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강철 군화>와 노동 계급 혁명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강철 군화>와 노동 계급 혁명

OneTiger 2017. 10. 11. 20:00

소설 <강철 군화>는 사회주의 SF 소설로서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일 겁니다. 이 소설이 그토록 인기를 얻는 이유는 아마 잭 런던의 시원시원하고 직설적이고 힘찬 필력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뒤 돌아보며>나 <붉은 별> 같은 소설과 달리 <강철 군화>는 에버하드라는 영웅적인 인물을 내세웁니다. 소설의 시점은 줄곧 이 인물을 쫓아가고, 에버하드는 그 이름처럼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시련에 맞섭니다.


<뒤 돌아보며>나 <붉은 별>은 왜 사회주의 체계가 좋은지 시시콜콜 (지루하게) 설교하지만, <강철 군화>는 그렇게 지루한 설교를 늘어놓지 않습니다. 대신 에버하드는 중소 자본가들이나 대자본가들과 맞서 싸웁니다. 싸움 구경은 언제나 재미있는 법이고, 그건 말싸움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사 토론 프로그램은 커다란 인기를 끌겠죠.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버하드는 자본가들의 집요하고 위협적이고 고지식한 편견에 맞서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과 명분을 당당하게 외칩니다. 그런 모습은 마치 한 명의 전설적인 전사가 위풍당당하게 여러 적들을 물리치는 장면 같습니다.



하지만 잭 런던은 그저 싸움만 보여주지 않습니다. 싸움이 터지기 이전에 왜 사회주의자들이 싸워야 하는지 이야기합니다. 싸움을 위한 밑밥을 깔아야죠. 자본가들과 논쟁했을 때와 달리 이런 과정에서 에버하드는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미 에버하드는 왜 자본가들과 싸워야 하는지 이유를 알기 때문에 구태여 그런 과정에 등장할 필요가 없겠죠. 대신 작가는 에이비스라는 어느 중산층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에이비스는 분명히 고등 교육을 받았고 교양인이지만, 자본가 기득권들의 폭력에는 무지합니다. 노동자들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서 고통을 받는지 전혀 모르죠.


국가라는 통치 기구가 인민들을 억압하고 거대 자본을 편든다는 사실 역시 모릅니다. 에버하드는 에이비스가 직접 그런 사실을 체험하기 바라고, 에이비스는 공장과 빈민가와 회사를 떠돕니다. 그 과정에서 산업 재해를 겪은 노동자를 직접 만나고, 왜 공장장이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왜 회사가 그런 노동자들을 책임지지 않는지 깨닫습니다. 당연히 잭 런던은 이런 과정을 무미건조하게 나열하지 않습니다. 에이비스는 산업 재해를 만나거나 자본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충격을 받거나 가열차게 분노합니다. 그런 충격과 분노는 고스란히 소설 밖의 독자에게 전해집니다.



사실 <강철 군화>는 낡은 소설이나, 이런 충격과 분노는 21세기 초반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낡았으나 여전히 미덕을 잃지 않았습니다. <강철 군화>가 이야기하는 사회주의 혁명은 낡은 것처럼 보이나, 자본주의의 모순은 예전보다 훨씬 더 크게 해악을 끼치는 중이죠. 많은 평론가들은 이 소설이 사회주의 혁명을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예견했다고 비판합니다. 따라서 <강철 군화>는 사회주의 유토피아로서 낡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반쪽은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이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정말 날카롭고 통렬하게 지적합니다. (보다 현장감이 넘치는 지적을 보고 싶다면, <밑바닥 사람들>이 좋습니다. 이건 그야말로 르포 형식입니다.)


이 소설은 막대한 환경 오염이나 핵 발전소나 기후 변화를 말하지 않으나, 21세기 독자들은 그런 것들도 얼마든지 이 소설에 대입할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가 이런 비극들을 부풀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환경 오염을 자본주의 탓으로 돌린다면, 그건 잘못이겠죠. 하지만 분명히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에 막대한 책임이 있어요. 21세기 환경 사회학이 19세기 <자본론>에서 영감을 얻는 것처럼 21세기 독자들은 <강철 군화>에서 오늘날의 비극을 엿볼 수 있을 겁니다.



잭 런던은 소설 초반부에 비극과 논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제 진짜 혁명에 나설 시간입니다. 저런 비극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에이비스와 에버하드를 비롯해 노동자 군대는 투쟁적인 혁명에 나섭니다. 그들은 각종 테러와 납치, 사보타주, 공작, 교란 작전을 서슴치 않고, 마치 소설 후반부는 자본주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하드 보일드 소설이나 첩보 소설을 보는 듯합니다. 아니면 암살단 같은 비밀 특수 조직을 보는 듯합니다. 이런 장면은 식민지 사회주의자들의 독립 투쟁과 비슷한 면모가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나라의 의열단을 소설 속에 집어넣고 싶다면, <강철 군화>를 참고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겁니다. 비록 의열단과 노동자 군대는 사상적인 뿌리가 다르나, 거시적으로 모두 사회주의 테러 집단이죠. <에코토피아 뉴스> 같은 소설은 피 냄새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투쟁적 혁명을 그저 슬쩍 언급할 뿐이나, <강철 군화>는 그런 투쟁과 테러를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우리들>이나 <1984>에는 이런 시원시원한 액션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강철 군화>는 저런 디스토피아 소설들과 차별성을 보인다고 할 수 있겠죠.



이런 장점들을 나열함에도 <강철 군화>를 읽은 독자는 뒷맛이 씁쓸하다고 느낄 겁니다. 결국 이 소설이 바라보는 사회주의 전망은 낡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들은 이 소설이 순진하게 사회주의 혁명을 이야기하고, 소비에트 연방 같은 부작용을 생각하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강철 군화>는 낭만적이고 순진하게 사회주의를 바라볼까요. 정말 <강철 군화>는 소비에트 연방 같은 부작용을 고려하지 못했을까요. 저는 잭 런던이 죽기 전에 사상을 바꿨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말년에 잭 런던은 사회주의 혁명에 꽤나 회의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잭 런던은 (사회주의 사상을 바꾼 것보다) 노동자들의 계급 각성에 실망한 듯합니다. <강철 군화>에서 노동자 계급은 하나로 뭉치고 자본가 기득권들과 열심히 싸웁니다. 이건 아주 고전적인 사회주의 혁명 이론입니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해진다면, 세상은 소수 자본가들과 대다수 노동자들로 나뉩니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계급 의식을 각성합니다. 그들은 하나로 뭉치고 결국 혁명에 성공합니다. 카를 마르크스 이후 이런 이론은 대세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실 수많은 노동자들은 계급 의식을 각성했고, 혁명을 시도했습니다. 잭 런던이 <강철 군화>를 쓰기 이전에 이미 그런 혁명은 몇 번 등장했고,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투쟁적인 계급 의식을 각성했습니다. 중국 공산당, 쿠바 공산당, 인도네시아 공산당 등은 그런 투쟁 속에서 등장했어요. 하지만 잭 런던이 실망한 이유는 유럽이나 북미의 노동자들이 세계적인 혁명의 흐름에 동참하기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문구처럼 잭 런던은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하기 바랐을 겁니다. 소설 속에서 노동자들은 그렇게 단결하고 세계적인 혁명을 일으킵니다.


문제는 현실의 노동자들이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현실의 노동자들은 단일한 계급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임금 상승을 바라고, 누군가는 복지를 바랍니다. 누군가는 그저 해고당하지 않기만 바랍니다. 남자 노동자는 여자 노동자를 차별하고, 백인 노동자는 흑인 노동자가 백인들을 몰아낼 거라고 두려워합니다. 왕년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 계급들이 단일하게 뭉칠 거라고 기대했으나, 현실의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회 민주주의자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노동자들보다 자본가들에게 의존합니다.



21세기 지금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뭐, 멀리 갈 필요가 없어요. 우리나라의 좌파 정당들은 탈핵을 외치나, 수많은 기득권 정당들과 핵 마피아들은 탈핵에 반대합니다. 핵 발전소 노동자들은 그런 핵 마피아들과 뻔뻔스러운 기득권 정당들을 응원합니다. 핵 발전소 노동자들은 산업 폐기물보다 자신들의 밥그릇을 걱정해요. 미래 후손들이 환경 오염에 시달린다고 해도 일단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바라죠. 물론 모든 핵 발전소 노동자들이 탈핵에 반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분명히 어떤 노동자들은 먹고 살 길이 없기 때문에 탈핵에 반대하겠죠. (그래서 탈핵은 사회주의 정책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만약 잭 런던이 이런 장면을 본다면, 분명히 실망을 금치 못할 겁니다.


노동자 계급이 단일하게 뭉치고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이 점은 예전부터 각종 논란들을 일으켰고, 그래서 어떤 사회주의자들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상당수는 사회 민주주의로 노선을 바꿨고, 일부는 또 다른 대안을 찾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앙드레 고르는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썼고, 프롤레타리아 혁명보다 기본 소득 같은 정책에 중점을 둡니다. 그렇다고 해도 저는 카를 마르크스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언제 모순에 도달할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프레드 월리스가 진화론을 설명했다고 해도 월리스가 미래의 생태계를 예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를 분석했으나, 언제 자본주의가 무너질지 정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현재 사회주의자들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각자 다르게 해석하는 듯합니다. 고(故) 크리스 하먼 같은 골수 빨갱이(?)는 여전히 노동자들의 단합과 혁명을 주장합니다. 폴 메이슨 같은 기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라 다른 방법(정보 산업의 공유화)으로 자본주의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 사람들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 너무 깊게 얽혔기 때문에 스스로 계급 의식을 각성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저는 크리스 하먼과 폴 메이슨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종합하고 대안을 찾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어쩌면 완전히 보편적인 기본 소득은 노동자 계급들이 의식을 각성하는 디딤돌이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주의자들이 보편적인 기본 소득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에서 한 발자국을 물러설 때, 비로소 계급 의식을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1910년대 미국에서 잭 런던은 이런 대안을 고민하지 못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그때 기본 소득 같은 논의는 별로 활발하지 않았죠.



마지막으로 <강철 군화>는 소비에트 연방 같은 부작용을 상상하지 못했을까요.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러시아 혁명이 소비에트 연방을 잉태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희한하게도 소비에트 연방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파리 코뮨이나 카탈로니아 노동자 군대를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자본가 세력들이 유럽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학살했고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쿠데타와 내전을 계획했다는 점을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유럽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제대로 봉기했다면, 러시아 소비에트의 역사도 바뀌었을 겁니다.


러시아 소비에트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고 부유해진 적이 없습니다. 전쟁에서 많은 것을 잃었고, 전쟁이 끝난 후 내전을 겪었고, 당연히 열악한 사회 인프라는 더욱 열악해졌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 역시 많이 죽었죠. 소비에트 연방은 그런 전쟁과 쿠데타 위에서 등장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소비에트 연방을 잉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본가 세력의 음모와 내전이 소비에트 연방을 잉태했죠. 물론 레닌과 볼셰비키 정당은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분명히 그들은 여러 잘못들을 저질렀어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사회주의를 배신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가 혼자 타락했나요? 우리가 정말 책임을 묻고 싶다면, 러시아 소비에트를 뒤흔들었고 (여전히 수많은 사회 공동체들을 뒤흔드는) 거대 자본들에게 먼저 책임을 물어야 할 겁니다. 희한하게도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습니다. 레닌과 볼셰비키를 비판하고 싶다면, 그 전에 먼저 거대 자본들부터 열심히 비판해야 할 겁니다. 거대 자본들을 놔두고 레닌과 볼셰비키만 비판한다면, 그런 행위는 반쪽짜리 비판과 다를 바 없겠죠.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