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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광기의 산맥>과 탐사, <다키스트 던전>과 전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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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산맥>과 탐사, <다키스트 던전>과 전투

OneTiger 2017. 12. 10. 20:04

[이 게임은 러브크래프트 소설 분위기를 잘 살렸으나, 탐사와 고고학보다 전투에 치중합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유명한 장르 소설가입니다. 아니, 이 양반을 그저 유명하다고 부른다면, 그건 너무 빈약한 표현일 겁니다. 아마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없었다면, 현대 장르 창작물들은 절반쯤 살을 빼야 했을 겁니다. 그만큼 러브크래프트는 수많은 장르 소설들, 영화들, 게임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러브크래프트 역시 로드 던세이니나 아서 매켄 등 다른 작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나, 우주적 공포라는 장르를 원숙하게 다듬었고, 다양한 이야기 형식들을 고안했죠.

 

듀나님이 말한 것처럼, 사실 완성도를 따진다면, 아서 매켄이 러브크래프트보다 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가 우주적 공포라는 장르를 창시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양반은 그걸 본격적으로 정립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로드 던세이니나 아서 매캔보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를 더 인정하겠죠. 덕분에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은 다른 2차 창작물들을 낳았습니다. 여러 보드 게임들이나 비디오 게임들 역시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을 변주했죠. 그런 게임들 속에서 게임 등장인물들은 각종 외계 괴물들을 조사하고 물리칩니다. 외계 괴물들이 기이한 차원 관문을 넘고 현실에 침범할 때, 게임 플레이어들은 괴물들을 조사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진정한 공포가 이 세상을 무너뜨리기 전에.

 

 

가끔 던전 탐험 게임들이 러브크래프트를 이용할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던전 탐험 게임은 검마 판타지를 이용하고, 모험가 일행은 던전 속에서 좀비들이나 해골 병사들이나 사악한 마법사들과 싸웁니다. 모험가 일행은 위험한 함정들을 피하고, 숨겨진 복도나 비밀 방을 발견하고, 보물 상자에서 진귀한 보물들을 얻죠. 만약 검마 판타지 설정을 우주적 공포로 바꾼다면, 모험가 일행은 크툴루 신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모험가 일행은 드워프들이 만든 던전이 아니라 고대 외계인들이 만든 유적 속을 탐험합니다. 모험가 일행은 좀비들이나 해골 병사들이 아니라 외계인들이 만든 생체 기계들과 싸웁니다. 고대 외계인들의 유적 속에는 온갖 함정들이나 비밀 통로들이 숨어있을지 모릅니다. 모험가 일행은 반짝거리는 금은보화를 얻지 못하겠으나, 대신 고대 외계인들이 남긴 신기한 기술이나 기록을 찾을지 모르죠. 이런 던전 탐험 게임을 구상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이미 수많은 테이블 게임 플레이어들은 그런 게임을 구상하고 실제 플레이했을 겁니다. 사실 <광기의 산맥> 같은 소설은 그 자체가 훌륭한 던전 탐험 이야기입니다.

 

 

<다키스트 던전> 같은 게임은 <광기의 산맥>과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조합한 결과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처럼 <다키스트 던전>은 모험가 일행이 복잡한 던전 속을 헤매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마을에서 모험가들을 모으고, 위험하고 혼란스러운 던전 속을 탐험하고, 괴물들을 물리치고, 보물들을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달리 <다키스트 던전>은 검마 판타지가 아닙니다. 이 게임은 러브크래프트가 창작한 괴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이 게임은 비단 괴물들만 활용할 뿐만 아니라 모험가 일행이 괴물들과 만나고 이성을 잃고 미쳐가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설정부터 줄거리, 분위기, 사건 전개 등등 <다키스트 던전>은 러브크래프트를 끝없이 찬사하는 게임입니다. 아마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여러 소설들을 쓰지 않았다면, <다키스트 던전>은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 소설들과 <다키스트 던전>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다키스트 던전>에서 가장 중점적인 부분은 전투라는 사실입니다. 반면, 러브크래프트는 전투나 전술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광기의 산맥>이나 <던위치 호러>, <크툴루의 부름> 같은 소설에서 소설 주인공들은 병사들이 아닙니다. 탐험가들이나 학자들이죠. 러브크래프트는 탐험가나 학자나 연구원이나 그런 인물들을 선호했습니다. 가끔 모험가가 등장하나, 러브크래프트는 전문적인 모험가를 별로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 양반이 싸움이나 전투보다 탐사와 연구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러브크래프트는 모험가 일행이 끔찍한 외계 괴물과 싸우는 장면에 먹물을 낭비하지 않았어요. 그런 싸움이나 전투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러브크래프트는 장대한 외계 유적을 구상했고, 그런 구상을 소설 속에 풀어넣기 원했습니다.

 

마치 고고학자가 고대 유적을 연구하거나 고생물학자가 공룡 화석들을 조사하는 것처럼 <광기의 산맥>이나 <던위치 호러>, <크툴루의 부름> 같은 소설에서 주연 인물들은 외계인들을 연구하고 조사합니다. 고고학자나 고생물학자는 전투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고, 러브크래프트 소설들 속의 주연 인물들 역시 다르지 않아요. 뭐, 장르 창작물 속에는 인디아나 존스처럼 사방팔방에서 싸우고 다니는 고고학자가 드물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고고학자의 역할은 탐사이고 전투가 아닙니다. 챌린저 교수처럼 공룡들과 싸우는 고생물학자는 SF 소설 속에서만 등장하겠죠. 아니, 따지고 보면, 챌린저 교수조차 공룡과 별로 싸우지 않았어요.

 

 

하지만 <다키스트 던전>에서 핵심은 전투입니다. 다른 모든 요소는 전투를 뒷받침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마을에서 더 위력적이고 튼튼한 무기와 방어구를 만드는 이유는 모험가 일행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더 좋은 장신구들을 사는 이유는 역시 모험가 일행이 괴물들을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마을에서 모험가 일행이 도박이나 약물에 빠지는 이유는 전투 후유증 때문입니다.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모험가 일행은 던전 속을 제대로 탐험하지 못합니다. 만약 괴물들을 만날 때마다 모험가 일행이 도망치거나 패배한다면, 모험가 일행은 던전을 절반조차 탐사하지 못할 겁니다.

 

모험가들이 배우는 기술들은 대부분 전투 기술들입니다. 몇몇 야영 기술들도 있으나, 야영 기술들은 전투 기술들을 뒷받침하죠. 만약 <다키스트 던전>에서 전투가 아예 빠지거나 크게 줄어든다면, 게임 플레이는 굉장히 달라질 겁니다. 흠, 아마 일반적인 어드벤처 게임과 비슷해지겠죠. 등장인물들은 여기저기 쏘다니고, 사물들을 확인하고, 글을 읽고, 대화를 고르고, 기타 등등…. 지금처럼 성기사가 격렬하게 장검을 휘두르거나 도적이 요란하게 수발 권총을 쏘거나 질병 의사가 독극물을 펑펑 터뜨리지 않았겠죠.

 

 

사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를 이용하는 어드벤처 게임들 역시 존재합니다. 전투를 배제하거나 축소하는 게임들도 있어요.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을 이용하는 모든 게임이 <다키스트 던전>과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투를 축소하고, 탐사와 연구, 조사에 치중하는 게임들 역시 있어요. 그런 게임들은 러브크래프트 소설들과 좀 더 비슷할 겁니다. 만약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테이블 게임이나 비디오 게임에 참가한다면, 러브크래프트는 전투보다 연구와 조사에 초점을 맞추기 원할 겁니다. 러브크래프트가 여러 소설들을 쓴 이유는 기이하고 신화적인 설정들을 생생하게 펼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끔찍한 외계 괴물들을 신나게 때려잡는 전투는 이 양반의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에는 전투가 별로 없습니다. 종종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러브크래프트는 그걸 중점적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들이 다곤을 만나든, 쇼거스를 만나든, 미고를 만나든, 우선 소설 주인공들은 그것들을 연구하거나 조사합니다. 전투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전투와 싸움으로 점철된 창작물들을 본다면, 러브크래프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지 모릅니다. 왜 창작가들이 그런 자극적인 행위에 매달리는지 반문할지 모르죠.

 

 

왜 어떤 게임들은 연구와 조사를 중시하는 반면, 왜 어떤 게임들은 전투를 중시할까요. 왜 <다키스트 던전> 같은 게임들은 (러브크래프트가 중요하게 여긴) 연구와 조사를 등한시하고, 전투를 강조할까요. <다키스트 던전>에서 괴물들을 연구하거나 조사하는 과정을 보기는 힘듭니다. 모험가들 중 신비학자나 성직자 같이 학구적인 등장인물들이 있으나, 그런 등장인물들은 괴물들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신비학자나 성직자 역시 그저 던전 속에서 열심히 싸울 뿐이죠. 모험가 일행이 던전 속을 더 많이 돌아다니고 더 많은 보물들을 찾을수록,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더 많은 전설이나 비밀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어떻게 모험가 일행이 그런 전설이나 비밀을 발견하는지 게임은 묘사하지 않습니다. <다키스트 던전>은 어떻게 사람들이 괴물들에 얽힌 비밀들을 연구하는지 보여주지 않아요. 어쩌면 모험가 일행이 발견하는 여러 발견물들이 단서가 될지 모르죠. 모험가 일행은 던전 속에서 각종 서적들, 지도들, 책장들, 기록물들, 유물들, 동식물들을 발견합니다. 만약 그런 것들을 조사하고 연구한다면, 모험가들은 왜 괴물들이 나타나고 거대한 악이 출몰하는지 밝힐 수 있겠죠.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는 그걸 밝히는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없습니다.

 

 

<광기의 산맥>이나 <던위치 호러>, <크툴루의 부름> 같은 소설들은 어떻게 주연 인물들이 외계인들을 연구하는지 자세히 보여줍니다.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그런 과정과 설정을 소설 속에 풀어넣기 위해 무던히 애썼습니다. 아예 설정을 소설 속에 통째로 때려박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러브크래프트가 너무 글을 딱딱하게 쓴다고 지적하죠. <광기의 산맥>에서 주인공 탐사 대원은 외계인들의 유적 속에서 벽화를 발견하고, 외계인들의 역사를 줄줄이 읊습니다. 그런 설명 방식은 <던위치 호러>나 <크툴루의 부름>에도 등장하고, 다른 소설들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흔히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과 달리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은 괴물들이 신나게 피를 튀기고 육편으로 잔치를 벌이는 하드고어 소설이 아닙니다. 러브크래프트는 그런 것보다 기이하고 신화적인 상상을 중시했어요. 그래서 학자나 교수 같은 지식인들을 애용했고, 지식인들을 이용해 온갖 신화들을 줄줄이 떠들었습니다. 그런 설명 방식은 단조롭고 지루하게 보일지 모르나, 러브크래프트는 거기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설정은 <다키스트 던전> 같은 게임에 나오지 않습니다. 나오고 싶어도 나오지 못하죠. 그걸 집어넣을 공간이 없기 때문에.

 

 

실제 러브크래프트 소설과 달리, <다키스트 던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열심히 괴물들을 싸울 뿐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무기를 제련하고, 갑옷을 맞추고, 장신구들을 매달고, 약물을 조합하는 이유는 괴물들을 처치하기 위해서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금서들을 읽거나 그림들을 해석하거나 고대 문자를 해독하거나 기록물들을 뒤적거리거나 기이한 동식물들을 해부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소설들에서 그런 과정을 볼 수 있으나, 게임 플레이어는 그런 과정, 연구와 조사를 자세히 볼 수 없습니다.

 

<다키스트 던전>은 각종 서적들, 지도들, 책장들, 기록물들, 유물들, 동식물들 등등 온갖 발견물들을 내보이나, 자세한 조사 과정을 쏙 빼놓고, 연이어 전투만 강조합니다. 당연히 게임 플레이어는 설정이나 상상력보다 전술이나 수치에 집중하죠. 이질적이고 희한한 발견물들은 그저 전투를 보조하는 물품일 뿐이고, 그 자체로서 어떤 설정이나 상상력은 없습니다. 왜 이런 게임은 설정보다 전투를 더 강조할까요. 어쩌면 그건 게임의 본질적인 특성일지 모릅니다. 게임은 규칙을 정하고 플레이어가 그 규칙으로 승부하는 과정입니다. 테이블 게임이든 비디오 게임이든, 게임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은 승부죠. 따라서 <다키스트 던전> 같은 게임은 승부를 강조해야 했을 겁니다.

 

 

승부를 강조하고 싶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괴물들과 싸워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괴물들과 싸우면, 게임은 승패를 명확히 가를 수 있겠죠. 게임 플레이어들은 승부를 가리기 원합니다. 예전에 말한 것처럼, 전술을 짜든 트리거 단추를 누르든, 게임 플레이어의 목적은 승부와 승패입니다. 상상력이나 설정은 핵심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기이한 괴물이라는 상상력보다 그런 괴물을 신나게 때려잡는 승부에 관심이 있습니다. 뭐, 괴물이 기이할수록 때려잡는 재미가 더욱 커질 겁니다. 그래서 <다키스트 던전>은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을 빌렸겠죠.

 

하지만 <다키스트 던전>은 기이한 괴물들에만 치중하고, 그 괴물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원대한 상상력이나 설정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뭔가를 죽이고 느끼는 쾌감을 위해 기이한 괴물들은 존재합니다. 러브크래프트 소설 속에서 탐사대는 외계 괴물들을 쉽게 처치하지 못하나, 게임 속에서 모험가 일행은 기이한 괴물들을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쾌감을 느끼지 못할 테고, 아무도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겠죠. 게임 속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뭔가를 죽여야 합니다. 뭔가를 죽이지 않는다면, 게임을 플레이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물론 뭔가를 죽이지 않는 게임들도 많습니다. 연구와 조사에 치중하는 러브크래프트 게임들 역시 존재합니다. 모든 게임이 무조건 뭔가를 죽인다는 뜻은 아닙니다. 게다가 살상과 파괴를 위한 게임들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글에서 <다키스트 던전>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한 것 같으나, 저는 이 게임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력이 철철 넘치는 던전 탐험 게임이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게임들은 승패를 겨루고, 뭔가를 죽이거나 파괴하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런 게임들이 러브크래프트 소설들을 빌린다면, 당연히 외계 괴물들을 열심히 죽이려고 할 겁니다. 외계 괴물들은 일반적인 좀비나 고블린보다 훨씬 기이하게 보이기 때문에 더욱 신나게 죽일 수 있겠죠. 조사와 연구는 뒷전이고요.

 

그래서 저는 이런 게임들이 러브크래프트 소설이 보여주는 진정한 울림을 재현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설사 조사와 연구를 보여준다고 해도 주사위를 몇 번 굴리고 땡치겠죠. 결국 게임은 주사위거나 트리거 단추입니다. 전술 게임은 주사위를 굴리고, 액션 게임은 트리거 단추를 누르죠. 게임의 본질은 그겁니다. 기이한 상상력을 장대하게 펼치는 과정 대신 주사위나 트리거 단추 밖에 없습니다. 역시 사이언스 픽션은 소설 안에서 진가를 최대한 펼칠 수 있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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