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페르디도 기차역>과 직조자라는 입체적인 괴수 본문
※ 이 게시글에는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소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꽤나 방대합니다. 이 소설은 스팀펑크 판타지가 선사하는 수많은 설정들을 쓸어담았습니다. 하수구 던전부터 거대한 비행선까지, 작은 자동 로봇부터 정체 모를 거대 생명체까지,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수많은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추악하고 역겨운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입니다. 사실 19세기 유럽은 본격적으로 산업 자본주의를 발달시켰습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 침략자들은 식민지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했습니다. 동인도 회사들은 대표적으로 수탈을 상징하죠. 나중에 동인도 회사들은 권력을 잃었으나, 부르주아 집단은 권력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후반에 프랑스 대혁명 이후, 부르주아 집단은 권력 집단이 됩니다. 그리고 19세기 이후, 우리가 아는 그 자본주의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19세기 유럽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공간입니다.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스팀펑크 소설이고, 스팀펑크 소설은 19세기 유럽(과 비슷한 가상 세계들)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스팀펑크 소설은 자본주의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고, <페르디도 기차역> 역시 그렇습니다.
업튼 싱클레어가 <정글>을 쓴 것처럼,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추악한 자본주의를 묘사합니다. 엄청난 산업 폐기물들, 탐욕스러운 군사 정부, 인종 차별과 불행한 파업 노동자들, 비참한 저항 세력.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스팀펑크 소설이 얼마나 추악한 자본주의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줘요. 이 소설은 온갖 스팀펑크 설정들과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뒤섞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골자는 절지류 괴물일 겁니다. 아무리 스팀펑크 설정들이 넘쳐나고 자본주의가 추악한 디스토피아가 된다고 해도, 결국 이 소설은 절지류 괴물을 때려잡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어떤 독자들은 "절지류 괴물? 그건 너무 진부한 설정이야. 19세기 사이언티픽 로망스들부터 21세기 스페이스 오페라들까지, SF 소설들은 절지류 괴물을 너무 많이 써먹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 나오는 절지류 괴물이 그저 악당에 불과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 소설에는 인간을 잡아먹는 절지류 괴물과 인간을 도와주는 절지류 괴물이 나옵니다. 당연히 양쪽 절지류 괴물은 서로 적대하고, 서로 공격합니다. 인간을 잡아먹기 위해. 인간 세상을 지키기 위해.
악당 괴물은 슬레이크 나방들입니다. 슬레이크 나방들은 인간보다 훨씬 크고, 아주 추악하고, 꽤나 강력합니다. 이것들은 물리적인 차원 세계에 완전히 동화하지 않았고, 그래서 인간들은 슬레이크 나방들을 쉽게 처치하지 못합니다. 너무 역겹기 때문에 독자들은 슬레이크 나방을 별로 미화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절지류 괴물을 무조건 악당으로 몰아가야 할까요?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는 우리가 응원할 수 있는 절지류 괴물이 있습니다. 그 괴물은 직조자입니다. 이름처럼 직조자는 거대한 거미입니다. 직조자 역시 차원들을 돌아다닐 수 있고, 막강한 능력을 발휘하고, 거미줄로 세계 그물망을 짤 수 있습니다. 직조자는 인간들을 돕고 슬레이크 나방들을 사냥합니다. 하지만 이는 직조자가 선량한 절지류 괴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직조자는 인간들을 동정하지 않습니다. 직조자는 오직 세상을 아름다운 거미집으로만 바라봅니다. 하지만 슬레이크 나방들은 거미집을 망치고, 직조자는 이것에 분노합니다. 적의 적은 동지가 될 수 있고, 인간들과 직조자는 함께 슬레이크 나방에 저항합니다. 인간들을 동정하지 않으나 인간들을 돕는 막강한 괴물. 이런 설정은 괴수를 훨씬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죠.
수많은 괴수물들은 흑백 대결 구도를 그립니다. 인간 대 괴수. 인간들과 괴수는 무조건 서로 싸웁니다. 여기에 다른 노선은 개입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을 편들거나 괴수를 편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대결 구도는 단순해질지 모르고 때때로 갑갑해질지 모릅니다. 선량한 괴수, 적어도 중립적인 괴수가 있다면, 흑백 대결 구도는 숨통을 틀 수 있을 겁니다. 괴수를 좋아한다고 해도, 우리가 무조건 인간들을 배척해야 할까요. 우리가 괴수를 좋아하는 동시에 인간들을 응원하지 못할까요. 만약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 직조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절지류 괴물들이 오직 슬레이크 나방들이었다면,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 역시 갑갑한 대결 구도가 되었을 겁니다. 인간들 대 절지류 괴물들. 인간들은 다양한 경향들을 드러내나, 슬레이크 나방 앞에서 인간들은 그저 인간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직조자가 있기 때문에, 게다가 직조자가 저항 세력을 도와주기 때문에,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훨씬 입체적인 대결 구도를 펼칩니다. 그래서 직조자는 아주 중요한 절지류 괴물이 됩니다. 직조자 덕분에 <페르디도 기차역>은 한층 입체적인 소설이 됩니다.
직조자 같은 괴물 덕분에 독자들은 인간들을 응원하는 동시에 괴물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소설에 슬레이크 나방들만 등장했다면, 독자들은 절지류 괴물들을 응원하지 못했을 겁니다. 절지류 괴물을 응원하고 싶다면, 독자들은 인간들을 배척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직조자 덕분에 독자들은 인간들을 응원하는 동시에 절지류 괴물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어요. 물론 이런 직조자는 특별히 독창적인 설정이 아닙니다. 이미 <고지라> 시리즈에는 모스라가 있습니다. 모스라는 온갖 파괴적인 괴수들과 싸우고 지구 자연과 인간들을 보호하죠. 종종 고지라 역시 '인간들을 동정하지 않으나 인간들을 돕는' 괴수가 되고요. 직조자는 독창적인 설정이 아니죠. 하지만 <페르디도 기차역>은 아주 강렬한 경향들을 드러내고, 그것 덕분에 직조자는 훨씬 독특해집니다. 이 소설에서 자본주의 디스토피아와 입체적인 절지류 괴물은 좋은 궁합을 이룹니다. 이런 소설은 흔하지 않겠죠. 온갖 SF 소설들이 넘쳐나는 영어권 시장이나 일본 시장에서조차 이런 소설은 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