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거대 괴수는 인기를 끌지 못하는가 본문
[사실 국내에서 <고지라>와 <모스라> 시리즈는 제대로 개봉한 적이 없죠. 여기는 괴수 불모지….]
듀나는 어떤 논평 시리즈에서 <듄>을 이야기할 때, 모래벌레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듀나는 아트레이드 가문과 하코넨 가문의 암투보다 모래벌레와 행성 생태계가 훨씬 인상적이라고 말했죠. 거대한 괴수와 그 괴수를 둘러싼 장대한 생태계. 하지만 <듄> 이외에 듀나는 다른 소설을 이야기하지 않더군요. 저는 그 논평 시리즈를 모두 읽었으나, 듀나가 거대 괴수나 행성 생태계를 이야기하는 소설은 <듄> 이외에 없었습니다.
사실 듀나가 이야기하고 싶어도 딱히 이야기할 소설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거대 괴수가 등장하고, 그 괴수를 둘러싼 행성 생태계를 서사적으로 펼치는, 그런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드물기 때문입니다. 아마 한국 작가들과 번역된 외국 작가들을 모두 살펴본다고 해도 그런 장르 소설을 찾기가 쉽지 않겠죠. 물론 괴물들이 등장하고 생태계를 이야기하는 소설들은 많습니다. 비록 SF 소설은 아니나, <백경>은 괴수와 생태계를 이야기하는 소설이 고전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줬습니다. 소설 속의 고래들은 분명히 어마어마한 괴수죠. (뭐, 허먼 멜빌은 동물 권리를 인정하는 작가는 아니었습니다. 그건 참으로 애석합니다.)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이나 <와인드업 걸> 같은 소설들은 본격적인 장르 소설이고, 괴수와 자연 환경을 강조합니다. <퍼디도 정거장>의 절지류 괴수는 환경 오염에서 비롯했습니다. 이 소설은 야생보다 도시에 더 관심이 많으나, 자연과 문명은 정확히 나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소설은 온갖 도시 환경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더러운 도시 환경들은 자연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치겠죠. 소설은 그걸 직접 묘사하지 않으나, 그런 참사는 너무 자명합니다. 자연 생태계를 강조하는 장르 소설을 꼽는다면, <퍼디도 정거장>을 빼놓지 못할 겁니다.
<와인드업 걸> 또한 거대 개조 코끼리를 선보입니다. 거대 개조 코끼리는 소설 첫머리에서 그야말로 괴수물을 찍습니다. <퍼디도 정거장>이 도시 환경에 주목한 것처럼 <와인드업 걸>은 식량 산업에 주목합니다. 이 소설 역시 야생을 보여주지 않으나, 식량 산업은 자연 생태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생태학자들이나 환경 단체들은 유전자 조작 농산물에 반대하죠. 이런 소설들에 만족하지 못하겠다면, <쥬라기 공원> 같은 소설도 있습니다. <퍼디도 정거장>이나 <와인드업 걸>과 달리 <쥬라기 공원>은 대놓고 괴수들을 강조합니다. 이 괴수들은 정말 거대합니다. 13m에 이르는 티라노사우루스 렉스가 작다고 말할 사람은 없겠죠.
<쥬라기 공원>은 자연 생태계에 무심하지 않습니다. 뭐, 마이클 크라이튼은 <공포의 제국>에서 기후 변화가 한낱 음모론이라고 주장했죠. 결국 크라이튼 역시 자본주의 체계의 구조를 깨닫지 못하는 작가에 불과했습니다. <쥬라기 공원> 역시 자본주의가 아니라 몇몇 자본가의 야심만 지적하는 소설에 불과하고요.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이 괴수와 자연 생태계를 멋지게 조합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괴수와 자연 생태계를 조합하는 소설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들 중에서 <듄>처럼 정말 어마어마한 괴수를 선보이는 소설은 없는 듯합니다. 괴수들은 많으나, 모래벌레처럼 어마어마한 괴수는 드물어요. 물론 해외에는 그런 소설들이 수두룩합니다. 한국 작가들이 그런 소설을 쓰지 않거나 그런 외국 소설들이 번역되지 않을 뿐이죠. 그 이유는 우선 우리나라의 SF 시장이 좁기 때문일 겁니다. 게다가 어쩌면 한국 독자들은 거대 괴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저는 출판업 관계자가 아니기 때문에 한국 독자들의 취향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SF 동호회 등을 둘러보면, 괴수는 그리 인기를 끌지 못하는 듯해요.
그 이유는…. 아마 괴수는 인간이 아니라 야생 동물이고, 우리가 인간들의 이야기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일지 몰라요. 아무리 괴수가 거대하고 무지막지하다고 해도 어쨌든 야생 동물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설사 우리가 다른 존재를 바라본다고 해도 우리는 다른 존재에게서 인간을 읽기 원합니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솔라리스>에서 핵심을 짚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인간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인간 영역을 벗어나는 야생 동물에게 관심이 없겠죠. SF 독자라고 해도 크게 다른 듯하지 않습니다. SF 독자들 역시 인간적인 상상력을 원할 뿐이고, 인간 영역 밖으로 관심을 돌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첫머리에서 이야기한 듀나의 논평 시리즈를 둘러봐도 다들 인간들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동물들은 끼어들지 못해요.
듀나는 <듄>을 논평한 글에서 "내가 상상하는 책(모래벌레만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한다."고 이야기했죠. 어쩌면 그 말은 그만큼 독자들이 자연 생태계와 거대 괴수에게 집중하는 소설에 관심이 없다는 반증일지 모릅니다. 비단 거대 괴수만 아니라 좀 더 작은 괴수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공룡은 많은 인기를 끕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공룡이나 메갈로돈 같은 좀 더 작은 괴수가 등장하는 유명한 SF 소설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글쎄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프래그먼트>나 <내추럴 셀렉션> 같은 것들은 제외입니다.) 반면, 우주선이나 로봇이 등장하는 SF 소설들은 훨씬 많겠죠.
과연 저런 추측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정말 우리나라 독자들이 야생 동물에 관심이 없고, 그래서 괴수 소설이 드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추측할 뿐입니다. 스콧 웨스터펠드가 쓴 <레비아탄> 같은 소설들은 어떨지 궁금하군요. 이 소설은 자연 생태계를 강조하지 않으나, 어마어마한 괴수들이 등장하죠. 하지만 역시 독자들은 베헤모스 같은 괴수보다 소녀와 소년의 알콩달콩한 연애에 더 관심을 기울일지 모릅니다. 어쨌든 저는 괴수가 등장하는 소설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고, 듀나 같은 평론가가 거대 괴수들을 더 많이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듀나 역시 어마어마한 촉수 생체 병기보다 소년으로 변장하는 소녀를 더 많이 이야기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