관적입니다.

 

"우와, 수마트라 호랑이는 아주 매력적인 열대 야생 동물이야.", "뭐야? 이게 무슨 헛소리야? 나는 수마트라 호랑이가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해." 이 대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관계에서 매력이 비롯하고, 매력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매력은 보편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다. 매력(이라는 단어) 그 자체는 보편적일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매력들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입니다. 소설과 만화와 연극과 노래, 보드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이건 태생적인 사실입니다. 비록 그 어떤 독자가 읽지 않는다고 해도,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작가는 글자들을 적습니다.



독자와 상관없이, 소설이 글자들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독자가 읽기 전에,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작가가 글자들을 적기 때문에, 소설은 글자 매체이고, 이건 태생적인 사실입니다. 이건 보편적입니다. 보편적인 것은 과학입니다. 모든 사람은 소설이 글자 매체라고 동의할 수 있습니다. 반면, 태생적으로 소설은 재미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소설은 재미있지 않습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고 긍정적으로 느낄 때, 독자-소설 관계에서 재미는 후천적으로 비롯합니다. 소설이 재미를 포함하지 않고, 관계에서 재미가 비롯하기 때문에, 이건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관계에서 재미가 비롯하기 때문에, 관계가 바뀐 이후, 재미는 사라지거나 바뀔지 모릅니다. 관계가 재미를 판단하기 때문에, 재미는 과학이 되지 않습니다. 재미는 예술입니다. 소설은 과학보다 예술입니다.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래는 예술입니다. 인간이 노래를 들을 때, 인간-노래 관계에서 감동은 비롯합니다. 관계가 감동을 판단하기 때문에, 관계가 바뀐 이후, 감동은 사라지거나 바뀔지 모릅니다. "우와, 이 노래는 감동적이야."는 "에이, 이 노래는 시시해."로 바뀔지 모릅니다. 이건 모든 상황에서 재미에게 오직 주관적인 측면만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투비 육성재와 여자친구 유주는 노래 <기적>을 불렀습니다. 이 노래(링크)가 감동적인가요? 육성재와 유주가 감동적으로 노래하나요? 만약 이웃집 영희가 노래를 듣고 감동한다면, 이웃집 영희는 이 감동을 보편적으로 승화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이야, 육성재와 유주 목소리는 아주 감미로워. 아이돌 보컬리스트들 중에서 육성재와 유주는 정~말 뛰어나. 다들 <기적>을 들어봐." 이렇게 이웃집 영희는 옆동네 철수와 아랫집 수진에게 노래 <기적>을 '권유'합니다. 왜 이웃집 영희가 육성재와 유주 목소리를 '권유'하나요? 왜 영희가 이 감동을 혼자 간직하지 않나요?

 

인간은 취미를 보편적으로 확장하기 원합니다. 인간이 취미를 확장하기 원하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는 옆동네 철수와 아랫집 수진이 육성재와 유주 목소리를 듣기 원합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는 <기적>을 권유합니다. 이 상황에서 예술이 보편성을 향해 승화하기 때문에, 예술은 보편성에게 수렴합니다. 과학이 보편적인 것처럼, 예술은 보편성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수렴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이웃집 영희가 육성재를 보편적으로 승화하기 원한다고 해도, 영희-육성재 관계가 성립한 이후, 예술은 보편성에 가까워집니다. 이건 태생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영희-유주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영희는 철수와 수진이 <기적>을 듣기 원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인간이 예술을 보편적으로 확장하기 원한다고 해도, 예술이 보편성에게 수렴하기 전에, 이미 인간-예술 관계가 성립해야 하기 때문에, 예술은 과학이 되지 않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미학이 특별한 보편성이라고 주장했으나, 특별한 보편성과 일반적인 보편성은 다릅니다. 정언 명령과 달리, 미학은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성이 아닙니다. 예술이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성이 아닌 것처럼, 소설과 노래처럼, 만화와 연극과 보드 게임은 주관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소규모 던전 탐험 게임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어떤 사람은 대규모 전략 게임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 자체로서 던전 탐험 게임은 재미있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던전 탐험 관계에서 재미는 비롯합니다. 관계에서 재미가 비롯하기 때문에, 관계가 바뀐 이후, 재미는 사라지거나 바뀔지 모릅니다. 재미는 상대적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시즌스 애프터 폴>을 좋아합니다. 이 비디오 게임이 생태계 변화, 자연 환경 변화를 묘사하기 때문에, 저는 이 게임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판타지 자연 환경 변화가 너무 시시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연 환경 변화보다 대규모 함대 전투를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이 사람들에게 <시즌스 애프터 폴>보다 <스페이스 워즈: 인터스텔라 엠파이어즈>는 훨씬 흥미로울 겁니다. 재미가 주관적이기 때문에, 저는 <인터스텔라 엠파이어즈>보다 <시즌스 애프터 폴>이 재미있다고 강요하지 못합니다. <인터스텔라 엠파이어즈>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시대 격차를 포함합니다. 시대 격차는 진보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텔레비전이 바보 상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비록 텔레비전이 바보 상자라고 해도, 조선 시대 황진이는 바보 상자를 알지 못했습니다.

조선 시대 황진이는 뛰어난 문학 역량을 자랑했으나, 뛰어난 황진이는 바보 상자를 알지 못했습니다. 뛰어난 황진이가 바보 상자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바보 상자보다 황진이가 훨씬 바보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시대 격차에서 기술 진보가 비롯하기 때문에, 시대 한계 때문에, 황진이는 그저 전기 장치를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황진이를 비웃기보다 시대 한계를 고려해야 합니다. 황진이가 텔레비전을 알지 못했던 것처럼, 현재 사회보다 미래 사회에서 기술 진보는 훨씬 많은 것들을 이룩할지 모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첨단 미래 사회를 보여주고 엄청난 기술 진보를 강조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기술 진보를 포함합니다. 이건 과학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엄청난 기술 진보가 태생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이건 과학입니다. 제가 시대 격차를 매력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저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흥미롭다고 느낍니다. 이건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들이 스페이스 오페라(기술 진보)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들은 스페이스 오페라가 흥미롭다고 느끼지 않을지 모릅니다. 만약 제가 이것을 강요한다면, 이건 억압이 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미, 취미, 감동, 예술을 강요합니다. "이게 노래야? 어휴, 누가 고작 이것 따위를 듣지?"

어떤 사람들은 예술이 보편적이라고 착각하고 예술을 강요합니다. 이건 억압입니다. 일상에서 이 억압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술이 과학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무리 예술이 과학이라고 해도, 과학으로서 예술은 주관적인 과학, 상대적인 과학입니다. 과학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과학은 문학적인 비유, 언어 유희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상대적인 과학이 진짜 과학이라고 착각하고 상대적인 과학을 강요합니다. 이건 억압입니다. 억압을 막기 위해 우리는 과학과 예술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적인 해석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숫자를 제시하고 예술이 과학이라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고 많은 것들은 상품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이 핵심이기 때문에, 예술 역시 상품이 됩니다. 상품에서 매출은 비롯합니다. 예술이 상품이기 때문에, 예술에서 매출은 비롯합니다. 매출은 숫자입니다. 우리는 숫자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3보다 5는 크고, 5보다 7은 큽니다. 아무리 예술이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라고 해도, 예술은 상품이 되고, 상품은 숫자가 됩니다. 만약 어떤 소설에서 매출 3,000원이 비롯하고, 어떤 노래에서 매출 7,000원이 비롯한다면, 이게 과학인가요?

 

소설에서 매출 3,000원이 비롯하고, 노래에서 매출 7,000원이 비롯하기 때문에, 소설보다 노래가 훌륭한가요? 이게 과학적인 판단인가요? 만약 <시즌스 애프터 폴>보다 <인터스텔라 엠파이어즈>가 많은 매출을 기록한다면, 판타지 자연 생태계보다 우주 함대 전투가 뛰어난 취미가 되나요? 만약 비투비 육성재보다 영화 <고지라 대 콩>이 훨씬 많은 매출을 올린다면, 이게 육성재 노래보다 메카고지라 양자 절규(proton scream)가 훨씬 뛰어난 예술이라는 뜻인가요? 어떤 사람들은 매출이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고 많은 것들은 매출, 숫자 계산이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고 많은 것들이 숫자 계산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숫자 계산이 예술을 판가름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매출은 다른 여러 원인들에게 기반합니다. 아무리 육성재 노래보다 메카고지라가 많은 매출을 올린다고 해도, 이 매출이 시장 경제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영화보다 시장 경제가 우선하기 때문에, 높은 매출과 좋은 예술은 절대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예술이 높은 매출을 올린다고 해도, 우리는 예술보다 자본주의 사회를 우선적으로 분석해야 합니다. 매출은 예술을 과학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화는 너무 너무 지배적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돈벌이입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은 오직 돈, 돈, 돈, 돈, 돈, 돈만 떠벌입니다. 돈벌이는 숫자 계산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매출, 숫자 계산이 예술을 과학으로 바꾼다고 착각합니다. 특히, 대중 상업 예술이 상품 가치를 강조할 때, 이 부정적인 현상은 훨씬 심각해집니다. 아이돌 문화를 보세요. 많은 아이돌 팬들은 아이돌 가수들이 예술가보다 그저 비싼 상품에 불과하다고 간주합니다. 예술 관점보다 비싼 상품 관점에서 많은 아이돌 팬들은 아이돌 가수들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아이돌 팬들은 매출을 계산하고, 순위를 계산하고, 숫자를 떠듭니다. 아이돌 팬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숫자 계산이 미학, 감동, 예술을 과학으로 바꾼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과학과 예술은 다릅니다. 과학은 보편적이고, 예술은 상대적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상대성보다 보편성을 추구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예술보다 과학에게 기반해야 합니다. 보편성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예술을 과학으로 바꾸기보다 예술과 과학을 규정하고 과학에게 기반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집니다. 언제나 모든 상황에서 과학이 보편적인가요?

 

계몽주의 사회에서 남자 과학자들은 여자 과학자들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여자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여자와 과학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캐롤린 머천트는 계몽주의 남자들을 비판했습니다. 아니, 비단 계몽주의 사회만 아니라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여러 회사들은 레이첼 카슨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레이첼 카슨이 히스테리 아줌마라고 비웃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자가 섬세하고 감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섬세하고 감정적인 여자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과학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자와 과학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자보다 남자가 과학자라고 착각합니다. 오랜 동안, 인류 사회가 가부장 사회였기 때문에, 가부장 사회에서 가부장 편견은 비롯합니다. 심지어 이 편견에서 과학자들조차 자유롭지 않습니다. 가부장 편견에서 과학자들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여자 과학자를 비웃습니다. 캐롤린 머천트가 계몽주의 과학자들을 비판하는 것처럼, 과학 그 자체는 필연적인 보편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가부장 편견이 남자 과학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과학보다 세계관은 우선합니다. 과학보다 세계관이 우선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관을 연구해야 합니다.

 

예술은 상대적이고, 과학은 보편적입니다. 하지만 세계관이 과학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과학 그 자체는 필연적인 보편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과학과 보편성을 연결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세계관을 연구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세계관을 연구한다면, 우리가 어떤 세계관을 선택할 수 있나요? 세계관은 하나가 아닙니다. 많은 세계관들, 사상들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고 부딪힙니다. 우리가 세계관을 선택할 때, 무엇이 기준이 될 수 있나요? 인간은 먹고 삽니다. 이건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모든 인간은 먹습니다. 이건 과학입니다. 분명히 이건 과학입니다.

 

 

 

 

모든 인간이 먹고 살기 때문에, 이게 보편적이기 때문에, 이건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주관적이고 상대적으로 해석하기 원한다고 해도, 먹고 살기는 보편적입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먹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립니다. 먹고 살기가 보편적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지 못하기 때문에, 이건 세계관을 선택하기 위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세계관이 가난한 사람들을 열심히 떠든다면, 우리는 이 세계관이 좋은 세계관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특히, 좋은 세계관은 가난한 사람들 역시 자연 환경에게 기반한다고 주장합니다.

 

<시즌스 애프터 폴>은 자연 환경에서 열매와 버섯이 비롯한다고 묘사합니다. 자연 환경에서 열매와 버섯이 비롯하는 것처럼, 자연은 먹거리를 선사합니다. 자연 환경이 먹거리를 선사하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에게 기반할 때, 인간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자연 환경에게 기반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이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이돌 가수가 예술가보다 비싼 상품인 것처럼, 자연은 상품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상품(자연)을 구입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립니다. 좋은 세계관은 이것을 지적합니다.

 

 

※ 게임 <시즌스 애프터 폴> 스크린샷 출처:

www.youtube.com/watch?v=LqjntWk4Yxo

 

※ 게임 <스페이스 워즈: 인터스텔라 엠파이어즈> 스크린샷 출처:

store.steampowered.com/app/574070/Space_Wars_Interstellar_Empi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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