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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팔레오>,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 본문

SF & 판타지/머나먼 생태계

<팔레오>,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

OneTiger 2022. 5. 2. 20:00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을 과장합니다. 자연은 우리 인류를 둘러쌉니다.]



원인 없이, 결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원인에서 결과는 비롯합니다. 원인은 결과를 유발합니다. 중층 결정 이론이 지적하는 것처럼, 비록 원인과 결과가 단순한 선형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원인에서 결과는 비롯합니다. 비록 선형적으로 원인이 결과를 유발하지 않는다고 해도, 원인 없이, 결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약 원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결과 역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모리시타 에미코는 <여자끼리니까>를 그렸습니다. 모리시타 에미코가 그렸기 때문에, <여자끼리니까>, 이 만화는 나타났습니다. 모리시타 에미코 없이, 이 만화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약 모리시타 에미코가 그리지 않았다면, <여자끼리니까>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모리시타 에미코에게서 <여자끼리니까>는 비롯했습니다. 모리시타 에미코는 <여자끼리니까>를 유발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모리시타 에미코는 원인(생산 조건)이고, <여자끼리니까>는 결과(생산물)입니다. 모리시타 에미코(원인)에게서 <여자끼리니까>(결과)가 비롯하는 것처럼, 원인 없이, 결과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원인을 무시하고 오직 결과에만 매달린다면, 우리는 착각, 함정에 빠질 겁니다. 결과는 전부가 아닙니다. 결과, <여자끼리니까>보다 원인, 모리시타 에미코는 우선합니다.



<여자끼리니까>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모리시타 에미코가 나타났기 때문에, 모리시타 에미코는 이 만화를 그렸습니다. 결과보다 원인은 우선합니다.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원인은 나타납니다. 결과는 미래이고, 원인은 과거입니다. 과거 없이, 미래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류 진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할루키게니아(Hallucigenia)는 캄브리아 시대 동물입니다. 버제스 셰일에서 고생물학자들이 할루키게니아를 발굴했을 때, 구체적으로 고생물학자들은 이 동물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구체적인 정보들은 부족했습니다. 2015년 6월, 훨~씬 구체적으로 고생물학은 이 동물을 복원했습니다.

 

고생물학은 할루키게니아가 유조 동물 조상이라고 확신합니다. 할루키게니아가 유조 동물 조상이기 때문에, 할루키게니아는 높은 가치를 얻습니다. 계통 분류학은 환형 동물과 절지 동물 사이에 유조 동물을 집어넣습니다. 할루키게니아가 유조 동물 조상이고, 할루키게니아에게 턱과 이빨들이 있기 때문에, 과거 곤충들과 과거 갑각류들에게도 턱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고생물학이 과거 곤충들과 과거 갑각류들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에, 고생물학은 할루키게니아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고생물학과 달리, 어떤 사람들은 할루키게니아가 괴상한 선사 시대 동물이라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고생물학과 달리, 어떤 사람들은 할루키게니아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할루키게니아가 진화하지 않았다면, 인류가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만약 할루키게니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건 지구 생물권 진화 역사가 다른 경로로 흘렀다는 뜻일 겁니다. 지구 생물권 진화 역사가 다른 경로로 흘렀기 때문에, 캄브리아 시대 이후, 오르도비스 생명 진화 역시 다른 경로로 흘렀을 겁니다. 오르도비스 생명 진화가 다른 경로로 흘렀기 때문에, 이 경로는 다른 시대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다른 시대들이 다른 경로들로 흘렀기 때문에, 신생대 역시 바뀌었을 겁니다.

 

만약 할루키게니아, 이 동물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지구 생물권 진화 역사가 바뀌기 때문에, 신생대 진화 역사는 바뀌었을 겁니다. 신생대 진화 역사가 바뀌었기 때문에, 인류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인류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고생물학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생물학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고생물학은 캄브리아 화석을 발굴하지 못합니다. 만약 할루키게니아, 이 동물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21세기 초반 오늘날, 인류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인류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모리시타 에미코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류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이 블로그를 쓰지 못합니다.)



할루키게니아는 원인입니다. 인류, 호모 사피엔스는 결과입니다. 할루키게니아에게 인류는 미래입니다. 인류에게 할루키게니아는 과거입니다. 원인 없이,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과거 없이, 미래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만약 할루키게니아가 진화하지 않았다면, 이게 생물권 진화 역사가 다른 경로들로 흐른다는 뜻이기 때문에, 인류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비록 선형적으로 할루키게니아에게서 인류가 비롯하지 않는다고 해도, 비록 할루키게니아와 인류가 단순한 선형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할루키게니아는 원인, 과거일 수 있고, 인류는 결과, 미래일 수 있습니다.

 

모리시타 에미코와 <여자끼리니까>는 선형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선형적으로 모리시타 에미코에게서 이 만화는 비롯했습니다. 모리시타 에미코와 <여자끼리니까>와 달리, 할루키게니아와 인류는 선형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할루키게니아가 진화하지 않았다면, 이게 대체 진화 역사일 수 있기 때문에, 이 역사에서 인류는 나타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대체 역사는 SF,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대체 역사가 SF, 사이언스 픽션에 속하기 때문에, 대체 진화 역사는 사이언스 픽션일 수 있습니다. 어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대체 진화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 게임들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적어도 이 생태계 게임들은 사이언스 픽션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대체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 생태계 게임들은 대체 진화 역사를 보여줍니다. 대체 진화 역사는 진화 경로들이 다양할 수 있다고 보여줍니다. 진화 경로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대체 진화 역사는 인류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대체 진화 역사, 생태계 게임들은 인류가 필연적이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짜 진화 역사와 대체 진화 역사를 대비하고 인류가 필연적이지 않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화 역사를 바라보고 어떻게 인류가 나타났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선사 동물 할루키게니아는 멸종했습니다.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기 전에, 너무 너무 오래 전에, 이미 할루키게니아는 멸종했습니다. 하지만 고생물학은 할루키게니아에게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늘에서 갑자기 인류가 뚝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다른 생명체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결과, 미래이고, 원인 없이, 과거 없이, 결과, 미래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시적인 생명 진화 역사가 흐르는 동안, 지구 생물권은 많고 많은 생명체들을 키웁니다. 생물 다양성 역사에서, 많고 많은 생명체들과 함께, 인류는 존재합니다.


지구, 이 행성에서 인류는 혼자가 아닙니다. 지구에서 생물 다양성이 번성하기 때문에,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많고 많은 생명체들은 나타났고, 많고 많은 생명체들과 함께, 여전히 인류는 살아가는 중입니다. 지구 생물권이 많고 많은 생명체들을 키우기 때문에, 생명체들은 혼자 살아가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례들은 극단적이기조차 합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어떤 꽃송이에게는 길다란 꿀샘이 있습니다. 심지어 꿀샘 길이는 대략 28cm조차 넘습니다. 꿀샘 밑바닥은 꿀을 담습니다. 식물 수정에서 꿀샘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곤충이 꿀을 먹는 동안, 곤충이 꽃가루를 옮기기 때문입니다.

 

꿀샘 길이가 28cm를 넘고, 꿀샘 밑바닥이 꿀을 담기 때문에, 만약 어떤 곤충이 이 꿀을 먹을 수 있다면, 이 곤충에게는 아주 길다란 주둥이가 있을 겁니다. 크산토판 박각시 나방에게 길다란 주둥이가 있기 때문에, 크산토판 박각시 나방은 이 길다란 꿀샘에게 길다란 주둥이를 집어넣고 꿀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이 길다란 꿀샘과 크산토판 박각시 나방처럼, 생명체들은 혼자 살아가지 않습니다. 크산토판 박각시 나방은 상호 작용을 증명하기 위한 가장 대표적인,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비단 이 박각시 나방만 아니라 다른 사례들 역시 생명체들이 혼자 살아가지 않는다고 보여줍니다. 인류는 예외가 아닙니다.



생물 다양성에서 인류는 예외가 아닙니다. 많고 많은 생명체들이 자연을 구성하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은 자연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자연은 생물 다양성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혼자 살아가지 않습니다. 생물 다양성 속에서 인류가 살아가기 때문에, 만약 인류가 생물 다양성을 무시한다면, 인류는 커다란 위기에 빠질 겁니다. 자유 시장 경제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자유 시장 경제는 많은 이윤을 추구합니다. 자유 시장 경제에게 많은 이윤은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많은 이윤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자유 시장 경제는 많은 것들을 상품화합니다. 생물 다양성 역시 시장 경제 상품이 됩니다.

 

자유 시장 경제는 야생 동물들을 상품화합니다. 자유 시장 경제에게 많은 이윤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에, 자유 시장 경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오직 돈, 돈, 돈, 돈, 돈, 돈벌이만 추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벌이에 매달리기 때문에, 야생 동물들 역시 돈벌이를 위한 상품이 됩니다. 자유 시장 경제는 야생 지역을 파헤치고 야생 동물들을 판매합니다. 야생 동물들과 인간들이 만나기 때문에, 위험한 전염병 역시 퍼집니다. 비록 위험한 전염병이 퍼진다고 해도, 많은 이윤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에, 자유 시장 경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코로나 19는 세계적인 전염병 재앙이 되었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가 돈벌이에 매달리기 때문에, 야생 동물은 시장 경제 상품이 되었고, 코로나 19는 세계적인 전염병 재앙이 되었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는 전염병 재앙 원인입니다. 심지어 그 악랄한 소비에트 연방조차 세계적인 전염병 재앙을 유발하지 않았습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비난하나, 그 악랄한 소비에트 연방보다 자유 시장 경제는 훨씬 악랄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자유 시장 경제를 비판하지 않기 때문에, 보수 우파 지식인들에게는 소비에트 연방을 비난하기 위한 명분이 없습니다. 세계적인 전염병 사태가 보여주는 것처럼, 생물 다양성은 아주 중요합니다.

 

생물 다양성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은 생물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소설, 만화, 연극, 애니메이션, 영화, 보드 게임, 비디오 게임, 여러 이야기들은 생물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생물 다양성은 재미있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를 위한 좋은 소재일 수 있습니다. 이건 언제나 모든 이야기가 생물 다양성을 주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자끼리니까>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이 만화는 픽션, 허구인지 모릅니다. <여자끼리니까>에서 모리시타 에미코는 주인공입니다. 어라, 이건 이상합니다. 만화가 모리시타 에미코와 만화 주인공 모리시타 에미코가 똑같은가요? 아니면 둘이 동명 이인인가요?



<여자끼리니까>가 허구이든, 허구가 아니든, 이 만화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여자끼리니까>, 이 이야기는 야생 동물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적어도 <여자끼리니까>, 이 이야기에서 야생 동물들은 중요한 소재가 아닙니다. 모리시타 에미코가 이 만화를 그리는 동안, 모리시타 에미코는 야생 동물들을 중요한 소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만화 독자들은 야생 동물들을 중요한 소재라고 해석하지 않을 겁니다. <여자끼리니까>는 오직 인간만 주목합니다. 이 만화가 허구이든, 허구가 아니든, 이 만화는 오직 인간, 인간, 인간, 인간, 인간만 주목합니다. 오직 인간만 중요한 소재입니다.

 

비단 <여자끼리니까>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소설들에서 야생 동물들은 중요한 소재가 아닙니다. 많은 만화들, 연극들, 애니메이션들, 영화들, 보드 게임들, 비디오 게임들에서 오직 인간만 중요한 소재일 수 있습니다. 허구에 상관없이, 많은 이야기들에서 야생 동물들은 중요한 소재가 아닙니다. 많은 이야기들은 자연, 야생, 생태, 환경을 외면하고 오직 인간만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들에서 자연, 야생, 생태, 환경은 그저 병풍에 불과합니다. 아니, 심지어 어떤 이야기들에서 이것들은 병풍에조차 미치지 못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오직 인간, 인간만 전부라고 보여줍니다.



이건 이야기가 야생 동물들을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이야기가 허구이든, 허구가 아니든, 이 이야기에게 야생 동물들을 보여주기 위한 의무, 사명이 있나요? <여자끼리니까>가 허구이든, 허구가 아니든, 이 만화에게 야생 동물들을 보여주기 위한 의무가 있나요? <여자끼리니까>가 야생 동물들을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만화가 잘못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이야기에게는 야생 동물들을 보여주기 위한 의무가 없습니다. 비록 이야기가 야생 동물들을 주목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인간을 중시합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야생 동물들보다 인간은 가장 중요한 소재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중요한 소재이기 때문에, <여자끼리니까>는 야생 동물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코비드 19가 증명하는 것처럼, 자연, 야생, 생태, 환경은 그저 병풍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자연, 야생, 생태, 환경 속에서 인류는 살아갑니다. 자연, 야생, 생태, 환경에서 인류는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유 시장 경제가 야생 동물들을 상품화하기 때문에, 코비드 19가 심각한 것처럼, 인류는 혼자가 절대, 절대 아닙니다. 인류가 혼자가 절대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 소재로서 야생 동물은 높은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생명 진화 역사가 거시적인 것처럼, 비단 가까운 동물만 아니라 머나먼 동물 역시 중요한 소재일 수 있습니다. 보드 게임 <팔레오>는 원시 생존 게임입니다. <팔레오>는 어떻게 원시 부족민들이 생존하는지 보여줍니다. <팔레오>는 매머드를 묘사합니다. 이미 매머드가 멸종했기 때문에, 매머드는 머나먼 동물입니다. 인도 코끼리는 가까운 동물일 수 있으나, 인도 코끼리보다 매머드는 머나먼 동물입니다. <팔레오>에서 머나먼 야생 동물은 핵심 소재입니다. 핵심 소재가 중요한 소재(야생 동물)이기 때문에, <팔레오>는 흥미롭습니다. <팔레오>는 인류가 혼자가 아니라고 보여줍니다.

 

원시 부족민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원시 부족민들과 매머드는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팔레오>는 인간들과 야생 동물들이 깊은 관계를 맺는다고 보여줍니다. 원시 부족민들은 매머드를 사냥할 수 있습니다. 매머드는 부족민들을 내쫓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부족민들은 다칩니다. 어떤 부족민들은 죽음에 이릅니다. 만약 많은 부족민들이 죽음에 이른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패배할 겁니다. 매머드 사냥이 위험하기 때문에, 매머드 사냥보다 열매 채집은 낫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매머드 사냥을 피하지 못합니다. <팔레오>는 비단 매머드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 역시 보여줍니다.



[<팔레오>는 인간과 야생 동물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여줍니다. 부족민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동굴 사자가 원시 부족민들을 습격하는 것처럼, <팔레오>는 인간과 야생 동물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여줍니다. 이 관점에서 <여자끼리니까>보다 <팔레오>는 훨씬 흥미롭습니다. 이건 <여자끼리니까>보다 <팔레오>가 우월하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비록 <여자끼리니까>가 야생 동물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잘못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시장 경제가 야생 동물들을 상품화하기 때문에, 많고 많은 사람들은 커다란 고통에 빠집니다. 이 사례처럼, 자연 속에서 인류가 살아가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여자끼리니까>보다 <팔레오>는 훨씬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팔레오>가 매머드를 보여주는 것처럼, 소설, 만화, 연극, 애니메이션, 영화, 보드 게임, 비디오 게임에서 자연, 야생, 생태, 환경은 중요한 소재일 수 있습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사이언스 픽션이고, 적어도 생태계 게임이 사이언스 픽션에 가깝고, 생태계 게임이 야생 동물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서 자연, 야생, 생태, 환경은 중요한 소재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연, 야생, 생태, 환경을 보기 원한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좋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특히, 사이언스 픽션은 이것들을 과장합니다.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생태계를 과장합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소설은 모든 곡물이 시든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가 코비드 19 원인인 것처럼, 자유 시장 경제는 기후 변화 원인입니다. 기후 변화가 심각하기 때문에, 기이한 바이러스는 퍼집니다. 기이한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곡물은 시듭니다. 모든 곡물이 시들기 때문에, 식량 생산 그래프는 곤두박질칩니다. 곡물 생산, 식량 생산이 너무 너무 감소하기 때문에, 인류 사회는 야만에 빠집니다. 더 이상 인류 사회는 문명이 아닙니다. 인류 사회가 야만에 빠지는 것처럼, 환경 아포칼립스는 생태학 재앙을 과장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 야생, 생태, 환경을 과장합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이 오직 부정적인 자연만 과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미래 문명이 외계 행성들을 테라포밍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생태계 테라포밍이 가능하기 때문에, 불모지 행성들은 가이아 행성이 됩니다. 생물 다양성 행성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미래 문명은 많은 생물 자원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래 문명이 풍요로운 생물 자원들을 누리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긍정적인 자연을 과장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사이언스 픽션이 자연, 야생, 생태, 환경을 과장하기 때문에, 심지어 사이언스 픽션은 외계 자연 생태계조차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보드 게임 <언세틀드>는 우주 탐험/생존 게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우주선 승무원들을 조종합니다. 우주선 승무원들은 외계 환경들을 탐험합니다. 외계 환경들은 자연 생태계를 포함합니다. 어떤 행성에서 자연 생태계는 집단 지성에 가깝습니다. 자연 생태계가 집단 지성이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에게는 의지가 있습니다. 우주선 승무원들에게 이 의지는 적대적입니다. <언세틀드>처럼, 자연 생태계가 집단 지성일 수 있나요? 우주 탐험 게임처럼, 현실에서 자연 생태계가 집단 지성일 수 있나요? 복잡하고 살아있는 체계가 두뇌 신경망이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 그 자체가 두뇌인가요?

 

이 광대한 우주에서 어떤 행성 자연 생태계가 집단 지성일 수 있나요? 만약 어떤 행성에서 자연 생태계가 순환한다면, 이 생태계에게 의지가 있을까요? 글쎄요, 이건 너무 황당무계한 공상인지 모릅니다. <언세틀드>는 황당무계한 공상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세틀드>를 황당무계하다고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비단 <언세틀드>만 아니라 다른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이 비난에 부딪힙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이과 감성을 팍팍 풍긴다고 해도,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엄중한 지식들을 고증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이 자연을 과장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비난에 부딪힙니다.



하지만 이 과장은 단점보다 장점일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자연을 과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이 우리를 둘러쌌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 없이, 우리는 자연을 인식할 수 있으나,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이 우리를 둘러쌌다고 강조합니다. <언세틀드>처럼, 행성 자연 생태계가 집단 지성일 수 있는 것처럼, 자연은 그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배경 무대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가 야생 동물들을 상품화하기 때문에, 코비드 19가 심각한 것처럼, 자연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 시장 경제, 이윤보다 자연, 야생, 생태, 환경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연, 야생, 생태, 환경을 존중해야 하고, 시장 경제가 야생 동물을 상품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 시장 경제를 타파해야 합니다. 비록 <언세틀드>가 위험한 자연을 과장한다고 해도, <언세틀드>는 자연이 수동적이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자연이 수동적이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매력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달리, <여자끼리니까>는 자연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비단 <여자끼리니까>만 아니라 다른 많은 이야기들 역시 자연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들보다 <언세틀드>, 사이언스 픽션은 흥미롭습니다.

 

 

<여자끼리니까>에게는 고유한 특성이 있습니다. 분명히 <여자끼리니까>에게는 고유한 특성이 있습니다. <팔레오>는 이 특성을 절대 구현하지 못합니다. <언세틀드> 역시 이 특성을 절대 구현하지 못합니다. 이 게시글은 <여자끼리니까>보다 <팔레오>, <언세틀드>가 흥미롭다고 주장하나, 이 흥미는 필연적인 규칙이 절대 아닙니다. <여자끼리니까>는 흥미로운 만화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여자끼리니까>를 흥미롭다고 느낍니다. 자연, 야생이 기준이 될 때, <팔레오>, <언세틀드>는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자연, 야생이라는 기준이 이 흥미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이 흥미는 필연성보다 개연성입니다. 기준이 바뀔 때, 얼마든지 <여자끼리니까>는 고유한 특성을 빛낼 수 있습니다.


※ 게임 <Unsettled> 사진 출처: Tom Mattson,
https://boardgamegeek.com/image/5197185/unsettled

※ 게임 <팔레오> 사진 출처: 혼자 노는 보드게임 CH,
https://www.youtube.com/watch?v=apNKMHGWB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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