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고지라 대 콩>, 사이언스 판타지와 부족 소녀 본문
※ 이 게시글은 영화 <고지라 대 콩> 내용/결말 누설을 포함합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영화 <고지라 대 콩>에서 고지라와 킹콩은 두 주연 괴수입니다. 이건 고지라 서사와 킹콩 서사가 줄거리를 구성한다는 뜻입니다. 두 거대 괴수 서사는 독립적으로 흘러가나, 가끔 두 지류는 만나고, 마침내 영화 후반부에서 두 줄기는 대하(大河)가 되고 마무리를 짓습니다. 하지만 고지라 서사와 킹콩 서사 중에서 킹콩 서사는 훨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고대 신화 세계부터 주연 등장인물까지, 솔직히 이 영화에서 킹콩은 주인공 괴수에 훨씬 가깝습니다. 고지라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나, 킹콩과 달리, 고지라는 킹콩을 보조하기 위한 들러리에 가깝습니다.
왜 고지라보다 킹콩이 주인공 괴수인가요? 이유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1954년 <고지라>가 개봉했을 때, 이 영화는 20세기 중반 문명이 거대 괴수를 쉽게 쓰러뜨리지 못한다고 묘사했습니다. 아무리 20세기 중반 문명이 막강한 화력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거대 괴수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거대 괴수는 화력을 씹어먹고 도시를 불태웁니다. 거대 괴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출합니다. 반면, 1933년 <킹콩>이 개봉했을 때, 이 영화는 거대 괴수가 20세기 초반 문명을 이기지 못한다고 연출했습니다. 거대 괴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출하지 못합니다. 킹콩은 그저 난리법석을 피울 뿐입니다.
1954년 <고지라>는 킹콩보다 고지라가 훨씬 막강하다고 보여줍니다. 고지라와 킹콩이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킹콩은 고지라와 비슷해져야 합니다. 고지라와 비슷해지기 위해 킹콩에게는 성장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건 롤플레잉 게임적인 표현이나, 킹콩은 뛰어난 아이템을 얻고 (이른바 '득템'하고) 강력한 괴수로 거듭나야 합니다. 킹콩이 고지라와 비슷한 레벨이 될 때, 킹콩은 고지라와 대적할 겁니다. 킹콩이 성장하고 바뀌기 때문에, 킹콩은 성장 서사, 바뀌기 위한 서사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이미 고지라가 강하기 때문에, 고지라에게는 성장하기 위한 서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고지라가 성장한다면, 킹콩보다 고지라는 훨씬 우월할 테고, 영화 제목과 달리, 킹콩은 고지라에게 대적하지 못할 겁니다. <고지라 대 콩>에서 고지라는 성장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킹콩만 성장합니다. 킹콩이 성장 서사를 펼치기 때문에, 영화 시점은 고지라보다 킹콩을 따라갑니다. 성장 서사는 변화를 동반합니다. 영화 초반 킹콩과 영화 후반 킹콩은 크게 다릅니다. 이 변화(성장)를 추적하고 어떻게 킹콩이 바뀌는지 보여주기 위해 영화 시점은 고지라보다 킹콩을 따라갑니다. 영화 시점이 킹콩을 따라가기 때문에, <고지라 대 콩>에서 고지라보다 킹콩은 길다란 분량을 차지합니다.
고지라보다 킹콩이 길다란 분량을 차지하기 때문에, 고지라보다 킹콩은 주인공에 가깝습니다. 만약 영화 시점이 고지라를 열심히 따라간다면, 고지라 역시 주인공에 가까울 수 있으나, 영화 시점은 고지라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미 고지라가 강하기 때문에, 고지라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고지라는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영화 초반 고지라와 영화 후반 고지라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지라가 이른바 '득템'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영화 시점이 고지라 서사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문제가 별로 되지 않습니다. 반면, 영화 시점은 킹콩 서사를 놓치지 않습니다.
영화 시점은 어떻게 킹콩이 득템하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초반 킹콩과 후반 킹콩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만약 영화 시점이 킹콩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면, 관객들은 이게 혼란스럽다고 느낄 겁니다. 킹콩이 성장하기 때문에, 영화 시점이 킹콩을 추적하는 동안, 관객들은 킹콩에게 감정을 이입할 겁니다. 킹콩이 성장하고, 관객들이 킹콩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들이 성장한다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관객들이 성장하기 때문에, 관객들은 만족스럽다고 느낍니다. 관객들이 만족하기 때문에, 킹콩 서사(성장 서사)는 극적인 감동을 유발합니다. 반면, 고지라 서사는 다릅니다.
고지라가 성장하지 않기 때문에, 초반 고지라와 후반 고지라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관객들이 고지라에게 감정을 이입한다고 해도, 관객들은 극적인 감동을 느끼지 않을 겁니다. 관객들이 극적인 감동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비록 영화 시점이 고지라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대수롭지 않습니다. 영화 시점이 고지라보다 킹콩을 추적하기 때문에, 고지라보다 킹콩은 길다란 분량을 차지하고, 고지라보다 킹콩은 주인공에게 가까워집니다. 이건 모든 관객이 성장 서사를 필연적으로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장 서사와 관계없이, 어떤 관객들은 고지라를 좋아할지 모릅니다.
이 관객들이 고지라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관객들은 킹콩보다 고지라에게 감정을 이입할 겁니다. 1954년 이후, <고지라> 시리즈가 기나긴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영화 외부적으로 고지라에게는 기나긴 서사, 극적인 서사가 있습니다. 영화 외부적인 이유 때문에, 어떤 관객들은 고지라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고지라가 바다 괴수이거나, 고지라가 훨씬 막강하거나, 다른 이유들 때문에, 어떤 관객들은 킹콩보다 고지라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 관객들이 고지라를 좋아하기 때문에, 비록 고지라가 크게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이 관객들은 고지라에게 감정을 이입할 겁니다.
이 관객들이 고지라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때문에, 이 관객들은 성장 서사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이 관객들이 성장 서사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모든 관객은 성장 서사를 100%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장 서사가 변화를 동반하기 때문에, 성장 서사는 극적인 감동을 유발하나, 이건 필연적인 결과가 아닙니다. 하지만 고지라보다 킹콩이 성장하기 때문에, 분명히 고지라보다 킹콩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만약 어떤 관객들이 고지라를 좋아한다면, 그들은 이게 불만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 영화는 '고지라' 대 킹콩이야! 왜 킹콩보다 고지라가 뒷전이지?")
어떻게 킹콩이 크게 바뀌는지 보여주기 위해 킹콩 서사는 여러 배경 무대들과 사건들을 보여줍니다. 배경 무대들과 주된 사건들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킹콩 서사는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킹콩 서사가 새로운 것들을 연이어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들은 지루하다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특히,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킹콩은 왕입니다. 킹콩은 아주 거대한 90m짜리 왕입니다. 고지라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출할 수 있고, 킹콩이 고지라와 대적해야 하기 때문에, 킹콩은 아주 거대하고 막강한 왕입니다. 아주 거대하고 막강한 왕에게는 아주 거창한 성장 서사가 필요합니다. 고대 신화는 적격입니다.
거창한 득템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고지라 대 콩>은 고대 신화를 적용합니다. 고대 신화는 어떻게 영웅이 대륙을 구원하고 민족을 창시하는지 서술합니다. 고대 신화와 영웅 서사시는 비슷한 단어가 될 수 있습니다. 영웅이 대륙을 구원하고 민족을 창시하기 때문에, 고대 신화는 아주 거창합니다. 만약 <고지라 대 콩>이 킹콩과 고대 신화를 결합한다면, 킹콩은 아주 거대하고 막강한 왕이 될 겁니다. 아서 왕이 엑스칼리버를 뽑고 카멜롯의 전설이 되는 것처럼, 킹콩은 신비로운 무기를 얻고 거대하고 막강한 왕좌에 앉습니다. 킹콩 서사는 비단 득템 서사일 뿐만 아니라 고대 신화입니다.
2014년 <고지라>가 개봉했을 때, 이미 몬스터버스가 거대 괴수와 고대 신화를 결합했기 때문에, 고지라 서사 역시 고대 신화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시점이 고지라를 열심히 쫓아가지 않기 때문에, 고지라 서사는 고대 신화로 승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고지라 서사는 매디슨 일행을 포함합니다. 매디슨 일행은 음모론자를 포함합니다. 음모론자는 고대 신화보다 근대 헛소문과 어울립니다. 고지라 서사가 근대 헛소문과 어울리기 때문에, 고지라 서사는 고대 신화를 향해 상승하지 않습니다. 고지라와 매디슨 일행이 메카 고지라를 추적하기 때문에, 고지라 서사는 첨단 과학을 강조합니다.
첨단 과학은 고대보다 미래와 어울립니다. 문자 그대로 첨단 과학이 과학이고, 19세기 진화 이론이 보여줬던 것처럼, 과학과 종교가 대립하고, 종교가 신화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과학과 신화는 대립합니다. 과학과 신화가 대립하고, 과학이 고대보다 미래에 어울리고, 고지라 서사가 첨단 과학을 강조하기 때문에, 고지라 서사는 고대 신화로 승화하기보다 미래 첨단 과학이 찬란하다고 묘사합니다. 미래 첨단 과학이 찬란하기 때문에, 고지라는 고대 서사 영웅이 되지 않습니다. 고지라 서사와 달리, 킹콩 서사는 과학보다 신화에게 기반하고 미래보다 고대를 강조합니다. 킹콩은 인간이 아닙니다.
킹콩은 문명에 속하지 않습니다. 킹콩은 비(非)인간입니다. 킹콩이 비인간이기 때문에, 킹콩이 성장하는 동안, 킹콩은 친숙한 배경보다 이질적인 배경을 거칩니다. 킹콩이 아주 아주 거대한 야생 동물이기 때문에, 이질적인 자연 생태계는 아주 아주 거대한 야생 동물과 잘 어울립니다. 이질적인 자연 생태계가 배경 무대이기 때문에, 킹콩 서사는 지구 공동 생태계를 강조합니다. 지구 공동 생태계는 이질적입니다. 이질적인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지구 공동 생태계는 '세계를 뒤집'습니다. 지구 공동 생태계는 전복적입니다. 전복적인 것은 혁명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킹콩 서사는 혁명적입니다.
킹콩이 전복적인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킹콩 서사는 감탄스럽습니다. 세계가 뒤집히고, 전복과 혁명이 성공할 때, 언제나 이것들은 감탄스럽습니다. 지구 공동이 전복적인 세계, 이질적인 분위기, 장대한 자연 생태계, 고대 영웅 신화를 아우르기 때문에, <고지라 대 콩>에서 지구 공동은 가장 사이언스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관객들은 킹콩과 함께 경이롭고 압도적인 사이언스 판타지 여정에 동참합니다. 킹콩은 문명에 속하지 않으나, 킹콩이 유인원이기 때문에, 콩 일족은 고유한 문명을 선보입니다. 고유한 문명 덕분에, 킹콩은 단순한 거대 야생 동물보다 새로운 종족, 문명인으로 거듭납니다.
킹콩은 '문명인'입니다. 비록 킹콩이 전형적인 서구 근대 문명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킹콩은 이질적인 문명인입니다. 킹콩이 (이질적인) 문명인이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고지라 대 콩>은 단순한 거대 괴수 결투보다 사이언스 판타지에 훨씬 가까워집니다. 여러 사이언스 판타지들이 고대 문명인들을 중시하는 것처럼, 킹콩이 이질적인 문명인이기 때문에, 킹콩은 발광 도끼를 휘두르고 사이언스 판타지에 편입합니다. 그 자체로서 킹콩 서사가 사이언스 판타지를 쓰기 때문에, 비록 고지라 서사가 빠지고 영화 시점이 오직 킹콩 서사만 추적한다고 해도, 킹콩 서사는 아주 감동적일지 모릅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건 다소 아쉽습니다. 킹콩 서사는 훌륭한 사이언스 판타지를 씁니다. 하지만 킹콩 서사와 고지라 서사가 만나기 때문에, 사이언스 판타지는 거대 괴수 결투를 넘어가지 않습니다. <고지라 대 콩>에서 지구 공동 여정은 빛나는 정수일 수 있으나, 이 빛나는 정수는 거대 괴수 결투를 넘어가지 않습니다. <고지라 대 콩>에서 지구 공동 여정은 전복적이고 이질적인 새로운 자연과 고대 문명을 찬란하게 자랑하나, 영화 시점은 빛나는 정수를 뒤로 하고 거대 괴수 결투를 향해 질주합니다. <고지라 대 콩>은 훨씬 높은 차원을 향해 도약할 수 있으나, 이 도약은 다소 어중간합니다.
이건 거대 괴수 결투보다 지구 공동 여정이 우월한 설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킹콩이 문명인이 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킹콩은 거대 괴수입니다. 근본적으로 킹콩이 거대 괴수이기 때문에, 거대 괴수 결투는 근본적인 마무리입니다. 거대 괴수가 근본적인 정체성이기 때문에, <고지라 대 콩>이 지구 공동 여정보다 거대 괴수 결투를 훨씬 크게 배치한다고 해도, 이건 정당한 비중입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1억 5천짜리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거대 괴수와 새로운 자연과 고대 문명을 결합하나요? 이 사례들은 흔하지 않습니다. 이 사례들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고지라 대 콩>은 아쉽습니다.
<고지라 대 콩>은 지구 공동 여정을 부각하고 새로운 장르로 거듭날 수 있으나, 이 가능성은 높은 차원을 향해 도약하지 않습니다. 이 가능성은 다소 어중간합니다. 이 가능성이 어중간하기 때문에, 이건 다소 아쉽습니다. 이건 지구 공동 설정이 훌륭한 사이언스 판타지를 필연적으로 보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구 공동 설정은 훌륭한 음식보다 훌륭한 재료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재료가 뛰어나다고 해도, 만약 요리사가 제대로 요리하지 못한다면, 훌륭한 재료는 훌륭한 음식으로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훌륭한 재료는 훌륭한 음식을 100% 보장하지 않습니다. 이건 그저 가능성에 불과합니다.
만약 몬스터버스가 지구 공동 설정을 계속 연장한다면, 몬스터버스가 새로운 장르를 향해 도약할 수 있을까요? 만약 몬스터버스가 지구 공동 설정을 계속 연장한다면, 이게 새로운 장르를 형성할 수 있을까요? 이게 다른 거대 괴수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칠까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몬스터버스가 연장하고 지구 공동 설정을 펼친다고 해도, 이게 필연성보다 가능성이기 때문에, 이건 새로운 장르를 100%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록 지구 공동 설정이 그저 가능성에 불과하다고 해도, 지구 공동 설정이 새로운 장르를 위한 씨앗일지 모르기 때문에, <고지라 대 콩>은 다소 아쉽습니다.
비록 킹콩이 전형적인 근대 문명인이 아니라고 해도, 킹콩이 (아주 이질적인) 문명인이기 때문에, 킹콩과 인간은 소통할 수 있습니다. 킹콩과 인간이 소통하기 때문에, 인간 등장인물들은 서사에 훨씬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습니다. 인간 등장인물들이 서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에, 킹콩 서사에서 괴수와 인간들은 함께 어울립니다. 킹콩과 지아는 소통하고, 지아는 다른 인간들과 소통하고, 킹콩-지아-다른 인간들은 서로 이어집니다. 반면, 고지라와 인간이 소통하지 않기 때문에, 고지라 서사에서 괴수와 인간들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매디슨 일행은 고지라와 직접 만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매디슨 일행이 고지라를 열심히 논의한다고 해도, 매디슨 일행과 고지라는 만나지 않습니다. 괴수와 인간들이 다른 노선들을 걷기 때문에, 고지라 서사는 조화롭지 않습니다. 고지라 서사가 조화롭지 않기 때문에, 이건 산만합니다. 고지라 서사는 산만한 노선들을 따라갑니다. 반면, 킹콩 서사가 경이로운 사이언스 판타지로 승화하고, 킹콩 서사에서 괴수와 인간들이 함께 어울리기 때문에, 킹콩 서사에서 인간 등장인물들은 경이로운 사이언스 판타지에 동참합니다. 고지라 서사가 산만하고, 킹콩 서사가 경이로운 조화를 보여주기 때문에, 고지라보다 킹콩은 주인공에 훨씬 가깝습니다.
킹콩이 전형적인 문명인이 아니기 때문에, 킹콩과 소통하기 위한 인간 역시 전형적인 문명인이 아닙니다. 지아는 전형적인 서구 백인 어른 남자가 아닙니다. 지아는 열대 밀림 부족민입니다. 지아는 여자, 아이입니다. 부족+여자+아이는 전형적인 근대 문명인과 대조적입니다. 킹콩은 제3세계 부족민 여자 아이와 소통하고 인간들을 돕습니다. 이 지점에서 킹콩과 모스라는 비슷합니다. 모스라는 두 소미인과 소통합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소미인은 작습니다. 소미인은 여자입니다. 소미인은 열대 밀림 부족에 속합니다. 지아와 소미인이 비슷하기 때문에, 킹콩과 모스라는 비슷합니다.
1933년 킹콩은 모스라와 비슷하지 않았습니다. 1933년 원작 영화는 제3세계 부족민 여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몬스터버스 티타누스 콩에게 1933년 킹콩은 원작이나, (지아가 킹콩과 소통하기 때문에) 1933년 원작 킹콩보다 몬스터버스 킹콩은 1961년 모스라와 훨씬 비슷합니다. 지아가 킹콩과 소통하기 때문에, <고지라 대 콩>에서 지아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적어도 킹콩 서사에서 부족 소녀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고지라는 지아에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제3세계 부족민 여자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른바 남성적인 감성은 이 영화를 장악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지아는 남성적인 감성을 어느 정도 밀어냅니다. 이건 <고지라 대 콩>이 지아를 의도적으로 배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아가 제3세계 부족민 여자 아이이기 때문에, 이건 커다란 함의가 될 수 있으나, 지아는 의도보다 우연에 가깝습니다. 왜 거대 괴수와 부족민이 커다란 함의인가요?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는 자유주의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립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주의가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공유지의 비극을 떠들고 사유 재산 제도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자유주의에게 아무 문제가 없나요? 정말?
서구 사회에서 자유주의가 발달하는 동안, 서구 사회는 북아메리카를 비롯해 제3세계 식민지, 열대 밀림 식민지를 수탈했습니다. 존 로크는 대표적인 자유주의 철학자입니다. 존 로크는 식민지 수탈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자유주의 철학자는 식민지 수탈이 이득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자유주의 철학자가 식민지 수탈이 긍정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처럼, 자유주의 발달과 식민지 수탈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회주의가 이것을 비판했기 때문에, 제국주의 이론은 자유주의보다 사회주의에 속합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자유주의보다 사회주의는 제국주의 침략이 나쁘다고 훨씬 크게 떠듭니다.
이른바 기후 정의는 부유한 북반구와 가난한 남반구를 대조합니다. 서구 자유주의가 식민지 수탈에게 기생하는 것처럼, 북반구 자본주의가 행성급 환경 오염을 저지르기 때문에, 가난한 열대 밀림 지역은 고통에 빠집니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약자이기 때문에, 만약 기후 변화가 훨씬 심각해진다면, 열대 밀림 여자들은 훨씬 커다란 고통에 빠질 겁니다. 몬스터버스에서 자연 환경 보호는 핵심 주제입니다. 티타누스 우수종들이 아주 아주 거대한 야생 동물들이기 때문에, 그저께 6월 20일 게시글이 설명했던 것처럼, 거대 괴수는 환경 보호를 상징하고 기후 변화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거대 괴수가 환경 보호를 상징하고, 지아가 제3세계 부족 소녀이기 때문에, 지아는 커다란 함의가 될 수 있으나, <고지라 대 콩>은 이 함의에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미아나와 마이나처럼, <고지라 대 콩>에서 지아는 그저 표면적인 자연에 불과합니다. 지아가 표면적인 자연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래픽 노블 <우먼 월드> 같은 유토피아와 달리, 모성적인 자연보다 남성적인 문명은 <고지라 대 콩>을 장악합니다. 하지만 비록 지아가 표면적인 등장인물이라고 해도, 지아 덕분에, 적어도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들보다 <고지라 대 콩>은 새로운 활력을 풍깁니다.
심지어 킹콩-지아-다른 인간들 관계는 어느 정도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다른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이 분위기를 풍길 수 있나요? <저스티스 리그>는 엄청난 블록버스터 영화이나, 이 영화에서 열대 부족민 소녀가 활약한다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록 지아가 표면적인 한계를 넘어가지 못한다고 해도, 지아 덕분에, <고지라 대 콩>은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심지어 몇몇 장면에서 지아는 어린 초인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똑같은 (젊은/어린) 여자 등장인물이라고 해도, 매디슨 러셀보다 지아가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처럼, <고지라 대 콩>에서 고지라보다 킹콩은 주인공입니다.
장대한 사이언스 판타지부터 새로운 활력까지, 여러 측면들에서 고지라보다 킹콩은 주인공에 가깝습니다. 킹콩으로서 이 영화는 시작하고, 킹콩으로서 이 영화는 끝납니다. 영화 초반, 킹콩은 인공적인 열대 밀림(바이오 돔 해골섬)을 싫어합니다. 영화 마지막, 킹콩은 새롭고 드넓은 열대 밀림을 찾습니다. 킹콩은 고향을 잃었으나, 킹콩은 새로운 고향을 찾고 정착합니다. 이건 전형적인 판타지 결말입니다. 고지라는 그저 메카 고지라를 해치웠고 바다로 돌아갔을 뿐이나, 킹콩은 전형적인 판타지 결말을 장식합니다.
※ 영화 <고지라 대 콩> 스틸샷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5034838/mediaindex/?ref_=tt_mi_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