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과학적 상상력과 초자연적 설정 본문
할 클레멘트는 <중력의 임무> 후기에서 모호하거나 너무 환상적인 결말을 싫어한다고 말했습니다. 장르 소설은 비일상적인 사건을 다룹니다. 당연히 독자는 그 사건의 원인이나 전말을 궁금해할 겁니다. 하지만 (할 클레멘트가 비판하는) 작가들은 결말에서 그 사건의 원인을 대충 넘어가거나 느닷없이 환상적인 요소를 도입하거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빠집니다. 그렇다면 뭔가 논리적이고 치밀한 전개를 기대한 독자들은 꽤나 실망하겠죠. 만약 SF 소설에서 세상이 멸망했는데, 그 멸망의 원인이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라면, 독자들은 실망할 겁니다. 독자들은 핵 전쟁이나 치명적인 바이러스나 환경 오염의 과학적인 기술을 기대했겠지만, 작가는 그런 기대를 배신(?)했습니다. 물론 아무리 하드 SF 소설이라도 어물쩍 넘어가는 부분들이 많지만, 유령이나 사후 세계나 초능력이 튀어나오고 사건을 해결하면, 그건 너무 뜬금없겠죠. 처음부터 그런 요소들을 깔아놓는 스페이스 판타지면 모를까요. 그게 아니라면, 유령이나 초능력은 김을 빼놓는 요소일 겁니다. 할 클레멘트는 이런 사례를 비판했고, 그래서 <중력의 임무>를 쓸 때 최대한 논리적으로 사건을 전개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SF 소설은 '논리적인 상상력'을 중시하는 장르입니다. 해당 소설이 하드 SF 소설에 가까울수록 이런 경향이 심해집니다. 하지만 환상으로 날아가는 작품들도 있고, 일부러 모호한 결론에 도달하는 소설도 있습니다. 가령,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세상이 끝날 때까지 10억 년>은 뭔가 알 수 없는, 열린 결말을 지향합니다. 이 소설에서 별별 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등장인물들은 그게 무엇 때문인지 끝내 밝히지 못합니다. 어떤 우주적 힘이 배후에서 작용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등장인물들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아무리 우주적 힘이 작용해도 어떻게 그런 괴상한 사건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 어떻게 눈 앞에서 사람이 뿅~ 사라질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그런 걸 기대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에 매우 실망할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애초에 작가들은 인간이 함부로 인지할 수 없는 우주적 힘을 설명했어요. 따라서 조리있고 자세한 설명은 소설의 분위기를 오히려 망쳤을 겁니다.
이렇듯 작품에 따라 모호한 결말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소설이 그런 길로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주제, 분위기, 연출에 따라 논리적인 상상력이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어떤 존재'를 설명하고 싶다면, 어설프게 자세한 설명을 붙이는 것보다 그냥 넘어가는 것이 나을 겁니다. 아무리 SF 소설이 논리적인 상상력을 중시해도 모든 SF 소설이 <중력의 임무> 같을 수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