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헤어질 결심>, 생선 (초밥), 핵 발전소 본문
※ 이 게시글은 영화 '헤어질 결심'의 내용들을 누설합니다.
[만약 핵 발전소가 무너진다면, 바다는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스팀펑크 판타지를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소설부터 비디오 게임까지, 이 범주(장르)를 찾기는 아주 쉽습니다. 게다가, 한때, 스팀펑크 판타지는 커~~~다란 인기를 끌었습니다. 홍수처럼, 장르 문학에서 이 소설들은 넘쳤습니다. 이 소설들이 넘쳤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범주(장르)가 지겹다고 토로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토로했던 것처럼, 장르 문학에서 스팀펑크 판타지 소설들은 커다란 인기를 끌었습니다. 비록 이게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해도, 저는 차이나 미에빌이 이 인기를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이 소설가가 '바스-라그 3부작'을 썼기 때문입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상흔>, <강철 의회>를 썼기 때문에, 저는 이 소설가가 스팀펑크 열풍을 주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저와 달리, 어떤 독자들은 동의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이 독자들은 차이나 미에빌이 시발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 소설가가 시발점이든, 아니든, 분명히, 스팀펑크 판타지는 커~~~다란 인기를 끌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토로했던 것처럼, 21세기 초반, 스팀펑크 판타지를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흐음, 그래서 이게 보편적인 범주인가요? 500년 전에, 스팀펑크 판타지를 찾기가 어렵지 않았나요? 1523년, 이 범주를 찾기가 쉬웠나요?
21세기 초반처럼, 1523년, 스팀펑크 판타지가 커~~~다란 인기를 끌었나요? 21세기 초반 소설가들처럼, 1523년 문학 작가들이 스팀펑크 판타지들을 썼나요? 그건 아닙니다. 1523년 문학 작가들은 스팀펑크 판타지들을 쓰지 않았습니다. 어랄라~, 이유가 무엇인가요? 창작(표현)의 자유가 충분하지 않았나요? 이 자유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16세기 문학 작가들이 스팀펑크 판타지들을 쓰지 않았나요? 귀족들이 창작(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나요? 그들이 스팀펑크 판타지를 싫어했나요? 16세기 문명에서 이 범주가 금기 문학이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창작(표현)의 자유는 이유가 아닙니다.
왜 16세기 문학 작가들이 스팀펑크 판타지들을 쓰지 않았나요? 대답은 산업 혁명입니다.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스팀펑크는 증기 기관을 과장합니다. 이 기관은 초기 산업 기술들에 속합니다. 이미 21세기 초반 문명이 19세기 산업 혁명을 거쳤기 때문에, 초기 산업 기술들을 과장하기는 가능합니다. <상흔>은 이 기술들을 과장할 수 있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19세기 산업화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차이나 미에빌만 아니라 다른 소설가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19세기 산업 혁명을 인식하기는 가능합니다. 이게 가능하기 때문에, 초기 산업 기술들을 과장하기는 가능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가들이 19세기 산업 혁명을 인식한다면, 초기 산업 기술들을 과장하기는 가능할 겁니다. 이 소설가들이 이 기술들을 과장할 수 있기 때문에, 스팀펑크 판타지를 쓰기는 가능합니다. 이 소설가들과 달리, 16세기 문학 작가들은 산업 혁명을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16세기 문명이 19세기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문학 작가들이 산업 혁명을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산업 기술들을 과장하기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16세기 작가들은 스팀펑크 판타지들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건 산업 혁명이 스팀펑크의 기원, 생산 조건이라는 뜻입니다.
산업 혁명에서 스팀펑크 판타지는 비롯합니다. 소설부터 비디오 게임까지, 스팀펑크 판타지에게 산업 혁명은 필연적인 기원(생산 조건)입니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문화·예술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특정한 구조(상황)에서 문화·예술은 비롯합니다. 산업 혁명에서 스팀펑크 판타지가 나타나는 것처럼, 특정한 구조(상황)에서 문화·예술은 비롯합니다. 평론가들이 문화·예술을 파악할 때, 만약 그들이 어떻게 문화·예술이 나타나는지 분석하지 않는다면, 이건 얄팍할 겁니다. 스팀펑크 판타지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다르지 않습니다. 특정한 구조(상황)에서 이 범주는 나타납니다.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을 촬영했습니다. 많은 극장 관객들은 이 영화를 호평합니다. <헤어질 결심>에서 박해일은 장해준을 담당합니다. 장해준은 주연 등장인물입니다. 이정현은 안정안을 담당합니다. 이 등장인물은 장해준의 아내입니다. 동시에, 안정안은 핵 발전소의 안전 관리팀 과장입니다. 이 등장인물은 이 발전소를 긍정합니다.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안정안은 핵 발전소가 안전한다고 믿습니다. 어휴~, 이건 모순적인 믿음입니다. 장해준이 담배를 태우기 원할 때, 안정안은 질겁합니다. 비록 이 등장인물이 담배를 싫어한다고 해도, 이 등장인물은 핵 발전소가 안전하다고 믿습니다.
핵 발전소와 담배 연기 중에서 어떤 것이 훨씬 위험한가요? 쓰리 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 비극이 증명하는 것처럼, 담배 연기보다 핵 발전소는 훨씬 위험합니다. 이게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나타납니다. 이 범주는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고 묘사합니다. 왜 인류 문명이 무너지나요? 이유들은 다양합니다. 외계인들이 침략하기 때문에, 운석이 충돌하기 때문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기 때문에, 지구 가열화가 위험한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에, 고지라가 상륙하기 때문에, 인공 지능이 인간들을 위협하기 때문에, 기타 등등…. 이 이유들처럼, 핵 발전소, 핵 전쟁은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핵 발전소는 끔찍한 결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로 연결됩니다.]
<스토커> 3부작은 비디오 게임들입니다. 이 비디오 게임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입니다. 특히, <스토커> 3부작은 핵 아포칼립스에 속합니다. 핵 발전소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건 이상 현상들을 유발했습니다. 심지어 무서운 돌연변이들조차 사람들을 습격합니다. 핵 발전소가 무너졌기 때문에, <스토커>는 핵 아포칼립스에 속합니다. 이 비디오 게임들처럼, 많은 허구(픽션)들은 핵 아포칼립스에 속합니다. <스토커>가 유명한 것처럼, 많은 허구(픽션)들이 핵 아포칼립스에 속하는 것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핵 아포칼립스는 커다란 부분입니다. 핵 발전소가 무너지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무너집니다. 담배 연기보다 핵 발전소는 인류 문명을 파괴합니다.
<스토커>는 핵 발전소가 안전하지 않다고 반영합니다. 핵 발전소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심지어 무서운 돌연변이들조차 사람들을 습격합니다. 심지어 무서운 돌연변이들조차 사람들을 습격하는 것처럼, 핵 발전소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담배는 어떤가요?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담배 아포칼립스를 포함하나요? <스토커>가 핵 아포칼립스인 것처럼, 어떤 허구들이 담배 아포칼립스들인가요? <스토커>가 유명한 것처럼, 담배 아포칼립스들이 유명한가요? <스토커>가 커다란 인기를 누리는 것처럼, 담배 아포칼립스들이 커다란 인기를 누리나요?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담배 아포칼립스가 커다란 부분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이 아포칼립스는 유명하지 않습니다.
SF 독자들은 핵 아포칼립스가 유명하다고 인정할 겁니다. 핵 아포칼립스와 달리, SF 독자들은 담배 아포칼립스가 유명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스토커>는 핵 아포칼립스가 유명하다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스토커>와 달리, 담배 아포칼립스를 증명하기 위한 허구들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담배 아포칼립스보다 <스토커>가 유명한 것처럼, 담배 연기보다 핵 발전소는 훨씬 위험합니다. 심지어 안정안조차 담배 아포칼립스들을 내세우지 못합니다. 비록 이게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안정안은 담배 연기를 질겁합니다. 담배와 달리, 이 등장인물은 핵 발전소를 질겁하지 않습니다. 어휴~, 안정안은 핵 발전소가 안전하다고 착각합니다.
비록 담배 연기보다 핵 발전소가 훨씬 위험하다고 해도, 안정안은 핵 발전소보다 담배 연기를 질겁합니다. 이 모순적인 믿음처럼, <헤어질 결심>은 핵 발전소를 비판하는지 모릅니다. 비단 안정안만 아니라 장해준 역시 비슷합니다. 장해준이 특정한 생선 초밥을 먹는 것처럼, <헤어질 결심>은 이 등장인물이 이 먹거리를 좋아한다고 암시합니다. 그래서 장해준은 송서래에게 생선 초밥을 건넸을 겁니다. (장해준이 송서래를 의심했을 때, 이 등장인물은 핫도그를 건넸습니다.) 핵 발전소는 해산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후쿠시마 비극은 이것을 증명합니다. 이 핵 발전소가 무너졌을 때, 많은 남한 사람들은 일본 해산물들을 거부했습니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가 무너졌을 때, 심지어 일본 사람들조차 일본 해산물들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먹어서 응원하자!(食べて応援しよう!)"는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만약 일본 사람들이 일본 해산물들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이 문장은 유행어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먹어서 응원하자!"가 유행어가 되었던 것처럼, 핵 발전소는 해산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장해준은 생선 초밥을 좋아합니다. 안정안은 핵 발전소에 속합니다. 생선 초밥은 해산물입니다. 비단 생선 초밥만 아니라 다른 많은 먹거리들 역시 해산물에 속합니다. 명태(대구)전부터 간장 게장까지, 과메기·미역부터 김부각까지, 많은 먹거리들은 해산물들입니다.
핵 발전소는 해산물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이 발전소가 무너질 때, 바다 생명체들은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핵 발전소와 해산물들은 대립합니다. 장해준이 생선 초밥을 좋아하기 때문에, 안정안이 핵 발전소를 긍정하기 때문에, 장해준(해산물)과 안정안(핵 폐기물)은 대립합니다. <헤어질 결심>에서 탕웨이는 송서래를 담당합니다. 장해준과 송서래가 대립하나요? 송서래는 담배를 태웁니다. 담배 연기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이건 담배 연기가 안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담배 연기보다 핵 발전소가 훨씬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스토커>는 핵 아포칼립스입니다. <스토커>와 달리, 담배 아포칼립스는 유명하지 않습니다.
담배 아포칼립스보다 <스토커>가 훨씬 유명한 것처럼, 담배 연기보다 핵 발전소는 훨씬 위험합니다. 비록 송서래가 담배를 태운다고 해도, 안정안과 달리, 송서래는 핵 발전소에 속하지 않습니다. 안정안과 달리, 송서래는 모순적인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핵 발전소는 장해준과 안정안을 분리할 수 있습니다. 안정안과 달리, 핵 발전소는 장해준과 송서래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어떤 극장 관객들은 장해준이 핵 발전소를 믿는다고 주장하는지 모릅니다. "원전은 완전 안전합니다." 이 대사가 장해준이 핵 발전소를 믿는다고 보여주나요? 흐음, 이 대사는 진지하지 않습니다. 이 대사는 너무 썰렁하고 다소 어색합니다.
"원전은 완전 안전합니다." 이 대사는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임기응변에 가깝습니다. 극장 관객들은 이 대사가 진지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이 대사가 너무 썰렁한 것처럼, 이 대사는 장해준이 핵 발전소를 믿는다고 반영하지 않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이 등장인물이 핵 발전소를 믿는다고 암시하지 않습니다. 만약 극장 관객들이 생선 초밥을 고려한다면, 장해준과 안정안이 대립한다고 해석하기는 가능할 겁니다. 송서래는 어떤가요? <헤어질 결심>은 송서래가 바다에 가깝다고 비유합니다. 심지어 마지막 장면조차 송서래가 바다라고 비유합니다. 핵 발전소는 바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돌연변이들처럼, 핵 발전소는 위험합니다.]
핵 발전소가 바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송서래가 바다에 가깝기 때문에, 핵 발전소는 송서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안정안은 핵 발전소를 믿습니다. 장해준과 핵 발전소는 대립합니다. 이건 장해준과 안정안이 대립한다는 뜻입니다. 안정안과 달리, 장해준과 송서래는 대립하지 않습니다. 장해준이 생선 초밥을 좋아하기 때문에, 송서래가 바다에 가깝기 때문에, 양쪽은 어울립니다. 양쪽이 어울리기 때문에, 송서래와 함께, 장해준은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송서래와 달리, 안정안과 함께, 장해준은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합니다. 안정안보다 송서래는 훨씬 안전합니다.
장해준과 안정안은 부부입니다. 아무리 두 등장인물이 부부라고 해도, 안정안보다 송서래는 편안한 잠(휴식)입니다. <헤어질 결심>은 안정안보다 장해준, 송서래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핵 발전소보다 생선 초밥과 바다가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안정안은 핵 발전소입니다. 장해준은 생선 초밥입니다. 송서래는 바다입니다. 핵 발전소보다 생선 초밥과 바다가 어울리기 때문에, <헤어질 결심>은 안정안보다 장해준, 송서래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스토커>는 안정안보다 장해준과 송서래가 어울린다고 뒷받침니다. <스토커>처럼, 다른 핵 아포칼립스들은 이 관계를 뒷받침합니다.
2014년 <고지라>는 핵 아포칼립스가 아닙니다. <스토커>와 달리, 이 영화는 거대 괴수 이야기입니다. 비록 <고지라>가 핵 아포칼립스가 아니라고 해도, 이 영화는 핵 발전소가 무너진다고 보여줍니다. 무토는 핵 동력을 노립니다. 이 동력에서 이 괴수는 탄생합니다. 무토는 인류 문명을 무너뜨릴 겁니다. 만약 고지라가 무토를 막지 않는다면, 인류 문명은 석기 시대로 퇴보할 겁니다. 비록 <고지라>가 핵 아포칼립스가 아니라고 해도, 이 영화는 핵 발전소를 긍정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무토와 핵 발전소는 비슷합니다. 무토가 인류 문명을 파괴하는 것처럼, 핵 발전소는 위험합니다.
<스토커>처럼, <고지라>는 안정안보다 장해준과 송서래가 어울린다고 뒷받침합니다. 이 관점에서 무토와 안정안은 다르지 않습니다. 무토가 핵 발전소인 것처럼, 안정안은 핵 발전소입니다. 무토가 인류 문명을 파괴하기 때문에, 핵 발전소가 위험하기 때문에, 안정안은 부정적인 등장인물입니다. 이 부정적인 등장인물과 달리, 생선 초밥(장해준)과 바다(송서래)는 어울립니다. 하지만, 이게 박찬욱 감독의 의도인가요? <헤어질 결심>이 핵 발전소가 바다를 오염시킨다고 비판하나요? 이 영화가 핵 발전소에 반대하나요? 음,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이 핵 발전소에 반대한다고 의도했나요?
정서경 작가는 어떤가요? 비단 박찬욱 감독만 아니라 정서경 작가 역시 이 영화 대본을 썼습니다. 이 작가가 핵 발전소에 반대하나요? 정서경 작가가 <헤어질 결심>이 핵 발전소에 반대한다고 의도했나요? 만약 박찬욱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다면, 극장 관객들이 <헤어질 결심>이 핵 발전소에 반대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되나요? 만약 정서경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다면, 극장 관객들이 이 영화가 핵 발전소에 반대한다고 해석하지 못하나요? 비록 박찬욱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비록 정서경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21세기 초반 오늘날, 핵 발전소와 바다 생명체들은 대립합니다.
비록 박찬욱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비록 정서경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문명(사회)과 문화·예술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산업 혁명에서 스팀펑크가 비롯하는 것처럼, 문화·예술보다 문명(사회)은 우선합니다. 2024년, 환경 운동은 핵 발전소를 비판합니다. 이 운동에서 이른바 탈핵은 커다란 부분입니다. 비단 환경 운동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핵 발전소가 위험하다고 인식합니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가 무너졌을 때, 많은 남한 사람들은 일본 해산물들을 걱정했습니다. 21세기 초반 사회에서 비단 환경 운동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핵 발전소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이 일본 해산물들을 걱정했던 것처럼, 남한 사회에서 핵 발전소는 커다란 화제입니다. 핵 발전소가 커다란 화제이기 때문에, 이건 해석하기 위한 기준이 됩니다. <헤어질 결심>이 핵 발전소를 보여주는 순간, 어떤 극장 관객들은 환경 운동을 머릿속에 떠올렸을 겁니다. 이 관객들이 환경 운동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왜 이 관객들이 환경 운동을 머릿속에 떠올리나요? "원전은 완전 안전합니다." 극장 관객들이 이 썰렁한 대사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환경 운동을 머릿속에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문명에서, 이미 탈핵이 중요한 논의이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문학 작가들은 스팀펑크 판타지들을 쓰지 못했습니다. 16세기에서 스팀펑크 판타지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16세기 문학 작가들은 이 범주를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생산 조건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문학 작가들과 달리, 21세기 초반, 차이나 미에빌은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을 씁니다. 비단 이 소설가만 아니라 다른 소설가들 역시 스팀펑크 판타지들을 쓸 수 있습니다. 이미 21세기 초반 문명이 19세기 산업 혁명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특정한 구조(상황)에서 문화·예술이 비롯한다'고 증명합니다. 문화·예술처럼, 해석은 비슷합니다.
[핵 발전소와 이 생명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탈핵 논의를 인식합니다. 쓰리 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처럼, 핵 발전소들이 무너졌기 때문에, 탈핵은 커다란 화제가 됩니다. 탈핵이 커다란 화제이기 때문에, 이건 구조가 됩니다. 이 구조 내부에서 극장 관객들은 <헤어질 결심>을 해석합니다. 이미 구조가 성립하기 때문에, 구조는 해석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비록 정서경 작가가 탈핵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 작가는 탈핵이 커다란 화제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합니다. 정서경 작가가 탈핵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서경 작가와 상관없이, 이미 남한 사회에서 탈핵은 구조가 됩니다.
이 구조에서 극장 관객들이 해석하기 때문에, 이 구조는 해석에게 영향을 미칠 겁니다. 뭐라고 정서경 작가가 의도했든, 이 작가는 탈핵이 중요한 논의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합니다. 초기 산업 사회에서 스팀펑크 판타지가 비롯하는 것처럼, 이미 탈핵이 구조가 되기 때문에, 이 구조에서 해석은 비롯할 수 있습니다. 이건 정서경 작가 의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작가는 <헤어질 결심>을 해석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기준입니다. 의도에서 문화·예술이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서경 작가가 대본을 쓰지 않았다면, <헤어질 결심>, 이 문화·예술은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정서경 작가가 대본을 썼기 때문에, <헤어질 결심>은 이 작가에게 종속됩니다. 만약 정서경 작가가 탈핵을 의도하지 않았다면, <헤어질 결심>이 이 작가에게 종속되기 때문에, 극장 관객들은 이 의도를 존중해야 합니다. 극장 관객들은 '필연적으로, <헤어질 결심>은 핵 발전소를 비판한다'고 해석하지 못합니다. 이건 과잉 해석입니다. 비록 이게 과잉 해석이라고 해도, 정서경 작가보다 구조는 훨씬 거대합니다. 이미 남한에서 탈핵은 구조입니다. 정서경 작가는 이 구조를 허물지 못합니다. 이 구조에서 정서경 작가는 대본을 썼습니다. 이 구조에서 관객들은 영화를 해석합니다.
비록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을 촬영하지 않았다고 해도, 비록 이 실사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다고 해도, 여전히, 탈핵, 이 구조는 존재했을 겁니다. 2011년 4월, <헤어질 결심>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 영화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2011년 4월, 탈핵은 커다란 화제였습니다. <헤어질 결심>보다 이 구조는 거대(우선)합니다. 이 구조가 우선(거대)하기 때문에, 초기 산업 사회에서 스팀펑크 판타지가 비롯하는 것처럼, 이 구조(탈핵)는 해석(핵 발전소와 바다 생명체들은 대립한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관객들은 핵 발전소가 위험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스토커>가 무서운 돌연변이들을 묘사하는 것처럼, 무토와 핵 발전소가 비슷한 것처럼, 핵 발전소는 위험합니다. 비록 이게 위험하다고 해도, 이것을 폐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자본주의는 핵 발전소를 유지하기 원합니다. 훨씬 많은 돈들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핵 발전소가 너무 위험하다고 해도, 이 위험한 것과 헤어지기 위해 자본주의는 결심하지 않습니다. 훨씬 많은 돈들을 벌기 위해 이 악랄한 경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만약 환경 운동이 핵 발전소들을 폐쇄하기 원한다면, 이 운동은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 사진 <Photo of a Crab …> 출처: Kutlay Uyar,
http://www.pexels.com/photo/photo-of-a-crab-on-the-sand-10870454/
※ 게임 <S.T.A.L.K.E.R.: Call of Pripyat> 스크린샷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41700/STALKER_Call_of_Pripyat/
※ 사진 <Underwater … Fish> 출처: Francesco Ungaro,
http://www.pexels.com/photo/underwater-photography-of-fish-3361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