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AvP>, 파타고니아, 본질적인 특성→이윤 극대화 본문
[윤리적인 기업보다 훨씬 많은 이윤들은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호랑이에게는 길다란 줄무늬들이 있다. 호랑이는 포유류이다. 호랑이처럼, 바다 표범은 포유류이다. 그래서 바다 표범에게는 길다란 줄무늬들이 있을 것이다." 이 추측이 타당한가요? 그건 아닙니다. 이건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이게 타당하지 않나요? 이 추측이 부차적인 차이와 본질적인 특성을 헛갈리기 때문입니다. 호랑이는 포유류입니다. 왜 호랑이가 포유류인가요? 이유가 길다란 줄무늬들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호랑이는 척추 동물에 속합니다. 척추 동물들 중에서 (암컷) 호랑이에게는 젖꼭지가 있습니다. 새끼를 먹이기 위해 (암컷) 호랑이는 모유를 생산합니다.
포유류(mammal)는 '가슴'을 뜻합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포유류입니다. 호랑이처럼, 바다 표범은 척추 동물에 속합니다. (암컷) 호랑이처럼, (암컷) 바다 표범에게는 젖꼭지가 있습니다. 새끼를 먹이기 위해 (암컷) 바다 표범은 모유를 생산합니다. 그래서 바다 표범은 포유류입니다. 척추 동물, 모유. 이건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작은 다람쥐부터 거대한 고래까지, 비단 호랑이, 바다 표범만 아니라 다른 야생 동물들에게도 이 본질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인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자보다 여자는 포유류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포유류를 대표하는 것처럼, 모유는 이 범주를 형성합니다.
모유, 이 본질적인 특성은 포유류, 이 구조적인 범주를 형성합니다. 아무리 호랑이가 포유류라고 해도, 아무리 호랑이에게 길다란 줄무늬들이 있다고 해도, 이 구조적인 범주에서 길다란 줄무늬들은 그저 부차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이 부차적인 차이는 이 구조적인 범주를 형성하지 않습니다. 비단 호랑이만 아니라 다른 포유류들 역시 똑같습니다. 바다 표범에게는 지느러미들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 발들과 지느러미들은 비슷합니다. 바다 표범은 포유류입니다. 바다 표범처럼, 호랑이는 포유류입니다. 그래서 호랑이에게 지느러미들이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건 본질적인 특성이 아닙니다.
지느러미들은 그저 부차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코뿔소에게는 뿔이 있습니다. 코뿔소는 포유류입니다. 코뿔소처럼, 바다 표범은 포유류입니다. 그래서 바다 표범에게 뿔이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건 그저 부차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뿔은 본질적인 특성이 아닙니다. 코뿔소가 척추 동물에 속하기 때문에, (암컷) 코뿔소가 모유를 생산하기 때문에, 이 동물은 포유류입니다. 척추 동물, 모유는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이 특성은 포유류, 이 구조적인 범주를 형성합니다. 다람쥐부터 고래까지, 이 야생 동물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부차적인 차이는 본질적인 특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차적인 차이와 본질적인 특성을 헛갈려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양쪽을 헛갈린다면, 우리는 호랑이에게 지느러미들이 있다고 착각할 겁니다. 만약 우리가 헛갈린다면, 우리는 바다 표범에게 뿔이 있다고 착각할 겁니다. 비단 포유류만 아니라 다른 사례들 역시 똑같습니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는 <마일즈의 전쟁>을 썼습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 소설이 기념비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호평합니다. 앤 레키는 <사소한 정의>를 썼습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 소설이 기념비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호평합니다. 두 '소설'은 스페이스 오페라에 속합니다. 분명히 이건 사실입니다.
<마일즈의 전쟁>, <사소한 정의>가 소설이기 때문에, <마일즈의 전쟁>, <사소한 정의>는 문학에 속합니다. 박상영 작가는 <대도시의 사랑법>을 썼습니다. 이건 단편(중편) 소설입니다. 단편(중편) 소설은 문학에 속합니다. <마일즈의 전쟁>, <사소한 정의>, <대도시의 사랑법>에게 문학(소설)은 커다란 교집합입니다. <마일즈의 전쟁>, <사소한 정의>가 스페이스 오페라이기 때문에, 두 소설이 문학이기 때문에, 두 스페이스 오페라처럼, <대도시의 사랑법>이 문학이기 때문에, 이 단편 소설이 스페이스 오페라인가요? <마일즈의 전쟁>과 달리, 2010년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소설이 아닙니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소설보다 비디오 게임입니다. 소설과 비디오 게임은 다릅니다. 소설과 비디오 게임이 다르기 때문에,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가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닌가요?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보다 <마일즈의 전쟁>, <사소한 정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비슷한가요? 그건 아닙니다. 비록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가 소설이 아니라고 해도, <대도시의 사랑법>보다 <마일즈의 전쟁>, <사소한 정의>,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비슷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떻게 이 비디오 게임과 두 소설이 비슷할 수 있나요? 소설(문학)은 본질적인 특성보다 부차적인 차이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본질적인 특성은 우주 문명, 전쟁, 항해, 모험입니다. 만약 어떤 허구들이 우주 문명, 전쟁, 항해, 모험을 묘사한다면, 이 허구들은 스페이스 오페라들일 겁니다. 우주 문명부터 우주 모험까지, <마일즈의 전쟁>은 이것들을 묘사합니다. 그래서 이건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마일즈의 전쟁>처럼, <사소한 정의>는 우주 문명, 항해, 전쟁을 묘사합니다. 그래서 이건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우주 문명, 전투, 항해, 모험을 묘사합니다. 그래서 이 비디오 게임은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적어도, 스페이스 오페라와 이 비디오 게임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소설과 상관없이, 스페이스 오페라와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비슷합니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와 달리, <대도시의 사랑법>은 우주 문명, 전쟁, 항해, 모험을 묘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대도시의 사랑법>이 문학이라고 해도, 이건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닙니다. 우주 문명, 이 본질적인 특성이 스페이스 오페라, 이 구조적인 범주를 형성하기 때문에, <대도시의 사랑법>보다 <마일즈의 전쟁>, <사소한 정의>,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비슷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사이언스 픽션(SF)에 속합니다. 어떤 SF 독자들은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가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라고 분리할 겁니다. 네, 좋습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와 이 비디오 게임은 비슷합니다.
비록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가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스페이스 오페라와 이 비디오 게임은 비슷합니다. 본질적인 특성(우주 전쟁)이 구조적인 범주(스페이스 오페라)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소설(문학), 비디오 게임은 그저 부차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포유류에게 길다란 줄무늬들이 부차적인 차이이기 때문에, 비록 바다 표범에게 길다란 줄무늬들이 없다고 해도, 호랑이와 바다 표범은 비슷합니다. 바다 표범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비디오 게임이 부차적인 차이이기 때문에, <마일즈의 전쟁>, <사소한 정의>,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비슷합니다.
만약 우리가 부차적인 차이와 본질적인 특성을 헛갈린다면, 우리는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보다 <마일즈의 전쟁>과 <대도시의 사랑법>이 비슷하다고 착각할 겁니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가 증명하는 것처럼, 우리는 부차적인 차이와 본질적인 특성을 구분해야 합니다. 비단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만 아니라 영리 기업들 역시 똑같습니다. 어떤 영리 기업들은 의류들을 판매합니다. 어떤 영리 기업들은 자동차들을 판매합니다. 어떤 영리 기업들은 컴퓨터들을 판매합니다. 어떤 영리 기업들은 먹거리들을 판매합니다. 서비스들처럼, 심지어 어떤 기업들은 무형적인 것들조차 판매합니다.
자동차부터 서비스까지, 이것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이것들이 똑같지 않은 것처럼, 많은 영리 기업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컴퓨터, 먹거리, 서비스는 그저 부차적인 차이들에 불과합니다. 이것들은 본질적인 특성이 아닙니다. 애플과 맥도널드는 다릅니다. 맥도널드와 유니클로는 다릅니다. 유니클로와 20세기 폭스는 다릅니다. 맥도널드부터 20세기 폭스까지, 이것들이 똑같지 않은 것처럼, 많은 기업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기업들에게 본질적인 특성이 없나요? 본질적인 특성이 이 기업들을 분류하지 못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호랑이에게는 길다란 줄무늬들이 있습니다.
바다 표범에게는 길다란 줄무늬들이 없습니다. 분명히 호랑이와 바다 표범은 똑같지 않습니다. 비록 바다 표범에게 길다란 줄무늬들이 없다고 해도, 이건 부차적인 차이입니다. 호랑이, 바다 표범은 구조적인 범주(포유류)에 속합니다. <마일즈의 전쟁>, <사소한 정의>는 소설입니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분명히 <마일즈의 전쟁>, <사소한 정의>와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다릅니다. 하지만 이건 부차적인 차이입니다. 본질적인 특성(우주 문명, 전쟁)은 <마일즈의 전쟁>, <사소한 정의>와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를 분류합니다. 애플과 맥도널드 역시 똑같습니다.
비록 애플이 햄버거를 판매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부차적인 차이입니다. 비록 맥도널드가 노트북을 판매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부차적인 차이입니다. 애플과 맥도널드에게 자본주의는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자본주의 없이, 애플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애플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없이, 맥도널드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맥도널드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애플, 이 영리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윤들입니다. 만약 애플이 이윤들을 축적하지 못한다면, 애플은 망할 겁니다. 애플이 망하기 때문에, 애플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맥도널드, 이 영리 기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윤들입니다. 만약 맥도널드가 이윤들을 축적하지 못한다면, 이 기업이 망하기 때문에, 이 기업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유니클로와 20세기 폭스 역시 똑같습니다. 비록 유니클로가 영화들을 판매하지 않는다고 해도, 비록 20세기 폭스가 의류들을 판매하지 않는다고 해도, 두 영리 기업에게 자본주의는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이 구조 없이, 두 영리 기업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이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에, 두 기업은 존재합니다. 유니클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윤들입니다. 만약 유니클로가 이윤들을 축적하지 못한다면, 유니클로는 망할 겁니다.
유니클로가 망하기 때문에, 이 기업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20세기 폭스가 이윤들을 축적하지 못한다면, 20세기 폭스는 망할 겁니다. 20세기 폭스가 망하기 때문에, 이 기업은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애플부터 20세기 폭스까지, 비단 네 기업들만 아니라 다른 기업들 역시 똑같습니다. 자본주의는 이윤들을 축적하기 위한 구조입니다. 이 구조적인 범주에서 영리 기업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기업들은 이윤들을 축적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들이 이윤들을 축적하지 못한다면, 이것들은 망할 겁니다. 이것들이 망하기 때문에, 이것들은 사라집니다. IMF 사태처럼, 경제 공황은 이것을 증명합니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소설이 아닙니다. 이건 부차적인 차이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소설은 부차적인 차이입니다. 그래서 <대도시의 사랑법>보다 <마일즈의 전쟁>과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비슷합니다. 영리 기업들 역시 똑같습니다. 영리 기업이 컴퓨터들을 판매하든, 판매하지 않든, 햄버거들을 판매하든, 판매하지 않든, 의류들을 판매하든, 판매하지 않든, 영화들을 판매하든, 판매하지 않든, 이것들은 그저 부차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마일즈의 전쟁>,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에게 우주 문명, 전투는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애플과 유니클로에게 자본주의, 이윤 축적 구조는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두 영리 기업은 똑같습니다.
비단 애플, 유니클로만 아니라 다른 많은 영리 기업들에게도 자본주의, 이윤 축적 구조는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이윤들 없이, 영리 기업들은 망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에게 이윤들은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됩니다. 이윤들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에, 이윤들을 축적하기 위해 기업들은 다른 것들을 몰아냅니다. 이윤들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기업들에게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떤 것들이 중요하다고 해도, 이것들보다 이윤들은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리 기업은 오직 이윤들만 축적하기 위한 기계가 됩니다. 자본주의, 이 본질적인 특성이 이윤들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생물 다양성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생물 다양성은 중요합니다. 생태학자들은 생물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설명합니다. 만약 생물 다양성이 위기에 빠진다면, 많은 사람들은 위기에 빠질 겁니다. 2023년 오늘날, 지구 온난화가 위험한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극단적인 기후들은 발생합니다. 극단적인 기후들은 생물 다양성을 파괴합니다. 만약 현재 추세가 바뀌지 않는다면, 미래는 화끈한 기후 지옥일 겁니다. 화끈한 기후 지옥은 훨씬 많은 자연 생태계들을 파괴할 겁니다. 심지어 생태학자들은 대규모 멸종조차 걱정합니다. 4월 25일, 대기 중에서 온실 가스들은 423.65ppm에 달했습니다.
2023년 4월 25일, 마우나 로아 관측소는 지구 대기 중에서 온실 가스들이 423.65ppm에 달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우와~, 이건 새로운 기록입니다. 비록 생태학자들이 대규모 멸종을 걱정한다고 해도, 지구 대기 중에서 온실 가스들은 증가하는 중입니다. 온실 가스들이 증가하기 때문에, 어쩌면 화끈한 기후 지옥은 다가올 수 있습니다. 어쩌면 대규모 생물 다양성 멸종은 다가올 수 있습니다. 대규모 멸종, 화끈한 지옥이 다가오는 것처럼, 아직 인류 문명은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인류 문명이 이 재앙을 해결하지 못하나요? 대답은 너~무 많은 이윤들입니다.
자본주의는 이윤들을 축적해야 합니다. 이윤들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상품들을 판매합니다. 상품들을 만들기 위해 자본주의는 많은 연료들을 태웁니다. 경제 공황이 증명하는 것처럼, 만약 영리 기업들이 이윤들을 축적하지 않는다면, 영리 기업들은 망할 겁니다. 심지어 자본주의조차 망할 수 있습니다. 2008년 금융 대란이 엄청난 혼란이었던 것처럼, 많은 이윤들 없이, 심지어 자본주의조차 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오직 적은 이윤들만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많은 이윤들, 훨씬 많은 이윤들, 훨~~씬 많은 이윤들을 원합니다. 이 구조는 이윤 극대화에게 집착합니다.
2023년, 미국 뱅크런은 경제 공황에 속합니다. 적어도, 마르스크-레닌주의 경제학은 이것이 경제 공황이라고 분석합니다. 만약 이 분석이 타당하다면, 이 뱅크런은 엄청난 혼란으로 이어질 겁니다. 비록 이 뱅크런이 엄청난 혼란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사례들은 경제 공황이 이윤 극대화를 유발한다고 증명합니다. 자본주의가 많은 이윤들, 훨씬 많은 이윤들, 훨~~씬 많은 이윤들을 원하기 때문에, 이 구조는 많은 상품들, 훨씬 많은 상품들, 훨~~씬 많은 상품들을 만듭니다. 그래서 이 구조는 많은 연료들, 훨씬 많은 연료들, 훨~~씬 많은 연료들을 태웁니다. 이건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는 많은 연료들, 훨씬 많은 연료들, 훨~~씬 많은 연료들을 태웁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멈추지 못합니다. 19세기 이후, 자본주의와 화석 연료들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200년 동안, 화석 연료들은 자본주의 기반이었습니다. 이것들이 자본주의 기반이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여전히 자본주의는 화석 연료들을 태웁니다. 자본주의는 많은 화석 연료들, 훨씬 많은 화석 연료들, 훨~~씬 많은 화석 연료들을 태웁니다. 자본주의는 이것을 멈추지 못합니다. 자본주의가 이것을 멈추지 못하기 때문에, 지구 대기 중에서 온실 가스들은 너무 많습니다. 이건 자본주의 문제입니다.
지구 온난화는 자본주의 문제입니다. 자본주의가 이윤 극대화 구조이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는 위험한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만약 환경 운동이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기 원한다면, 환경 운동은 자본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적어도, 환경 운동은 자본주의를 통제해야 합니다. 환경 운동이 자본주의를 타파(통제)하기 전에,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친환경 기업들을 언급할 겁니다. 어떤 기업들은 친환경을 지지합니다. 파타고니아는 대표적인 사례일 겁니다. 파타고니아는 친환경 기업을 대표합니다. 이 기업처럼, 어떤 기업들은 친환경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에게 이 문장은 그저 부차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어떤 기업들이 윤리적인 기업들이라고 믿습니다. 파타고니아처럼, 저는 어떤 기업들이 윤리적인 기업들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부차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어떤 기업들이 윤리적인 기업들이라고 해도, 아무리 어떤 기업들이 친환경을 지지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부차적인 차이들입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훨씬 많은 이윤들에게 집착합니다. 비록 바다 표범에게 길다란 줄무늬들이 없다고 해도, 본질적으로, 포유류에게 길다란 줄무늬들은 부차적인 차이입니다. 비록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가 소설이 아니라고 해도, 소설은 부차적인 차이입니다.
본질적으로, 스페이스 오페라에게 소설은 부차적인 차이입니다. 자본주의 역시 똑같습니다. 아무리 파타고니아가 윤리적인 기업이라고 해도, 이건 본질적인 특성이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훨씬 많은 이윤들을 강요하기 때문에, 훨씬 많은 이윤들은 지배적인 관념이 됩니다. 훨씬 많은 이윤들이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파타고니아와 달리, 많은 기업들은 이윤 극대화에게 집착합니다. 많은 기업들과 이윤 극대화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파타고니아처럼, 모든 영리 기업이 윤리적인 기업들일 수 있나요? 이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이 본질적인 특성이 이윤 극대화를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파타고니아가 윤리적인 기업이라고 해도, 이건 부차적인 차이입니다. 이건 본질적인 특성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특성은 윤리적인 기업보다 이윤 극대화입니다. 우리는 부차적인 차이와 본질적인 특성을 구분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양쪽을 헛갈린다면, 바다 표범에게는 뿔이 있을 겁니다. 음, 이건 우스꽝스럽습니다. 만약 우리가 양쪽을 헛갈린다면,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보다 <대도시의 사랑법>과 스페이스 오페라는 비슷할 겁니다. 아니, <대도시의 사랑법>과 스페이스 오페라는 비슷하지 않습니다. 이 단편 소설보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와 스페이스 오페라는 비슷합니다.
길다란 줄무늬들이 포유류를 대표하지 못하는 것처럼, 소설(문학)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대표하지 못하는 것처럼, 애석하게도, 파타고니아, 이 윤리적인 기업은 자본주의를 대표하지 못합니다. 이 기업보다 이윤 극대화는 자본주의를 대표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윤리적인 기업을 언급한다면, 이 사람들은 <대도시의 사랑법>이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바다 표범에게 뿔이 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동물에게는 뿔이 없습니다. <대도시의 사랑법>보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와 스페이스 오페라는 비슷합니다. 윤리적인 영리 기업은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그저 기업 문제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세계화 자본주의를 주도합니다. 만약 모든 영리 기업이 윤리적인 기업들이라면, 서구 제국주의는 세계화 자본주의를 주도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모든 영리 기업이 윤리적인 기업들이라면, 서구 제국주의는 망할 겁니다. 지배 계급 권력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윤리적인 기업을 언급하기 원한다면, 이 사람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사라지기 전에, 모든 기업은 윤리적인 기업들이 되지 못합니다. 서구 제국주의와 세계화 자본주의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 <한 번 쓸 건가요? 두 번 생각하세요>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MSTk3FY_Wy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