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SF 소설과 비디오 게임의 보완(?) 관계 본문
여느 장르처럼 SF 장르는 소설에서 출발했습니다. 그야말로 고전적인 토마스 모어, 초기 작가들인 메리 셸리와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 휴고 건즈백과 에드거 앨런 포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등등 SF 계보는 소설 쪽으로 계속 이어졌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SF 분야에서 제일 유명한 상은 휴고나 네뷸러, 로커스일 겁니다. 사람들은 '휴고 수상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소설을 떠올리곤 합니다. 영화나 게임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그런 사람들보다 소설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다른 소설들처럼 SF 소설에는 큰 장벽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언어의 문제입니다. 소설은 텍스트 매체이고, 따라서 글을 모르면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영화나 게임은 다릅니다. 영화는 영상과 음향이 있기 때문에 관객은 말을 몰라도 영화의 내용이나 분위기를 대충 알아먹을 수 있습니다. 볼거리 위주의 영화라면, 굳이 대사를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을 겁니다. 비디오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텍스트를 중시하는 영화와 비디오 게임도 많겠으나, 적어도 관객은 영상과 음향을 통해 그런 작품들을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그렇지 않아요.
만약 세상의 모든 소설들이 각 나라의 말로 번역이 된다면, 글은 장벽이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SF 작가들은 각종 번역 기계를 설정하지만, 현실에는 아직 그런 번역 기계가 없습니다. 한국 독자가 영국 소설을 읽고 싶다면, 영어를 배워야 합니다. 영국이나 미국은 아주 거대한 SF 시장이지만, 그 나라들의 소설들이 모두 한국에 번역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어 실력이 부족한 한국인도 많습니다. 아무리 영어 열풍이 불어도 영어를 못 하는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저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탐이 나는 작품이 있어도 그저 그림 속의 떡처럼 바라만 봅니다. 우리나라 SF 작가들도 훌륭하고, 여러 해외 SF 소설들이 번역되고, (그래서 아작 같은 출판사가 고맙지만) 아마 영국이나 미국이나 일본에는 훨씬 더 많은 소설들이 있을 겁니다. 영어를 못하는 한국 독자는 그런 소설들의 설정이나 이야기를 일일이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아마 영국에서 엄청나게 화제를 불러 일으킨 스페이스 오페라나 스팀펑크가 있어도 한국 독자는 그걸 전혀 모를 수 있어요.
다행히 인터넷에는 각종 소설 감상문이 올라옵니다. 위키피디아 등은 소설의 간략한 줄거리와 주제, 평가를 설명합니다. 그런 것들을 읽으면, 해당 작품을 대충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SF 분야를 탐구하고 싶다면, 소설이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하는 독자는 유명한 소설들을 일일이 읽지 못합니다. 만약 <블라인드 사이트> 같은 소설이 번역되지 않았다면, 저는 이 소설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블라인드 사이트> 같은 소설을 한글로 읽어도 결코 만만하지 않아요. 이걸 영어로 읽는다고 생각하면…. (으헉.) 이렇게 소설의 장벽에 막힐 때, 좀 더 접하기 쉬운 매체, 그러니까 영화나 비디오 게임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비록 소설이 제일 좋은 방법이지만, 소설을 읽을 수 없다면 차선책을 찾아야죠. 그나마 영화와 비디오 게임은 꾸준히 번역되곤 하고, 텍스트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설사 텍스트의 비중이 높아도 유저 한글 패치 등이 있죠.
물론 영화와 비디오 게임의 상상력은 소설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런 영화와 비디오 게임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도 SF 세계를 탐구하는 방법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을 제끼고 영화와 비디오 게임만 주구장창 달리자는 뜻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도 말했지만, 사람들이 종종 영화나 게임만을 SF 창작물로 취급하는 것 같고, 그게 좀 안타깝습니다. 소설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모습을 보면 아쉬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나 영국이나 일본 소설들을 모두 읽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직진을 할 수 없다면, 우회로를 찾는 게 낫지 않나 싶습니다. 비디오 게임을 플레이하고, 어떻게 그 비디오 게임의 설정이 SF 소설과 이어지는지 살피는 것도 재미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