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그 남자 그 여자>의 붕어빵과 비유적인 외계인들 본문
그 남자: 바로 이 포장마차에서요. 여기서 우리가 처음 만났죠. 처음 만남은 아주 짧았어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그 바로 옆에 있는 붕어빵 리어카에서 (그녀를) 또 마주쳤던 거죠. 이건 운명이다 싶었죠. 뭐라고 말을 걸까, 심장은 혼자 춤추는데 말은 안 나오고, 근데 그 붕어빵 아저씨의 손길이 어찌나 빠르던지 이러다간 (그녀와) 말 한마디 못해 보고 그냥 또 헤어지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시간을 좀 끌어보려고 붕어빵을 열 마리나 더 주문했죠.
그 여자: 처음 반한 건 그 때가 맞아요.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는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거랑 좀 달라요. 포장마차를 먼저 나선 그 사람을 내가 살금살금 미행했다는 거… 그 사람은 아직도 모르고 있거든요. 그리고 내가 어릴 때 붕어빵을 먹고 체한 뒤로는 절대 붕어빵을 먹지 않던 사람이라는 것도요. 우린 그 날 붕어빵 열 마리씩을 가슴에 품고 여기부터 저~ 골목길 끝까지를 함께 걸었죠. 난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붕어빵의 따뜻한 온기가 먼저 생각나곤 해요.
위 이야기는 이미나가 쓴 <그 남자 그 여자>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그 남자 그 여자>는 남자와 여자의 관점에서 짧은 연애 이야기들을 보여줍니다. 모두 101가지 이야기들에서 남자와 여자는 속마음을 드러내고, 독자들은 어떻게 연애가 이루어지는지 읽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두근거리는 설렘을 느끼기 시작하고, 누군가는 눈물들을 뿌리며 헤어지고, 누군가는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연인을 알아가는 중이죠. 위 붕어빵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붕어빵 이야기에서 문맥상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연인 관계를 유지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그 남자와 그 여자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두 사람이 만났는지 속마음을 드러내죠.
포장마차에서 그 남자와 그 여자는 만났습니다. 잠시 후, 그 옆 붕어빵 리어카에서 그 남자와 그 여자는 다시 만났죠. 남자는 이게 운명이라고 직감했고 여자에게 말을 걸기 위해 붕어빵 열 마리를 더 주문합니다. 여자는 남자가 붕어빵을 좋아하는지 물었고, 남자와 여자는 대화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연인이 되었죠. 하지만 여자가 붕어빵 리어카로 일부러 남자를 쫓아가지 않았다면, 남자는 여자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지 못했을 겁니다. 여자는 남자를 잡기 원했고 이건 작은 반전이죠.
이 붕어빵 이야기는 화사하고 따뜻한 봄바람을 일으킵니다. 시간적인 배경은 겨울이나, 따뜻한 온기라는 동의 반복처럼, 이런 연애 이야기는 따뜻한 봄바람이죠. 하지만 따뜻한 봄바람에 취했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붕어빵 열 마리'라고 말했죠. 어라, 이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일반적으로 '마리'는 동물을 세는 의존적 명사입니다. 동물들을 어림할 때, 사람들은 '마리'라고 부르죠. 호랑이 한 마리, 혹등고래 두 마리, 장수 거북 세 마리처럼. 나무들을 어림할 때, 사람들은 '그루'라고 부르고, 풀들을 어림할 때, 사람들은 '포기'라고 말합니다. (포기는 풀들을 어림할 때 쓰는 명사이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포기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붕어빵들을 어림했음에도, 남자와 여자는 '마리'라고 불렀어요. 붕어빵이 동물인가요? 붕어빵이 붕어, 어류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붕어빵에게 마리는 어울리지 않는 의존적 명사죠. 하지만 왜 남자와 여자가 '붕어빵 열 마리'라고 불렀을까요? 그들이 붕어빵을 동물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이 유전 공학을 이용해 붕어빵을 정말 붕어로 소생시키기 원했을까요?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을 만든 것처럼, 남자와 여자가 붕어빵을 이용해 인조 붕어를 만들기 원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이건 그저 문학적인 실수에 불과해요.
어쩌면 남자와 여자는 문학적인 표현을 사용하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그 아가씨의 녹색 눈동자는 에메랄드이다." 이 문구는 아가씨의 눈동자가 진짜 보석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보석처럼 아가씨의 녹색 눈동자가 예쁘다는 뜻이죠. 하지만 붕어빵 이야기에서 남자와 여자에게는 붕어빵을 문학적인 표현에 투영하고 싶은 의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붕어빵 열 마리라고 말했을 겁니다. 붕어빵은 붕어가 아닙니다. 붕어빵은 그저 과자빵에 불과하죠. 붕어빵에 붕어가 있냐는 농담처럼, 심지어 붕어빵에는 붕어 살코기조차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붕어빵은 붕어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붕어빵에게는 지느러미들이 있고, 비늘들이 있고, 두 아가미가 있습니다.
사실 붕어빵에게는 이런 것들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붕어빵에게 효율적인 지느러미가 있다고 해도, 붕어빵이 붕어가 아니라 청새치와 비슷하다고 해도, 붕어빵에게 두 아가미가 있다고 해도, 붕어빵은 헤엄치거나 잠수하지 않습니다. 붕어 모양은 그저 겉모습에 불과하죠. 사실 붕어빵이 붕어 모양이 아니라고 해도, 그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붕어빵 이외에 국화빵이나 풀빵이나 기타 모나카 과자들이 있죠. 만약 붕어빵이 일본 먹거리가 아니었다면, 붕어빵은 구태여 붕어(도미) 모양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붕어빵은 붕어와 닮았습니다. 겉모습은 붕어와 닮았죠.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붕어빵을 붕어라고 생각했고 '붕어빵 열 마리'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과 시각적으로 닮았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붕어빵을 동물로 간주했어요. 이건 시각적인 실수, 문학적인 실수입니다. 어떤 남자가 아가씨의 녹색 눈동자를 에메랄드라고 부른다면, 그 남자는 문학적인 표현을 의식했을 겁니다. 하지만 붕어빵 이야기에서 두 연인은 문학적인 표현을 의식하지 못했을 테고, 이건 오류일 겁니다. 하지만 이런 오류가 있음에도, 꾸준히 우리는 문학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나는 너의 영혼을 사랑해." 두 뺨을 붉히며 이렇게 여자가 남자에게 고백했을 때, 여자는 영혼이 정말 존재한다고 간주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수줍고 아름다운 고백에서 영혼은 진짜 영혼이 아니라 남자의 성향이나 성격이나 인간성이나 인생관을 가리키겠죠.
그렇다고 해도 여자는 영혼이라고 말했습니다. 영혼이라는 표현이 성격이나 인생관보다 훨씬 품격이 높은 단어이기 때문에 이런 고백에 영혼은 잘 어울리겠죠. 영혼은 신이 빚은 신비로운 뭔가입니다. 여자는 자신의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격 있게 전달하는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띄워줄 수 있어요. 이렇게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문학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런 문학적인 표현은 오류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특히, 인간이 시각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시각적인 비유는 위험할지 모릅니다. 붕어빵 이야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붕어빵 열 마리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이런 오류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오류를 다른 곳에 집어넣을지 모르죠. 이런 문학적인 비유를 아주 방대하게 활용하는 사례는 스페이스 오페라일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온갖 외계인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것들은 진짜 외계인들이 아니라 문학적인 표현, 장르 문학적인 표현이죠. 그래서 하드 SF 작가들이나 과학자들은 이런 문학적인 표현을 비판하곤 합니다. 이런 문학적인 표현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외계인은 극단적인 존재입니다. 외계인은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외계인은 이방인을 가장 잘 강조할 수 있는 소재입니다.
작가들이 이방인을 비유하고 싶을 때, 외계인은 탁월한 선택이 됩니다. 외계인 이야기를 읽는 동안, 독자들은 이방인을 깊게 고민할 수 있습니다. 외계인이 극단적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방인이 누구인지 훨씬 깊게 고민할 수 있겠죠. 저 머나먼 아무개 성운의 어떤 외계인은 아주 극단적이고 이질적이죠. 작가는 그런 성향을 이주 노동자에게 투영할 수 있어요. 문제는 이게 비유이기 때문에 이런 비유가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붕어빵 이야기에서 남자와 여자가 붕어빵을 동물로 간주한 것처럼, 비유와 문학적인 표현은 오류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이주 노동자를 변호하기 위해 작가가 외계인을 썼다고 해도, 외계인이 못생기거나 무섭게 생겼다면, 독자는 외계인을 혐오할지 모릅니다. 독자는 혐오스러운 외계인을 이주 노동자에게 투영하고 이주 노동자를 차별할지 모르죠. 이렇게 문학적인 표현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물론 많은 작가들은 노련한 필력들을 발휘하고 이런 오해들을 막기 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문학적인 표현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죠. 만약 사람들이 이런 문학적인 표현을 훨씬 확장한다면,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시각적인 실수와 문학적인 실수가 중요한 사회 문제에 이어진다면? 사람들이 비유를 현실이라고 간주할 때, 그건 아주 무서운 차별이 될지 모릅니다. "우리의 지구는 아파요!" 이건 흔한 환경 운동 문구입니다.
하지만 이건 아주 문학적인 표현이죠. 누가 지구가 아픈지 물어봤나요? 지구가 아플 수 있나요? 지구가 유기체 동물인가요? 이건 그저 비유에 불과합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핵 발전소들을 짓거나 온실 가스를 뿜습니다. 환경 오염의 정확한 실태는 이런 것들이죠. 지구가 아프다는 표현을 받아들이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어떤 표현을 이해하기 쉽다고 해도, 그건 그 표현이 무조건 옳다는 뜻이 아니죠. 심지어 이런 표현 때문에 사람들은 산업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지 모릅니다. 가난한 원주민들이 굶주릴 때, 환경 운동가들은 엉뚱한 꼬투리를 붙잡을지 모르죠.
'붕어빵 열 마리'는 아주 간단하고 쉬운 사례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붕어빵 열 마리를 말했다고 해도, 독자들은 그게 가벼운 실수라고 피식 웃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게시글이 붕어빵 열 마리에 너무 집착하거나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간단한 사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려운 단계로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독자들이 이런 가벼운 사례를 인식한다면, 훨씬 어렵고 복잡한 비유를 만났을 때, 독자들은 어떻게 이런 비유를 해석할 수 있는지 고민할 수 있겠죠.
SF 소설을 포함한 문학에는 제대로 된 해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학이 열린 대상이기 때문에 정답은 존재하지 않고 독자들은 수많은 해석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간단하고 쉬운 사례를 인식한다면, 독자들은 이걸 응용하고 문학적인 비유를 훨씬 풍부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겁니다. 가령, 독자들이 엘리너 아나슨이 쓴 기이한 외계인 성별을 파악할 때, 이런 관점은 유용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문학적인 표현을 대할 때, 우리에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고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외계인 이야기를 좀 더 제대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죠.
어떤 독자들은 이런 문학 비평 방법이 SF 소설들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사실 SF 장르를 논의할 때, 많은 사람들은 우주 구축함의 스펙이나 매스 드라이버의 위력을 떠듭니다. 적어도 국내 SF 커뮤니티들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죠. 하지만 SF 소설들 역시 소설입니다. 소설은 텍스트 매체이고 하나의 거대한 비유,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SF 소설들 역시 무수한 비유들을 사용하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비유를 이룹니다. 따라서 문학적인 표현을 파악하는 비평 방법은 SF 소설들과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SF 독자들 역시 왜 소설이 소설이고 왜 소설이 텍스트 매체인지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