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프레데터>, 안나 곤살베스와 여성, 인종, 계급 본문
[안나 곤살베스는 인상적인 등장인물일 수 있습니다.]
초월적인 공간/시간에서 문화·예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문화·예술은 비롯합니다. 만약 현실에서 어떤 것이 지배적이라면, 현실에서 문화·예술이 비롯하기 때문에, 문화·예술은 이것을 반영할 겁니다. 자본주의는 예외가 아닙니다. 이건 지배적인 사회 구조입니다. 이 사회 구조는 임금 노동자 계급을 착취합니다. 만약 자본주의가 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부유하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에게 훨씬 많은 이윤들은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언제나 자본주의는 훨씬 많은 이윤들에 집착합니다. 훨씬 많은 이윤들을 위해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합니다.
19세기, 서구에서 산업 자본주의는 나타났습니다. 자본주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서구 제국주의는 식민지들을 수탈했습니다. 특히, 서구 제국주의는 아메리카를 수탈했습니다. 아메리카 식민지 수탈은 결정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만약 서구 제국주의가 아메리카를 수탈하지 않았다면, 서구에서 자본주의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서구는 중국, 인도, 이슬람을 넘어서지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아메리카 수탈은 자본주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건 서구 자본주의와 서구 제국주의가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아이티처럼, 남반구 아메리카는 가난하고 혼란스럽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미국처럼, 서구는 부유하고 자유롭습니다. 서구(자본주의)가 아메리카(식민지)에게 기생하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엔코미엔다부터 20세기 신자유주의까지, 너무 오랜 동안, 서구는 아메리카에게 기생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 기생에 속합니다. 그래서 핑크 타이드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비단 제국주의일 뿐만 아니라 가부장 제도이기도 합니다. 인류 문명 역사는 가부장 제도 역사입니다. 자본주의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집에서 여자는 아이를 돌봐야 해!" 이건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집에서 여자는 아이를 돌봐야 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성 차별은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이건 비단 사회 관념일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아는 여자 무임금 노동입니다. 아무리 육아가 중요한 노동이라고 해도, 이건 여자 무임금 노동입니다. 자본주의는 여자들에게 기생합니다. 자본주의가 여자들에게 기생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많은 이윤들을 축적합니다. 만약 육아 노동이 바뀐다면, 만약 자본주의가 여자들에게 기생하지 못한다면, 많은 이윤들을 축적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적어도, 자본주의는 많은 돈들을 잃을 겁니다. 이 사회 구조는 여자를 차별합니다.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는 여자들을 차별합니다.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식민지(아메리카)에게 기생하고, 여자들을 차별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비판합니다. 공산주의가 비판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를 싫어합니다. 심지어 자본주의는 많은 거짓말들조차 늘어놓습니다. 공산주의를 왜곡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거짓말들을 늘어놓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거짓말들을 믿습니다. 이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나쁘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진짜 나쁜 것은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왜곡하고 거짓말들을 늘어놓기 때문에, 문화·예술은 이것을 반영합니다.
외계인 영화는 문화·예술(상업 문화, 상업 예술)에 속합니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왜곡하기 때문에, 문화·예술이 이 왜곡을 반영하기 때문에, 특히, SF 영화가 많은 자본들을 투입하기 때문에, 미국이 서구 제국주의를 주도하기 때문에, 유명한 미국 외계인 영화에서 공산주의자는 주연 등장인물이 되지 않습니다. 이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이건 드문 사례일 겁니다. <프레데터>는 어떤가요? 1987년 <프레데터>는 미국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유명한 외계 사냥꾼을 묘사합니다. <프레데터>는 유명한 미국 외계인 영화일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연 등장인물들은 미국 특수 부대입니다.
비록 이 등장인물들이 공식적인 군대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등장인물들은 미국 특수 부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미국 중앙 정보부조차 이 분대를 지휘합니다. 이 분대는 남반구 아메리카 밀림으로 향합니다. 남반구 아메리카 밀림에서 이 분대, 더치 소령 분대는 유색인들을 죽입니다. 어라,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남반구 아메리카는 서구 백인 지역이 아닙니다. 남반구 아메리카는 미국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 지역은 미국 백인들보다 유색인들, 인디언들의 후손들에 속합니다. 하지만, 왜 남반구 아메리카에서 더치 소령 분대가 인디언들의 후손들을 죽이나요? 이건 정당하지 않습니다.
만약 유럽 백인들이 아프리카를 소유한다면, 만약 아프리카 흑인들이 이 대륙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이건 정당하지 않을 겁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처럼, 남반구 아메리카에서 미국 특수 부대가 유색인들, 인디언들의 후손들을 죽이기 때문에, 이건 정당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프레데터>는 이 학살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더치부터 폰초까지, 이 등장인물들, 미국 특수 부대는 긍정적인 주연 등장인물들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프레데터>가 이 악랄한 학살을 비판하지 않나요? 이 영화가 서구 제국주의, 지배적인 관념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서구 자본주의와 서구 제국주의는 다르지 않습니다.
[왜 아메리카 밀림에서 미국 특수 부대가 인디언들의 후손들을 학살하나요?]
서구 제국주의는 식민지들을 수탈합니다. 특히, 서구 제국주의가 아메리카를 수탈했기 때문에, 서구에서 산업 자본주의는 나타났습니다. 중국, 인도, 이슬람이 아메리카를 수탈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 문명들에서 산업 자본주의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아메리카 수탈은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구 자본주의는 아메리카 수탈에게 기생합니다. 아메리카 사람들은 서구 제국주의에게 저항하기 원합니다. 식민지 수탈에서 아메리카 사람들은 벗어나기 원합니다. 만약 서구 제국주의에서 아메리카가 벗어난다면, 만약 이 지역이 식민지가 아니라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공산주의를 추구했던 것처럼, 공산주의는 식민지 독립 운동을 지원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이 독립 운동을 탄압했습니다. <프레데터>는 이 탄압을 긍정합니다. <프레데터>가 이 탄압을 긍정하기 때문에, 비록 미국 특수 부대가 남반구 아메리카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도, 이건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프레데터>는 이 학살을 긍정적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소비에트 연방이 아메리카 게릴라들을 돕는다고 묘사합니다. 이 영화는 아메리카 게릴라들이 악랄하다고 묘사합니다. 아메리카 사람들은 식민지 피해자들입니다. 하지만 이 피해자들은 악당들이 됩니다.
서구 제국주의를 위해 <프레데터>는 식민지 피해자들이 악당들이라고 묘사합니다. 서구 제국주의를 위해 이 영화는 미국 특수 부대가 용감하다고 묘사합니다. 이건 식민지 독립 운동이 100% 순수했고 100% 이상적이었다는 아닙니다. 식민지 독립 운동은 커다란 한계들, 내부적인 한계들을 포함했습니다. 특히, 무장 투쟁은 커다란 한계들, 내부적인 한계들을 드러냈습니다. <프레데터>가 묘사하는 것처럼, 어떤 열대 밀림 게릴라들은 너무 악랄할 겁니다. 공산주의는 식민지 독립 운동이 순수했고 이상적이었다고 포장하지 못합니다. 공산주의는 게릴라들에게 한계들이 있었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비록 <프레데터>가 서구 제국주의를 떠받든다고 해도, 공산주의는 이 영화가 사실들에게 기반한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비록 열대 밀림 게릴라들에게 폭력적인 한계들이 있었다고 해도, 이 게릴라들보다 서구 제국주의는 훨씬 악랄합니다. 본질적으로, 이 게릴라들보다 서구 제국주의는 훨씬 악랄합니다. <프레데터>는 서구 제국주의가 훨씬 악랄하다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미국 특수 부대는 부정적인 악당들보다 긍정적인 영웅들입니다. 특히, 더치 소령은 긍정적인 주인공입니다. 비록 더치 소령이 악랄한 수탈을 떠받든다고 해도, <프레데터>는 이 등장인물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프레데터>가 더치 소령을 비판하지 않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주연 등장인물들은 서구 제국주의에 속합니다. 더치부터 폰초까지, 주연 등장인물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떠받듭니다. 이 주연 등장인물들과 달리, 안나 곤살베스는 공산주의 게릴라입니다. 오직 안나 곤살베스, 이 주연 등장인물만 공산주의자입니다. 비록 안나가 주인공이 아니라고 해도, 비록 안나가 외계 사냥꾼을 물리치지 않는다고 해도, 공산주의자는 주연 등장인물입니다. 그래서 안나는 특별한 사례일 수 있습니다. 유명한 미국 외계인 영화에서 공산주의자가 주연 등장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례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건 안나가 구체적인 공산주의 운동을 보여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안나가 공산주의 게릴라라고 해도, 아무리 소비에트 연방이 안나를 교육했다고 해도, 안나는 그저 포로에 불과합니다. 안나는 공산주의 운동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비단 안나만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더치부터 폰초까지, 비록 이 등장인물들이 서구 제국주의를 떠받든다고 해도, 이 등장인물들은 구체적인 서구 제국주의를 찬양하지 않습니다. 비록 <프레데터>가 반공주의를 포함한다고 해도, 이 영화에서 이데올로기 싸움은 핵심이 아닙니다. 반공주의는 아슬아슬한 연출을 위한 계기에 불과합니다.
울창한 밀림에는 공산주의 게릴라들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해 미국 특수 부대는 울창한 밀림으로 향합니다. 이 밀림에는 비단 게릴라들만 아니라 외계 사냥꾼 역시 있습니다. 미국 특수 부대는 외계 사냥꾼과 조우합니다. 하나씩, 하나씩, 외계인은 특수 부대를 사냥하기 시작합니다. 이 환경이 복합적이고 입체적이고 수직적이기 때문에, 특수 부대보다 외계 사냥꾼은 훨씬 유리한 위상입니다. 게다가, 이 밀림은 비경입니다. 문명에서 이 밀림은 멀리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미국이 강대국이라고 해도, 미국 군대는 특수 부대를 돕지 못합니다. 특수 부대는 생존해야 합니다.
특수 부대는 다른 도움을 기대하지 못합니다. 특수 부대는 오직 그들의 능력들에만 의지합니다. 이 열대 밀림은 고립된 던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모험가 일행이 고립된 던전에 들어간다면, 아무도 모험가 일행을 돕지 못할 겁니다. 고립된 던전에서 모험가 일행은 다른 도움을 기대하지 못할 겁니다. 모험가 일행은 오직 그들의 능력들에만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던전 탐험은 아슬아슬한 긴장을 연출합니다. 던전 탐험처럼, <프레데터> 역시 아슬아슬한 긴장을 연출합니다. 이데올로기를 논의하기보다 이 긴장을 연출하기 위해 <프레데터>는 그저 빨갱이 게릴라들을 보여줄 뿐입니다.
프레데터, 이 외계 사냥꾼에게 반공주의는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2010년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이 게임은 에일리언과 프레데터가 싸운다고 이야기합니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가 반공주의를 포함하나요? 이 게임이 공산주의 게릴라들을 보여주나요? 그건 아닙니다.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가 반공주의를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이 외계 사냥꾼에게 이데올로기 투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울창한 밀림이 아슬아슬한 긴장을 연출하기 때문에, <프레데터>는 그저 빨갱이를 운운할 뿐입니다. 그래서 안나는 구체적인 운동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비록 안나가 구체적인 운동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주연 등장인물들과 달리, 안나는 공산주의자입니다. 특히, 안나는 여자입니다. 더치부터 폰초까지, 이 등장인물들은 악랄한 제국주의를 떠받듭니다. 이 서구 제국주의 등장인물들은 남자들입니다. 이 등장인물들과 달리, 안나는 여자입니다. <프레데터>에서 서구 제국주의는 남자들이고 공산주의는 여자입니다. 서구 제국주의와 서구 자본주의는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자들은 지배 계층, 권력자들입니다. 남자들과 달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자들은 피지배 계층, 사회적인 약자들입니다.
[서구 제국주의 등장인물들은 남자들입니다. 공산주의자는 여자입니다.]
안나 곤살베스는 비단 공산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여자이기도 합니다. 이건 안나가 구체적인 페미니즘을 보여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안나가 그저 포로에 불과하기 때문에, <프레데터>에서 페미니즘은 핵심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 영화는 너무 마초적이기조차 합니다. 극장 관객들은 <프레데터>가 너무 마초적이라고 느낄 겁니다. 우와아~, 더치 소령은 울퉁불퉁 근육들을 자랑합니다. 비단 더치 소령만 아니라 다른 남자 등장인물들 역시 울퉁불퉁 근육들을 자랑합니다. 아무리 안나가 여자라고 해도, 이건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안나가 남자라고 해도, 전반적인 사건 전개는 똑같을 겁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에게 성 해방은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19세기부터, 이미 공산주의는 성 해방을 고민했습니다. 비록 소비에트 연방이 성 해방에 실패했다고 해도, 서구 제국주의와 달리, 성 해방을 실천하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은 노력했습니다. 비록 공산주의에게 내부적인 한계가 있었다고 해도, 비록 공산주의가 가부장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해도, 공산주의에게 성 해방은 전통일 수 있습니다. 만약 서구 제국주의가 압박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소비에트 연방은 급진적인 성 해방을 실천했을 겁니다. 성 해방이 전통이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공산주의는 급진적인 성 해방을 주장할 겁니다.
공산주의는 성 해방을 주장합니다.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다르지 않습니다. <프레데터>에서 주연 남자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떠받듭니다. 이 남자들과 달리, 여자는 공산주의에 속합니다. 비록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해도, <프레데터>에서 남자들과 여자는 대립적인 이데올로기에 속합니다. 비록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해도, <프레데터>와 달리, 유명한 미국 외계인 영화에서 이 사례를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티>는 1982년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외계인을 보여줍니다. <더 씽>은 1982년 영화입니다. <이티>처럼, 이 영화는 외계인을 보여줍니다.
<이티>, <더 씽>은 1980년대 미국 외계인 영화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이티>, <더 씽>은 고전 영화입니다. <이티>는 착한 외계인을 보여줍니다. <이티>와 달리, <더 씽>은 나쁜 외계인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티>보다 <더 씽>과 <프레데터>는 비슷할 겁니다.) 두 외계인 영화는 여자 등장인물이 공산주의 게릴라라고 보여주지 않습니다. 두 영화에서 주연 여자 등장인물은 공산주의 게릴라가 아닙니다. 비록 안나가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해도, <프레데터>에서 남자들과 여자는 대립적인 이데올로기에 속합니다. 안나는 비단 여자 공산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인디언 계열이기도 합니다.
더치 소령은 전형적인 서구 백인입니다. 호킨스, 폰초, 블레인 역시 전형적인 서구 백인들입니다. 딜런은 흑인입니다. 맥은 흑인입니다. 하지만 딜런, 맥은 서구 제국주의를 떠받듭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아프리카 흑인들을 착취했습니다. 만약 서구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흑인들을 착취하지 않았다면, 서구 자본주의는 부유하지 않았을 겁니다. 서구 자본주의는 인종 차별입니다. 만약 서구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인종 차별을 해결하기는 너무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21세기 초반, 여전히 인종 차별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인종 차별이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맥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나요?
인종 차별이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딜런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피부 색깔과 상관없이, 딜런, 맥은 자본주의가 정당하다고 착각할 겁니다. 딜런, 맥은 공산주의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다른 등장인물들과 달리, 더치 소령 부대에서 빌리는 인디언 계열입니다. 빌리가 인디언 계열이기 때문에, 이 등장인물은 야생, 생존, 정찰, 주술을 강조합니다. 비록 다른 등장인물들이 외계 사냥꾼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빌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더치 소령 분대에서 빌리는 특별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빌리가 특별하다고 해도, 빌리는 아메리카 수탈이 악랄하다고 비판하지 않을 겁니다.
서구 자본주의에게 아메리카 수탈은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적어도, 아메리카 수탈은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21세기 초반 오늘날, 여전히 남반구 아메리카는 가난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어떤 남한 사람들은 남반구 아메리카가 열등하다고 조롱합니다. 남한에서 서구 제국주의가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이 서구 제국주의를 떠받들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남반구 아메리카가 열등하다고 조롱합니다. 이 사람들이 아메리카를 조롱하는 것처럼, 자본주의와 가난한 아메리카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빌리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나요? 빌리가 식민지 수탈을 비판하나요?
아니, 빌리는 식민지 수탈을 비판하지 않을 겁니다. 비록 자본주의가 인디언들을 학살한다고 해도, 피부 색깔과 상관없이, 빌리는 공산주의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빌리보다 안나와 인디언 계열은 어울립니다. 자본주의가 식민지 수탈에게 기생하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식민지 독립 운동을 지원하기 때문에, 안나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빌리보다 안나와 인디언 계열은 어울립니다. (비록 <프레데터>가 식민지 독립 운동을 왜곡한다고 해도,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안나는 공산주의 게릴라가 되었을 겁니다.) 이건 인종과 이데올로기가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안나는 공산주의, 여자, 인디언을 결합합니다.]
백인은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흑인은 공산주의를 비난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서구 백인이 자본주의를 떠받드나요? 그건 아닙니다. 모든 아프리카 흑인이 공산주의를 옹호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인종과 이데올로기는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인종처럼, 성별과 이데올로기는 떨어질 수 있습니다. 남자는 가부장 제도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성 차별을 떠받들 수 있습니다.) 비록 인종과 이데올로기가 필연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해도, 이데올로기는 인종(민족)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왜 많은 서구 백인들이 부유한가요? 왜 많은 남반구 사람들이 가난한가요? 이게 인종 문제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부유한 서구 백인들, 가난한 남반구 사람들은 인종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자본주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인종 문제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자본주의가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서구 백인들은 부유하고 남반구 사람들은 가난합니다. 이 사례처럼, 이데올로기는 인종(민족)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인종보다 이데올로기가 본질적인 주제라고 해도, 이데올로기는 인종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빌리보다 안나와 인디언은 어울립니다. 안나는 공산주의, 여자, 남반구 아메리카를 결합합니다. 유명한 미국 외계인 영화에서 이 결합을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프레데터>에서 공산주의, 성 해방, 식민지 독립은 핵심 주제들이 아닙니다. 이 영화는 공산주의, 성 해방, 식민지 독립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감독부터 작가까지, 영화 제작자들은 세 가지들을 고려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안나가 공산주의, 여자, 남반구 아메리카를 결합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우연에 불과합니다. 안나 곤살베스, 이 등장인물에게는 깊은 주제 의식이 없을 겁니다. 엘피디아 카릴로는 안나를 연기했습니다. 엘피디아 카릴로가 공산주의, 성 해방, 식민지 독립을 의도했나요? 엘피디아 카릴로가 안나를 연기하는 동안, 세 가지들이 중요한 요소들이었나요?
비록 이 배우가 세 가지들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해도, 비록 안나가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해도, 유명한 미국 외계인 영화에서 이 결합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안나 곤살베스는 특별합니다. 안나가 특별하기 때문에, 아무리 더치 소령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더치 소령보다 안나는 인상적일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외계 사냥꾼과의 싸움이 핵심이기 때문에, 많은 극장 관객들은 안나가 중요하지 않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외계 사냥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계 사냥꾼과 달리, 현실에서 서구 제국주의는 지배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커다란 고통에 빠집니다.
※ 영화 <프레데터> 스틸샷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Vo3FmkleTEQ
https://www.imdb.com/title/tt0093773/mediaindex?page=2&ref_=ttmi_mi_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