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Clair de Lune>과 주관적인 해석과 배후 평론 본문
[우아하고 신비로운 그림은 정말 달빛을 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드뷔시가 모스라를 인정하나요?]
어떤 사람들은 클래식 음악 <Clair de Lune>과 모스라를 연결합니다. 아랫집 수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랫집 수진이 이 음악을 들을 때, 아랫집 수진은 저도 모르게 모스라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미소를 짓습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 예고편이 모스라를 정말 예술적으로 연출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평생 동안 아랫집 수진이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아랫집 수진은 우아하고 신비로운 모스라를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모스라를 위해 클로드 드뷔시는 이 음악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클로드 드뷔시는 모스라를 알지 못합니다.
클로드 드뷔시가 모스라를 알지 못했음에도, 아랫집 수진이 클래식 음악과 모스라를 연결할 수 있나요? 많은 사람들은 독자가 작가 의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작가 의도를 따라야 합니다. 만약 독자가 작가 의도에서 벗어난다면, 다른 독자들은 그 독자를 비판할지 모릅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많은 비판들을 받습니다. 문학 평론가들이 독특하고 새로운 해석들을 제시하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은 평론가들을 비판합니다. 이런 독자들은 클로드 드뷔시가 모스라를 알지 못했음에도 아랫집 수진이 <Clair de Lune>과 모스라를 억지로 연결한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클로드 드뷔시는 모스라를 알지 못합니다. 만약 클로드 드뷔시가 1961년 원작 영화를 본다고 해도, 클로드 드뷔시는 이게 무슨 유치뽕짝 인형탈인지 비난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클로드 드뷔시는 1961년 영화 <모스라>를 싫어하고 오직 몬스터버스 모스라만 좋아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클로드 드뷔시가 1961년 <모스라>를 좋아하든 몬스터버스 모스라를 비난하든,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이게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이상합니다. 만약 독자가 작가 의도를 추구해야 한다면, 클로드 드뷔시가 모스라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랫집 수진은 <Clair de Lune>과 모스라를 연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클로드 드뷔시가 몬스터버스 모스라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이게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뒷동네 말자 할머니가 작곡가 의도를 무시하나요? 말자 할머니가 클로드 드뷔시 의도를 무시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배후'를 지적합니다. 모스라는 자연의 여신입니다. '자연의 여신'으로서 모스라는 우아하고 신비롭습니다. <Clair de Lune> 역시 우아하고 신비롭습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어떻게 <고지라: 괴수왕> 예고편과 <Clair de Lune>이 우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지 분석하고 배후(우아하고 신비로움)를 지적합니다.
클로드 드뷔시가 자연의 수호자 모스라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배후'는 훨씬 중요합니다. 어쩌면 어느 날, 더 이상 아랫집 수진은 <Clair de Lune>과 모스라가 어울린다고 느끼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음악 방송이 <Clair de Lune>을 들려준다고 해도, 더 이상 아랫집 수진은 머릿속에 모스라를 떠올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고지라: 괴수왕>에서 모스라는 우아하고 신비로운 자연의 여신이고, 여전히 <Clair de Lune>은 우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아랫집 수진이 무엇을 느끼든, 이건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하지만 아랫집 수진이 무엇을 해석하든, '배후'는 바뀌지 않습니다.
해석, 감성은 주관적이나, 배후는 객관적입니다. 배후는 비단 객관적일 뿐만 아니라 거대합니다. 클로드 드뷔시는 우주 만물을 알지 못합니다. 클로드 드뷔시가 우주 만물을 모두 알지 못하기 때문에, 클로드 드뷔시보다 현실이 훨씬 거대하기 때문에, 클로드 드뷔시가 뭔가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배후를 고려할 수 있습니다. 만약 중세 유럽 문학 속에서 겨울 하늘이 눈송이들을 뿌린다면, 말자 할머니는 지구 자전축 기울기와 지구 공전 때문에 겨울 하늘이 눈송이들을 뿌린다고 '배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중세 문학 작가가 지구 자전축 기울기를 알지 못했다고 해도, 배후로서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공룡 사파리가 파멸한다고 묘사합니다. <쥬라기 공원>은 작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적어도 이슬라 누블라 사람들과 공원 관계자들에게 공원 붕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다르지 않습니다. 반면, 비디오 게임 <쥬라기 공원: 오퍼레이션 제네시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신나고 멋진 공룡 사파리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오퍼레이션 제네시스>에서 신나고 멋진 공룡 사파리는 아주 긍정적입니다. <오퍼레이션 제네시스>가 공원 붕괴와 여러 재난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것들을 방지하고 멋진 공룡 사파리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과 게임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는 대조적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소설 독자들과 게임 플레이어들이 해석할 수 있나요? 공룡 사파리가 생태적인 재앙인가요? 공룡 사파리가 첨단 생물학 볼거리가 되나요? <쥬라기 공원>과 <오퍼레이션 제네시스> 중에서 무엇이 옳은가요? 해석들은 다양할 겁니다. 여러 독자들과 게임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바이오펑크 공룡 사파리에는 '배후'가 있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유전 공학, 생태학,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 환경 운동 같은 것들은 '배후', '생산 조건'이 됩니다. 첨단 공룡 사파리를 논의하기 위해 독자들과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런 배후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해석들은 상대적이나, 이런 배후는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해석은 주관적이나, '배후'는 훨씬 객관적입니다. 배후가 완벽하게 객관적이지 않다고 해도, 적어도 해석보다 배후는 훨씬 객관적입니다. 만약 독자가 배후를 파악한다면, 이건 해석보다 평론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해석과 평론을 혼동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관적인 의견을 내놓고 이것이 평론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론가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평론가 이외에 '일반인들' 역시 주관적인 의견들을 얼마든지 내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문화 예술들은 인생을 반영합니다. 예술가들은 인생들을 관찰하고 이것들을 예술들에 반영합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가 지적한 것처럼, 인생은 무한합니다. 그래서 예술 해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술 해석들은 아주 다양합니다. 심지어 예술 해석들은 대립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인생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예술 해석에 정답이 없기 때문에, 대립적인 해석들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대립적인 해석들이 공존할 수 있다면, 예술 해석에 정답이 없다면, 왜 평론가가 존재해야 하나요? 평론가가 잉여스러운 존재인가요? 만약 평론가가 잉여스러운 존재가 아니라면, 평론가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배후 파악'은 대답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평론가는 배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랫집 수진이 앤 페트리 소설과 SF 소설 <빈티>를 읽고 어떤 유사성을 느낀다면, 이게 이상한 해석이 되나요? 앤 페트리가 SF 소설을 쓰지 않았고, <빈티>에 우주선과 외계인이 나옴에도, 어떻게 아랫집 수진이 유사성을 느낄 수 있나요? 어쩌면 다른 독자들은 아랫집 수진에게 반박할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들은 앤 페트리 소설이 훨씬 낫다고 주장할지 모르고, 어떤 독자들은 <빈티>가 훨씬 감동적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누가 옳은가요? 대립적인 해석들이 공존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정답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배후'를 지적합니다. 앤 페트리는 이른바 할렘 르네상스에 속합니다.
할렘 르네상스는 흑인 예술 부흥을 가리킵니다. 할렘 르네상스 배후에는 사회적인 약자로서 흑인이 있습니다. 은네디 오코라포르가 쓴 소설 <빈티> 역시 흑인 문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앤 페트리 소설과 <빈티>는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앤 페트리를 선호할지 모르고, 어떤 독자들은 은네디 오코라포르를 선호할지 모릅니다. 이건 주관적인 해석들입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약자 흑인은 훨씬 객관적인 배후입니다. 서구 자본주의 때문에, 흑인은 사회적인 약자가 되었고, 여기에서 할렘 르네상스 문학과 (드문 주연으로서 아프리카 흑인 소녀가 나오는) <빈티>는 비롯합니다. 이건 개인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이건 '현실'입니다. 이건 '현실 문제'입니다. 전형적인 사이언스 픽션들이 서구 백인 남자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아랫집 수진은 <빈티>에서 아프리카 흑인 소녀가 두드러진다고 느낍니다. 이건 주관적인 감성보다 현실 문제입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현실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뒷동네 말자 할머니가 "현실에 외계인이 없음에도, 왜 소설 <빈티>가 비일상적인 요소 외계인을 구태여 언급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건 일반적인 문학 평론보다 SF 평론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비단 <빈티>만 아니라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에서 외계인, 인공 지능, 우주 탐사선 같은 비일상적인 요소, 사변은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들이 비일상적인 요소를 중시하나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습니다. 문학은 과장과 비유를 동원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을 이용하고 주제를 과장하고 비유합니다. 오래 전부터 인류 문화가 신화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과학과 신화를 합치고 유사 신화를 만듭니다. 서구 근대화가 수많은 것들을 바꿨기 때문에, 사람들은 시대 격차를 느낍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여기에 주목하고 시대 격차를 계속 이야기하기 원합니다. 자연 환경과 인류 문명은 고정적이지 않고, 서구 근대화가 수많은 것들을 바꾼 것처럼, 자연 환경과 인류 문명은 계속 바뀔 겁니다. 심지어 자본주의조차 바뀔지 모릅니다.
[이런 장면은 다양하고 상대적인 해석들을 내놓을 겁니다. 하지만 세계화 자본주의는 현실 문제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외계인, 인공 지능, 우주 탐사선 같은 비일상적인 요소, 사변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사이언스 픽션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어떤 독자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주제를 훨씬 강조한다고 감탄할지 모릅니다. 대조적인 해석들이 공존할 수 있기 때문에, 양쪽 의견은 모두 옳을 겁니다. 하지만 양쪽 의견이 모두 옳다고 해도,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사이언스 픽션 배후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주류 사회가 사회적인 약자를 너무 배척하고 억압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약자는 사이언스 픽션에 깊게 공감할지 모릅니다. 사회적인 약자는 자신이 돌연변이, 외계인, 이방인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런 깊은 공감은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사회적인 약자가 자신을 돌연변이라고 여긴다고 해도, 이건 그저 개인적인 감성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사회 구조가 너무 불평등하다는 사실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경제 공황을 터뜨리고, 돌봄 노동을 착취하고, 빈부 격차를 극대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류 사회는 사회적인 약자를 너무 배척합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약자는 자신을 돌연변이라고 여기고 사이언스 픽션에 깊이 공감하는지 모릅니다. 이런 공감은 주관적인 해석에 속하나,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현실 문제'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독자는 SF 소설을 읽습니다. 현실에서 SF 독자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을 상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이 뭔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현실, 특정한 사회 구조 속에서 인간은 뭔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만약 현실에서 어떤 문제들이 두드러진다면, 이건 인간 사고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알렉산드르 벨야예프는 생체 개조 소설 <물고기 인간>을 썼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물고기 인간>을 읽고 손발이 다소 오글거린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생체 개조 물고기 인간이 주류 사회와 쉽게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독자에게 <물고기 인간>은 심각할지 모릅니다.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독자는 생체 개조 인간에게 감정을 깊게 이입할지 모릅니다. 이건 평론보다 해석에 가까울 겁니다.
이런 감정 이입은 다른 많은 개인적인 의견들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성 전환 차별은 너무 심각합니다. 인간이 성별을 전환한다고 해도, 이게 자연 생태계를 무너뜨리나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성 전환 수술이 하늘을 무너뜨린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이런 사람들은 무분별한 산업 자본주의가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다고 신봉할지 모릅니다.) 만약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독자가 생체 개조 소설 <물고기 인간>을 심각하게 읽는다고 해도, 이건 그저 개인적인 감상에 불과하나, 성 전환 차별은 개인적인 감상보다 현실 문제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트랜스젠더가 이상하고 미친 사람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물고기 인간>이 트랜스젠더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도,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현실 문제가 배후라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만약 유사성이 평론으로 이어진다면, 무슨 상황에서 이게 가능한가요? 어느 날, 아랫집 수진은 <다섯 번째 계절>을 읽습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초능력자 오로진은 지진을 통제하거나 일으킬 수 있습니다. 배경 무대 고요 대륙은 불안정한 장소입니다. 이름과 달리, 고요 대륙은 절대 고요하지 않습니다. 가끔 고요 대륙은 대격변을 일으키고, 사람들은 대격변을 '다섯 번째 계절'이라고 부릅니다. 왜 고요 대륙이 대격변을 일으키나요? 무분별한 산업 개발이 행성을 너무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무분별한 산업 개발은 행성 환경을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바꾸었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자본주의 환경 오염, 행성 환경 변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느낍니다.
그 날 저녁에 텔레비전 뉴스는 경남 창녕 지진을 보도합니다. 경남 창녕은 규모 3.4 지진을 겪었고, 주변 지역 창원과 김해를 비롯해 대구와 경북 지역 사람들 역시 흔들림을 느꼈습니다. 경북 사람들이 지하를 '보니지' 못한다고 해도, 경북 사람들은 규모 3.4 지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녹색당이 울산 지진을 경계하고 비판 성명을 발표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지진들이 핵 발전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걱정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이런 상황들을 종합하고 <다섯 번째 계절>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아랫집 수진은 이런 상황들과 <다섯 번째 계절>이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이게 주관적인 해석인가요? 이런 유사성이 그저 우연에 불과한가요?
만약 아랫집 수진이 울산 지진, 녹색당 비판 성명, 위험한 핵 발전소, 다섯 번째 계절, 오로진과 조산술, 행성 환경 변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연결한다면, 이게 그저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한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이것들이 핵심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계절>에서 무분별한 산업 개발, 행성 환경 변화는 아주 막대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울산 지진부터 행성 환경 변화까지, 이것들은 단순한 유사성, 단순한 연결 고리보다 생산 조건입니다. 아랫집 수진은 생산 조건으로서 연결 고리를 밝히고, 이건 평론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아랫집 수진이 "어디에서 조산술 같은 사변이 비롯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건 일반적인 평론보다 SF 평론이 될 겁니다.
여기에서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문제를 제시합니다. <다섯 번째 계절>과 핵 발전소 문제와 <쥬라기 공원>이 이어질 수 있나요? 이미 아랫집 수진은 <다섯 번째 계절>과 핵 발전소 문제가 이어진다고 밝혔습니다.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핵 발전소를 짓고, 핵 발전소 붕괴는 자연 환경을 부정적으로 바꾸고 인류 사회에 커다란 피해를 미칠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섯 번째 계절>과 핵 발전소 문제는 이어질 수 있습니다. <쥬라기 공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인젠은 공룡 사파리를 무분별하게 지었습니다. 공룡 사파리는 자연 생태계를 교란할지 모릅니다. 만약 자연 생태계가 어지러워진다면, 인류 사회는 커다란 피해를 받을 겁니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취약하기 때문에, 가난한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은 훨씬 커다란 피해를 받을 겁니다. 미국 백인 자본주의 때문에, 가난한 라틴 아메리카 아줌마들은 커다란 피해를 받을지 모릅니다. <다섯 번째 계절>과 핵 발전소 문제와 <쥬라기 공원>에는 이런 '배후'가 있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아랫집 수진이 "왜 <다섯 번째 계절>과 <쥬라기 공원>이 비일상적인 요소 조산술과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를 구태여 이야기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건 SF 평론이 될 겁니다. 아이언 말콤이 핵 발전소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식민지 수탈을 직접 비판하지 않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쥬라기 공원>은 이런 문제들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쥬라기 공원> '배후'에는 이런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건 현실 문제들입니다. 어쩌면 노라 제미신은 마이클 크라이튼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노라 제미신을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들은 <쥬라기 공원>보다 <다섯 번째 계절>이 훨씬 감동적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독자들은 <쥬라기 공원>과 <다섯 번째 계절>이 모두 황당무계한 헛소리(복제 스테고사우루스와 오로진)를 늘어놓는다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들은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주관적인 해석들보다 현실 문제를 파악하고 어디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 같은 사변이 비롯하는지 묻습니다.
해석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심지어 상황에 따라 해석은 바뀔지 모릅니다. 어느 날, 아랫집 수진은 실연을 겪고 세상이 너무 쓸쓸하다고 느낍니다. 실연 상황에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아랫집 수진은 모든 이별 노래가 자신을 위로한다고 느낍니다. 아랫집 수진은 쓰디쓴 소주잔을 기울이고 여자친구가 부른 <메모리아>를 듣습니다. 평소에 아랫집 수진은 <메모리아>가 무덤덤하고 밋밋하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제 <메모리아>는 절절한 노래가 되었습니다. 은하가 "희미해질 기억이겠지만, 끌어안은 채 강해질게."라고 애절하게 노래할 때, 더 이상 아랫집 수진은 눈물들을 참지 못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노래를 끄고 단편 소설 <오렌지 꽃 필 무렵>을 읽기 시작합니다.
평소에 아랫집 수진은 <오렌지 꽃 필 무렵>이 별로 감동적이라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뒷동네 말자 할머니가 패트리스 머피를 칭찬한다고 해도, 아랫집 수진은 단편 소설 <오렌지 꽃 필 무렵>이 시시하고 밋밋하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오렌지 꽃 필 무렵>은 사정없이 마음을 파고듭니다. 시간 여행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동안, 아랫집 수진은 저도 모르게 눈물 방울들로 책장을 적십니다. 아랫집 수진은 책을 덮으나, 아랫집 수진은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눈물들을 적시고, <메모리아>를 듣고, <오렌지 꽃 필 무렵>을 읽습니다. 이런 상황이 무엇을 뜻하나요? 그 자체로서 노래 <메모리아>와 단편 소설 <오렌지 꽃 필 무렵>이 감동적인가요?
아니면 실연이 정말 아프고 슬픈 마법 주문이기 때문에, 평소와 달리, 아랫집 수진이 <메모리아>와 <오렌지 꽃 필 무렵>을 감동적이라고 느끼나요? 이제 아랫집 수진이 <오렌지 꽃 필 무렵>을 감동적인 SF 소설이라고 인정하나요? 아니면 봄바람이 겨울 눈을 녹이는 것처럼, 언젠가 세월이 아픔을 달래고 상처를 치유할 때, 또 다시 아랫집 수진이 <오렌지 꽃 필 무렵>을 시시하고 밋밋하다고 느낄까요? 은어가 도루묵이 되는 것처럼, <오렌지 꽃 필 무렵>이 시시해져야 하나요? <오렌지 꽃 필 무렵>이 '말짱 도루묵'이 되나요? 상황에 따라 은어가 도루묵이 되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해석이 바뀔 수 있나요?
만약 상황에 따라 해석이 바뀔 수 있다면, 왜 평론가가 존재해야 하나요? 만약 누구나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평론가는 잉여스러운 존재가 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랫집 수진이 <메모리아>를 듣고, <오렌지 꽃 필 무렵>을 읽고, 눈물들을 펑펑 쏟는다고 해도, 이건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실연 속의 눈물들을 안타까워하나, 서글픈 눈물 방울들은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말자 할머니는 훨씬 객관적인 생산 조건, 배후를 파악합니다. 사랑은 타인을 인정해야 합니다. 타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 좌파적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심지어 이런 팬 아트조차 수진의 눈시울을 자극할지 모르나, 서글픈 눈물들이 평론이 될 수 있나요?]
철벽 꼴통 마가렛 대처가 사회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수 우파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합니다. 반면, 좌파는 사회, 수많은 사람들, 타인, 관계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사랑이 좌파적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 격차는 연인을 갈라놓습니다. 시간 격차 속에서 연인은 상대가 타인이라고 훨씬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수많은 로맨스 장르들은 시간 여행 장르를 빌릴 겁니다. 그래서 <오렌지 꽃 필 무렵>은 로맨스에 속하고 시간 여행에 속합니다. 그래서 <메모리아>에서 유주는 "돌고 도는 시간을 단숨에 넘어"라고 노래할 겁니다. <오렌지 꽃 필 무렵>이 감동적이거나 밋밋하다고 해도, 이건 주관적인 해석입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시간 여행 소설이 감동적이거나 밋밋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시간 여행 소설 '배후'를 지적합니다. 이건 개인적인 의견보다 평론이 될 겁니다. 그래서 평론가에게는 가치가 있습니다. "나는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어. 왜 평론가가 이 소설을 비판하지? 나는 재미있었어. 평론가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만약 내가 재미있다면, 이건 장땡일 거야." 아니, 이건 장땡이 아닙니다. 재미에도 '배후'가 있기 때문입니다. 평론가는 '무엇 때문에' 독자가 소설을 재미있게 읽는지 지적합니다. 19세기 보수적인 백인 농장 주인에게 앤 페트리 소설은 씨알도 안 먹힐 겁니다.
이렇게 평론은 '배후'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클로드 드뷔시는 클래식 음악과 모스라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화를 낼지 모릅니다. 아랫집 수진이 모스라를 연상한다고 해도, 이건 주관적인 해석이나,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자연의 여신 모스라와 <Clair de Lune> '배후'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아, 그리고 자연의 여신으로서 모스라는 핵 폐기물을 정화합니다. 만약 뒷동네 말자 할머니가 '배후'를 지적한다면,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울산 지진과 핵 발전소 문제와 <쥬라기 공원>과 <다섯 번째 계절>과 <모스라> 역시 이어질 겁니다. 하지만 어떤 독자들은 이런 연결이 억지, 고집, 엉터리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아니, 뭐야? 어떻게 휴고상 수상 걸작 소설 <다섯 번째 계절>과 썩토 폭망 지수 41%의 블록버스터 <고지라: 괴수왕>이 이어질 수 있지? 나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못해!" 이렇게 어떤 SF 독자들은 외칠지 모릅니다. 네, 이런 심정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류'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마이클 도허티 감독이 혀를 내두른 것처럼, <고지라: 괴수왕>이 썩토 폭망 지수를 달리기 때문에, 어떤 SF 독자들은 유치뽕짝 거대 괴수와 오로진 네 반지 시에나이트를 떨어뜨리기 원할 겁니다. 이런 독자들은 소설 <빈티>와 <다섯 번째 계절>이 훨씬 비슷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섯 번째 계절>과 <고지라: 괴수왕>에게 무분별한 산업 발전, 행성급 환경 오염, 포스트 아포칼립스, 초자연적인 존재(초인과 괴수)는 모두 비슷한 생산 조건이 됩니다. 심지어 <고지라: 괴수왕>이 썩토 폭망 지수 0%를 때려박는다고 해도, 이런 '배후' 관점에서 <다섯 번째 계절>과 <고지라: 괴수왕>은 비슷한 분류가 될 수 있습니다.
※ 그림 <モスラ> 출처: りんこ。,
https://twitter.com/Rinco042/status/1139944071932153856
※ 그림 <메모리아> 출처: yuumk'i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