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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19세기 장르 소설들의 짬뽕 - 반 헬싱 본문

감상, 분류, 규정/기타

19세기 장르 소설들의 짬뽕 - 반 헬싱

OneTiger 2017. 5. 4. 20:00

어떤 창작물을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합니다. 누군가는 작가의 성향을 중시할 테고, 누군가는 작품 자체의 주제를 중시할 테고, 누군가는 지리적인 영향을 중시할 겁니다. 또 누군가는 시대상을 중시할 겁니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특정 시기의 소설들을 한데 묶고, 이런 작품들을 서로 비교하거나 검토합니다. 가령, 일제 시대의 소설들은 여러 모로 비교할 점들이 많습니다. 어떤 작가는 저항을 부르짖고, 어떤 작가는 풍자와 해학으로 맞섭니다. 어떤 작가는 그저 아름다운 감수성만 노래합니다.


똑같은 저항 작가라도 성향은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이육사 선생과 윤동주 시인의 면모가 서로 다른 것처럼요. 21세기 독자는 채만식의 <치숙> 같은 소설에서 당시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와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시선 등을 탐구할 수 있고, 이걸 다른 풍자 소설과도 비교할 수 있겠죠. 일제 시대가 너무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일제 시기의 문학'을 따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비단 일제 시대만이 아닐 겁니다. 뭔가 대단한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 시기의 문학들을 비교하는 것도 의미있는 평론이겠죠.



그렇다면 19세기 유럽은 어떨까요. 19세기 유럽은 산업 혁명과 기술 발전과 생산성 향상의 진보적인 시대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19세기는 각종 장르 문학의 영향력이 컸던 시대입니다. 메리 셸리는 사이언스 픽션을 본격적으로 낳은 사람이고, 쥘 베른과 허버트 웰즈는 이를 발전시켰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 역시 사이언스 픽션을 발전시킨 작가지만, 사실 사람들은 아서 코난 도일을 SF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셜록 홈즈를 만들었기 때문이죠. 에드가 앨런 포의 오귀스트 뒤팽과 함께 셜록 홈즈는 19세기 탐정 소설의 문을 열어젖힌 대표적인 탐정 중 하나입니다.


공포 소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조셉 레퍼뉴는 <카르밀라>를 썼고, 브람 스토커는 <드라큐라>를 썼습니다. 뭐, 셜록 홈즈와 드라큐라는 가장 유명한 소설 캐릭터라고 들었습니다. 하필이면 두 캐릭터는 19세기 영국 장르 소설의 캐릭터입니다. 아마 그 당시 영국의 산업 발전과 제국주의 등이 이런 소설들의 뒷받침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런 19세기 장르 문학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 뒤섞고 평가하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흠, 이것들을 짬뽕시킨다면 어떨까요.



<반 헬싱의 놀라운 모험>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반 헬싱을 다룬 2차 창작물이 대부분 그렇듯 유럽을 돌아다니며 괴물을 사냥하는 내용입니다. 배경 설정이 나름대로 진부하면서도 흥미로운데, 유령이나 늑대인간들이 돌아다니며, 흑마법과 저주, 기적을 행하고, 한편으로 로봇을 만들거나 생체 실험까지 행합니다. 덕분에 단순한 고딕 호러가 아니라 스팀펑크 분위기도 물씬 풍겨요. 이 게임의 표지 그림을 장식하는 요소는 수많은 톱니 바퀴입니다. 유저 인터페이스도 톱니바퀴를 응용했고, 사실 오버 테크놀러지가 상당수 등장해요.


실제 19세기 유럽엣는 광학 기구도 변변치 않은 마당에 게임에서는 저격 소총을 쓴다든가, 화염방사기나 독소 발사기를 뿌리거나, 보행 병기가 나오는가 하면, 개조 생체 괴수가 튀어나오죠. 반 헬싱과 스팀펑크의 조합이 꽤나 잘 어울리는데, 이런 시도는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친숙한 영화나 만화의 예시를 들자면, 휴 잭맨이 주연했던 영화도 그랬고, 앨런 무어가 그린 <젠틀맨 리그>도 (헬싱은 이름만 언급되지만) 마찬가지죠. 이른바 스팀펑크 고딕입니다. 보드카 마티니를 젓지 않고 흔드는 것처럼 메리 셸리와 허버트 웰즈와 로버트 스티븐슨과 브람 스토커와 에드거 앨런 포와 조셉 레퍼뉴를 뒤섞은 후에 열심히 흔든다면, 저런 설정이 똭 튀어나올 겁니다.



사실 브람 스토커가 쓴 <드라큐라> 원작은 스팀펑크와 하등 관계없는 소설입니다. 헬싱은 의사이자 과학자, 철학자, 법률가로 나오지만, 전기 충격기를 쓴다거나 자동 소총을 쏜다거나 강화복을 입는다든가 그런 거 없습니다. 애초에 소설 속의 과학 기술 수준은 19세기 무렵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헬싱과 오버 테크놀러지가 어울리는 까닭은 당시 유행했던 SF 소설 때문이겠죠. 19세기 유럽은 SF 소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입니다. 메리 셀리부터 허버트 웰즈, 쥘 베른, 로버트 스티븐슨 등이 기틀을 잡았죠.


브람 스토커가 이때의 SF 소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토커가 일련의 '사이언티픽 로망스'에 관해 어떻게 평가하거나 이야기했는지 잘 모르겠군요. 그런 사료가 있을 것 같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후대 창작가와 독자들은 비슷한 시기의 장르 소설을 혼합하거나 짬뽕하거나 뒤섞어도 그럴 듯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단 고딕 호러와 스팀펑크만 아니라 추리까지 끼어드는 경우도 있죠. 로버트 다우니가 주연한 <셜록 홈즈>를 보세요. 거기도 별별 기괴한 과학 장치들이 등장하는데, 대중이 19세기 장르 혼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반영합니다. 어차피 이런 시도는 예전부터 꾸준히 이어졌으니까요.



팀 파워스, 케빈 제터, 제임스 블레이록 같은 작가들은 자기네 소설을 '스팀펑크'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실 팀 파워스의 소설을 보면, 이건 증기 기관 설정이 아니라 그냥 마법과 공포의 혼합물입니다. <아누비스의 문>을 보세요. 스팀펑크 소설은 어떤 특정한 분야에만 연연하지 않고, 19세기의 그 음습한 분위기와 산업 진보와 제국주의와 그 밖의 모든 것들을 받아들입니다. 게다가 1950~70년대 시절에 해머 영화사의 공포물이 한창 인기를 끌었죠. 해머사는 고딕 호러에 중점을 두었는데, 가장 높은 인기를 끈 시리즈가 드라큐라였습니다. 피터 쿠싱이나 크리스토퍼 리 같은 영국 배우들도 이런 식으로 스크린에 출현했고요. 드라큐라 말고도 다른 공포물도 만들었는데, 프랑켄슈타인이나 미라 시리즈가 유명합니다.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자연히 드라큐라,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등의 조합을 상상했고, 여기에 헬싱까지 끼어들면 스팀펑크 고딕을 짜잔~ 완성할 수 있습니다. 사방에서 전기가 빠지직거리고, 기계 침대에서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일어나고, 반 헬싱이 인조인간과 싸우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벨라 루고시 등의 드라큐라는 스팀펑크와 별 관계가 없고, 덕분에 사람들도 항상 드라큐라를 스팀펑크와 연결하지 않습니다. 드라큐라는 엄청난 인기를 구사했기 때문에 반 헬싱도 리메이크나 팬 픽션의 단골 손님이나, 대부분 19세기 과학 기술이나 의학 지식에 머물죠. 위에서 언급한 만화나 영화, 비디오 게임과 달리 오버 테크놀러지가 밥 먹듯이 튀어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팀 파워스의 사례처럼 이런 스팀펑크는 나름대로 역사를 자랑하죠.



<반 헬싱의 놀라운 모험>에서 재미있는 것이 마법을 조롱하거나 과학을 무조건 이성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과학 또한 흑마법처럼 얼마든지 부정적일 수 있어요.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쓰는가에 따라 달라질 뿐이죠. 게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과학을 저주라며 두려워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미치광이 과학자가 괴물을 만들고, 그 놈들이 마을을 기습했거든요. 심지어 늑대인간 같은 괴물마저 신체 개조를 당하기도 하죠. 하는 짓을 보면, 이 미치광이 과학자는 생물학 전공이 아닐까 싶군요. <반 헬싱의 놀라운 모험>에 영향을 끼친 (스티븐 소머즈와 휴 잭맨의) 영화 <반 헬싱>에서도 드라큐라가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장비를 사악한 용도로 연구했죠. 과학 기술이 괴물을 만들어낸 셈인데, 이거야 19세기 SF 소설이 다들 그랬으니까요.


프랑켄슈타인, 투명 인간, 지킬 박사, 모로 박사, 에디슨(미래의 이브), 살바도르 박사(물고기 인간) 등등 초창기 SF 과학자들 중에는 생물 전공이 많았죠. 아무래도 19세기에는 물리나 화학보다 생물학이 훨씬 다루기 쉬웠고 만만했나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크 판타지의 미친 과학자가 전부 괴악한 의사나 정신병 동물학자는 아니지만, 그런 경향이 짙긴 합니다. 심지어 셜록 홈즈도 야생 영장류의 힘으로 강화(!)된 인물을 추적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셜록 홈즈도 바이오펑크의 반열에 들어오겠군요.



그러니까 저 게임 속에서 반 헬싱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나 투명인간, 지킬 박사, 모로 박사, 트렐론 박사의 잔재와 싸우는 셈입니다. 따지고 보면, 꽤나 재미있는 우연입니다. 아브라함 반 헬싱 본인도 의사니까요. 헬싱이 흡혈귀에 물린 여성을 치료하는 대목도 나오고, 헬싱을 런던으로 부른 수어드 박사도 의사죠. 사냥꾼이지만, 그에 앞서 생물학자인 헬싱이 미친 생물학자가 만든 괴물들과 싸우는 식입니다. 본인의 직업이 생명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휴 잭맨이 나오는 영화도 그렇고, 비디오 게임도 그렇고, 헬싱이 의사로서 어떤 의견을 피력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도 생명체를 직접 주물럭거렸으니, 괴물 창조 작업을 보고 뭐라고 할 법한데…. 이는 액션 영화나 게임이 헬싱의 학자적인 면을 배제하고, 사냥꾼 쪽에만 집착하기 때문이겠죠.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는 영웅이 필요한 거죠. 과학의 위상을 주절거리는 지식인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요. 아예 설정이 달라졌기 때문에 영화판은 가브리엘 반 헬싱으로 나오고, 게임판에는 헬싱의 후손이라고 언급합니다. 어떤 캐릭터가 2차 창작에 이르면 성향이 바뀌는 거야 흔하지만, 헬싱 역시 그게 두드러집니다.



요즘 대세가 혼합/퓨전 장르라서 그런지 고딕 호러 영화를 짬뽕하겠다는 기사도 봤습니다. 2014년 가을에 개봉한 <드라큐라>를 기점으로 늑대인간, 미라, 프랑켄슈타인 등등을 만들겠다고 하던데, 그냥 소문인지 진짜 실행할 건지 모르겠네요. 만약 그런 영화들이 나온다면, <반 헬싱>처럼 스팀펑크 시대에서 활약하는 헬싱 박사가 다시 나올는지 모르죠. 개인적으로 19세기 장르 혼합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반 헬싱>이든 2014년 <드라큐라>든 별로 호응은 없는 편이었지만…. 사실 그 이전에 나왔던 <젠틀맨 리그>도 그리 흥행하지 못했죠.


물론 스팀펑크라는 장르 때문에 실패한 건 아닙니다. 그보다 영화적 완성도와 시나리오의 개연성이 너무 허술한 탓이죠. 음침한 런던, 늑대인간, 스팀펑크는 참 입맛 돋는 조합입니다만, 영화로는 흥행작이 별로 없어서 아쉽습니다. 한편으로 그 당시를 살았던 유럽 작가들이 이런 혼합 창작물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지 궁금합니다. 뭐, 자기들 소설을 가지고 짬뽕했다고 화를 내겠지만…. 혹시 모르죠. 23세기나 24세기의 창작가들은 20세기의 대표적인 SF 작품들을 짬뽕해서 <반 헬싱의 놀라운 모험>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낼지.



※ 올라프 스태플던을 19세기 작가라고 적었군요. 제 실수입니다. 왜 제가 스태플던을 다른 19세기 작가들과 함께 엮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착각하신 분이 계신다면, 사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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