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뭔가 과학스러워보이는 분위기 본문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과학을 소재로 이용합니다.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등. 사회 과학도 얼마든지 사이언스 픽션의 소재가 될 수 있지만, 자연 과학이야말로 이 장르를 대변하는 소재입니다. 그래서 하드 SF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의 꽃이자 정수라고 할 수 있죠. 덕분에 각종 과학자들은 SF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주인공 역할을 맡습니다. 때때로 그런 과학자들의 역할은 우주선 승무원이나 연구소 직원이나 공업 기술자에게 옮겨갈 수 있으나, 어쨌든 자연 과학 분야에 종사한다는 점은 비슷합니다. SF 소설은 과학자들의 활약만 아니라 과학자들의 심리나 일상, 고충 등을 덩달아 묘사합니다. 마법사가 검마 판타지의 대표 인물이라면, 자연 과학자는 사이언스 픽션의 대표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프랑켄슈타인>은 본격적인 SF 소설의 시초라고 불리는데, 소설 제목이 곧 주인공 과학자의 이름입니다. 이건 그저 우연이 아니겠죠. 그래서 저는 과학자들의 일상이나 이야기를 보면, 그게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뭔가 SF 감수성을 느끼곤 합니다.
가령, <금성의 약속>은 어디로 보나 SF 소설은 아닙니다. 차라리 시대극이죠. 하지만 천문학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천문학자들은 행성을 관찰하고 우주의 진리를 캐내기 위해 애씁니다. 학자들은 어디로 행성이 이동하는지, 왜 행성이 이동하는지 열띤 토론을 벌입니다. 그런 토론을 보면, SF 소설에서 과학자들이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금성의 약속>은 <별의 계승자> 같은 소설이 절대 아니지만, 과학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어딘가 닮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마술사가 너무 많다>나 <미래의 이브> 같은 스팀펑크를 봐도 이런 감수성을 느낍니다. 이 소설들도 실제 과학 기술과 별 연관은 없지만, 어쨌든 과학자(마법사)가 나오고 나름대로 논리적인 증명 과정을 거칩니다. 그게 비록 언어 유희나 상상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런 과정에서 일말의 재미와 로망을 느낄 수 있어요. 스팀펑크의 구닥다리 19세기 연구실은 21세기의 첨단 연구실만큼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우주의 진리를 밝히는 연구자의 모습은 시대극이든 판타지든 사이언스 픽션이든 로망입니다.
어쩌면 저는 엄정한 자연 과학보다 '뭔가 과학스러워보이는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모르죠. 그래서 하드 SF 소설만큼 스팀펑크 소설에도 매력을 느끼는지 모르죠. 아니, 가끔 스팀펑크의 과학자가 하드 SF의 과학자보다 더 멋져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마 이것도 자연 과학의 역사가 끼치는 영향력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