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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유성> 번외편에서 주변 관계 변화 본문

사회주의/사회 공학

<한낮의 유성> 번외편에서 주변 관계 변화

OneTiger 2019. 10. 21. 20:17



야마모리 미카가 그린 <한낮의 유성>은 고등학교 로맨스 만화입니다. 전형적인 고등학교 로맨스 만화로서 <한낮의 유성>에는 두 남자 주인공이 있습니다. 세계 역사 선생님 시시오 사츠키는 메인 남주이고, 학급 친구 마무라 다이키는 서브 남주입니다. 만화 주인공 요사노 스즈메는 두 남자 등장인물과 함께 알콩달콩 두근두근 장면들을 연출합니다. 하지만 어떤 만화 독자들은 요사노 스즈메와 시시오 사츠키보다 '사메지마 & 시시오' 커플을 응원합니다. 사메지마는 번외편 등장인물입니다. <한낮의 유성> 번외편에서 사메지마와 시시오는 엇갈리고, 스쳐 지나가고, 어울립니다.


어떤 만화 독자들은 본편보다 번외편 전개를 훨씬 좋아합니다. 심지어 사메지마와 시시오 커플을 엮기 위해 이런 팬 만화(링크)까지 존재합니다. 왜 독자들이 사메지마와 시시오를 응원하나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으나, '어른으로서 분위기' 역시 커다란 이유가 될지 모릅니다. 스즈메 및 마무라와 달리, 시시오와 사메지마는 어른입니다. 특히, 사메지마는 어른 분위기를 사방에 풀풀 풍깁니다. 스즈메와 다이키가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만약 시시오가 스즈메 및 마무라와 어울린다면, 시시오 역시 미숙한 분위기를 풍길 겁니다. 이런 미숙한 분위기는 어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시시오 사츠키는 어른입니다. 어른으로서 시시오는 미숙한 분위기보다 성숙한 분위기를 풍겨야 합니다. 시시오가 사메지마와 어울릴 때, 사메지마가 성숙한 분위기, 아주 농익은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어른으로서 시시오 역시 이런 분위기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시시오 '선생님'이 어른이기 때문에, 어쩌면 스즈메 및 마무라보다 시시오는 사메지마와 훨씬 어울리는지 모릅니다. 본편에서 시시오가 스즈메 및 마무라와 어울리기 때문에, 시시오는 어른으로서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시시오가 사메지마와 어울리는 동안, 시시오는 어른으로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시시오가 어른으로서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시오가 사메지마와 대화하고, 술을 마시고, 데이트(?)하는 동안, 시시오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시시오가 어른이기 때문에, 시시오와 사메지마는 어울릴 수 있습니다. 만약 마무라 다이키가 사메지마와 함께 비슷한 장면들을 연출한다면, 이건 어색할 겁니다. 미숙한 마무라와 농익은 사메지마는 너무 어색합니다. 사메지마 덕분에, 번외편에서 시시오는 새로운 모습, 성숙한 분위기를 풍길 수 있습니다. 사메지마 덕분에, 시시오는 자신을 새롭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사메지마와 시시오를 응원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주관적인 느낌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모든 만화 독자가 여기에 동의하나요? 번외편에서 사메지마 덕분에, 시시오가 농익은 어른이 된다고 해도, 모든 만화 독자가 이것을 느끼나요? 모든 만화 독자가 시시오가 훨씬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고 인정하나요? 어떤 독자들은 번외편에서 시시오가 바뀌지 않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런 독자들은 본편과 번외편에서 시시오 사츠키가 똑같다고 느낄 겁니다. 시시오 사츠키가 누구를 상대하든, 시시오 '선생님'이 요사노 스즈메 및 마무라 다이키를 상대하든, 시시오가 '성숙한 어른으로서' 사메지마를 상대하든, 이런 독자들은 시시오가 똑같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이런 독자들이 시시오가 똑같다고 느낀다고 해도, 분명히 고등학교 여학생과 어른 여자는 다릅니다. 시시오가 스즈메를 상대할 때, 시시오가 사메지마를 상대할 때, 양쪽은 다른 관계입니다. 미숙한 분위기, 농익은 분위기는 그저 주관적인 감정에 불과한지 모르나, 관계 변화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요사노 스즈메는 절대 술을 마시지 못하고 인생 경험을 늘어놓지 못합니다. 아무리 스즈메가 굳게 결심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반면, 사메지마는 가능합니다. 심지어 번외편에서 종종 사메지마는 시시오를 휘어잡는 것 같습니다. 시시오가 능글맞게 웃는다고 해도, 오히려 사메지마는 시시오를 전염(?)시킵니다.



현실 속에서 요사노 스즈메와 마무라 다이키와 시시오 사츠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메지마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네 사람들은 그저 만화 속의 등장인물에 불과합니다. 만화는 창작물이고, 창작물은 수많은 의미들을 내포합니다. 많은 독자들은 이 게시글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 게시글 주장에 강하게 반박할 겁니다. 이런 다양한 해석들에는 다양한 근거들이 있을 겁니다. 다양한 근거들에는 논리적인 이유들이 있을 겁니다. 만화 독자들이 대조적인 의견들을 내놓는다고 해도, 대조적인 의견들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한낮의 유성>은 현실이 아닙니다. 요사노 스즈메와 마무라 다이키와 시시오 사츠키는 현실이 아닙니다. 사메지마 역시 현실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서 <한낮의 유성>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만화 역시 존재합니다. 만약 독자들이 <한낮의 유성>을 평가하기 원한다면, 독자는 비단 만화만 아니라 생산 조건을 함께 평가해야 할 겁니다. <한낮의 유성> 본편의 스즈메와 시시오 사이에서 커다란 갈등들 중에서 하나는 선생님과 제자 관계입니다. 비단 <한낮의 유성>만 아니라 다른 많은 로맨스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에서 선생님과 제자 관계는 중요한 소재입니다. 아니, 로맨스 장르에서 비단 선생님과 제자만 아니라 여러 사회 관계들은 연애 노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로맨스 장르에서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은 아주 흔한 소재입니다. 수많은 로맨스 장르들은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스즈메와 시시오, 사메지마와 시시오 사이에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만화 독자들은 로맨스 장르에서 관계가 중요하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스즈메와 시시오, 사메지마와 시시오 사이에서도 만화 독자들은 관계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해도, 이건 상당히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지 모릅니다. 본편과 번외편, 스즈메와 사메지마 사이에서 가장 커다란 차이가 무엇인가요? 스즈메는 제자 관계입니다. 반면, 사메지마는 이웃 여자입니다. 사메지마는 어른이고 로맨스 만화 편집장입니다. 사메지마에게는 (스즈메에게 없는) 연륜이 있습니다.


이런 차이들은 연애 노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그래서 본편과 번외편에서 시시오 사츠키 역시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지 모릅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본편과 번외편에서 이건 가장 커다란 차이입니다. 관계는 연애 노선에 영향을 미칩니다. 로맨스 장르에게 이건 중요한 생산 조건입니다. 비단 <한낮의 유성>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로맨스 창작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독자가 이런 시점을 이용해 스즈메와 시시오, 사메지마와 시시오를 바라본다면, 독자는 관계 때문에 시시오가 바뀌었다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주변 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시시오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어떤 로맨스 독자들은 <한낮의 유성> 같은 사제 관계 이야기를 싫어합니다. 사회적인 분위기가 선생님과 (고등)학생의 연애, 사랑, 결혼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한낮의 유성>은 일본 만화이나, 국내 분위기 역시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최인석이 쓴 10대 성장 소설 <약탈이 시작됐다>처럼, 만약 남자 선생님이 여자 고등학생과 연애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게 원조 교제라고 몰아붙일 겁니다. 어쩌면 시시오 사츠키는 이런 손가락질들을 두려워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시오 사츠키가 요사노 스즈메를 정말 좋아한다고 해도, 시시오는 스즈메에게 깊게 다가가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독자는 물어볼 수 있습니다. 왜 남자 선생님이 여자 고등학생과 연애하지 못하나요? 시시오가 사메지마에게 당연하게 다가감에도, 왜 시시오가 스즈메에게 똑같이 다가가지 못하나요? 남자 선생님과 여자 고등학생의 연애가 범죄인가요? 성별과 관계없이, 선생님과 고등학생의 연애가 범죄인가요? 고등학생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하지만 왜 미성년자가 '미성년자'인가요? 하늘에서 미성년자가 뚝 떨어지나요? 그 자체로서 요사노 스즈메를 비롯해 수많은 미성년자들이 자동적으로 미성년자 딱지를 붙여야 하나요? 고등학생이 연애하지 못하는 것처럼, 고등학생은 투표하지 못합니다.



만약 고등학생이 투표한다면, 이건 사회적인 약속을 위반할 겁니다. 하지만 왜 고등학생이 투표하지 못하나요? 고등학생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합의했나요? 사회 구성원들이 고등학생이 연애해서는 안 되고 투표해서는 안 된다고 합의했나요? 무슨 사회 구조 속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했나요? 우리에게 합의 계약서가 있나요? 어디에 있나요? 이렇게 만화 독자는 어떻게 인간이 특정한 성향, 위치, 지위가 되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사회 관계는 중요합니다. 관계는 인간을 바꿉니다. 사회 관계는 인간을 바꿉니다. 관계 때문에, 시시오가 달라지는 것처럼, 관계 때문에, 사람들은 달라집니다. 심지어 이건 엄청난 비극이 됩니다. 우리가 가난한 흑인 여자를 바라볼 때, 우리는 저도 모르게 노예를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가난한 흑인 여자는 노예 같습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가난한 흑인 여자를 노예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나요? 깜둥이에게 노예 근성이 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흑인, 여자가 열등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태생적인 이유'를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비극에게 태생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태생적으로 조신하고, 남자는 태생적으로 공격적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중요한 업무를 맡아야 하고, 여자는 남자를 보조해야 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공격하고 폭행한다고 해도, 이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왜? '태생적으로' 남자가 공격적이고 여자가 조신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태생적입니다. 이건 당연합니다. 당연히 남자는 여자를 공격하고 폭행해야 합니다. 여자가 태생적으로 조신하기 때문에, 당연히 조신한 여자는 공격적인 남자를 감싸줘야 합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진화 생물학을 덧붙이고 이런 태생적인 이유가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 공동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이 '태생적으로' 탐욕스럽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탐욕스럽게 진화했고, 그래서 사회주의 공동체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비난할 때, 이런 진화 생물학은 주된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정말 인간이 '태생적으로' 탐욕스러운가요? 정말 여자가 '태생적으로' 조신한가요? 정말 흑인이 '태생적으로' 열등한가요? 여기에서 우리는 태생적인 이유보다 '관계'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사회 관계들을 맺습니다. 사회 관계 없이,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관계로서 인간은 존재합니다. 아무리 태생적인 측면들이 중요하다고 해도, 사회적인 관계 없이,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태생적인 측면들보다 사회적인 관계는 훨씬 중요한지 모릅니다. 태생적인 측면 때문에, 흑인이 노예인가요? 흑인에게 노예 근성이 유전 형질이기 때문에, 흑인이 백인을 떠받들어야 하나요?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태생적인 측면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노예 제도입니다. 노예 제도 때문에,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사회 관계 때문에, 흑인은 노예가 됩니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가부장 문화는 여자들을 돌봄 노동들에 억지로 밀어넣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고 개무시합니다. 결국 여자들은 보조적인 인간이 됩니다. 노예 제도가 착취인 것처럼, 가부장 문화는 착취입니다. 노예 제도 사회에서 흑인이 착취를 당하는 것처럼,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는 착취를 당합니다. 노예 제도 사회에서 피지배 계급 흑인이 보조적인 인간, 열등한 인간이 되는 것처럼, 가부장 문화 속에서 피지배 계급 여자는 보조적인 인간, 열등한 인간이 됩니다. 사회주의 혁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예 제도와 가부장 문화처럼,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착취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식민지 수탈을 왜곡하고 미화하고 은폐합니다. 멍청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인디언 학살과 러다이트 운동이 똑같은 폭력이라고 왜곡합니다. 아이고, 세상에…. 인디언 학살과 러다이트 운동이 똑같다니….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어떻게 식민지 수탈을 왜곡하기 위해 이런 멍청한 헛소리를 지어낼 수 있나요? 이런 헛소리 이외에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온갖 헛소리들을 쏟아내고 식민지 수탈을 왜곡합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착취, 수탈, 오염이라고 말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감추기 원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착취입니다. 노예 제도와 가부장 문화처럼, 자본주의는 착취입니다.



<섀도우런>이 말하는 것처럼, 임금 노동 제도는 임금 노예 제도입니다.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에게 가부장 문화는 본질입니다. 이런 착취 속에서 사람들은 탐욕스럽게 바뀌어야 합니다. 아무리 성인군자가 평화롭게 살기 원한다고 해도, 성인군자는 탐욕에 물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회사 사장이 너그럽게 직원들을 대하기 원한다고 해도, 회사 사장은 악당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나, 이런 주장은 아주 중요한 조건, 사회 관계를 빠뜨립니다. 우리가 인간 성향을 고려할 때, 우리는 사회 관계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회 관계 없이, 우리는 인간 성향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특히, 사이언스 픽션은 사회 관계가 인간을 완전히 바꿀지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사회 관계(임금 노동 제도)가 인간 성향에 영향을 미치는지 쉽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회들을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언제나 인간 성향이 똑같지 않다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가 너무 지배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회들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우리는 비(非)자본주의 사회를 무시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근대화, 진보에 연결합니다. 오직 자본주의만 근대화, 진보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회들은 근대화, 진보가 되지 못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근대화, 진보를 이용해 새로운 사회를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들을 이용해 어떻게 새로운 사회 속에서 새로운 인간이 나타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19세기 서구에서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태동했을 때, 이미 여러 해방 철학들은 사회를 바꾸기 원했습니다. 이런 해방 철학들은 사이언티픽 로망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재가 너무 억압적이기 때문에, 해방을 꿈꾸기 위해 이런 철학들은 미래를 그려야 했습니다. 사이언티픽 로망스 역시 미래 세상을 그립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전복적인 측면, 혁명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은 사회가 바뀌기 때문에 인간 역시 바뀐다고 주장합니다.


주변 관계 덕분에, 시시오 사츠키가 바뀌는 것처럼,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인간을 만듭니다. 시시오 사츠키보다 이건 훨씬 거시적인 변화입니다. 만약 주변 관계 때문에 시시오가 바뀔 수 있다면, 사회 관계 변화는 인간을 훨씬 크게 바꿀 겁니다. 시시오는 선생님과 제자 사이를 고민하나, 왜 선생님과 (고등학교) 제자가 연애해서는 안 되나요? 왜 이게 사회적인 금기가 되나요? 왜 미성년자가 어른과 연애해서는 안 되고, 섹스해서는 안 되고, 결혼해서는 안 되나요? 왜 미성년자가 '미성년자'인가요? 그 자체로서 요사노 스즈메가 '미성년자'인가요? 나이 차별과 투표처럼, 고작 헛소리 따위나 열심히 지껄여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아무 문제가 없나요?



<한낮의 유성> 번외편에서 시시오는 정말 걸어다니는 잘생김 같습니다. 어쩌면 이런 그림체는 '잘생김 그림체'인지 모릅니다. 비록 독자가 저도 모르게 "어머, 씨발, 왜 이렇게 잘 생겼…."이라고 욕한다고 해도, 이건 잘못이 아닐 겁니다. ('내가 욕하는 게 욕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시시오가 선생님과 제자 '관계'를 고민하기 때문에, 독자는 비단 걸어다니는 잘생김만 아니라 '관계'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 성향이 태생적이고 고정적이라고 생각하나, 사이언스 픽션들은 인간이 바뀐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들이 혁명과 전복, 변화를 반드시 이야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너무 지배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이언스 픽션들은 자본주의 체계에게 충성충성~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이 나타났을 때,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은 혁명과 전복을 꿈꾸었습니다. 여전히 이런 꿈들은 존재합니다. 심지어 사이언스 픽션이 자본주의 체계에게 충성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은 변화를 말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들을 이용해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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