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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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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크고 작은 괴수들

파충류 혐오에서 우주 드래곤까지

OneTiger 2017. 6. 17. 20:00

[게임 <스텔라리스>의 에테르 드레이크. 왜 이렇게 드래곤이 엄청난 인기를 누릴까요.]



드래곤은 검마 판타지의 인기 괴수입니다. 검마 판타지 작가들은 드래곤을 사랑하고 드래곤을 여기저기에 집어넣습니다. 여기저기에 드래곤들이 있죠. 전통적으로 드래곤은 무시무시한 악마였습니다. 하지만 몇몇 작가들은 드래곤을 영웅으로 만들었고, 그래서 드래곤은 악마가 되거나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후린의 아이들>에 등장하는 글라우룽은 무조건 악마지만, <드래곤과 조지>의 드래곤은 악당 오우거를 물리치는 영웅입니다. 게다가 이 드래곤(을 빙자한 인간)은 주인공입니다. 이렇듯 드래곤은 영웅과 악당으로 상당한 인기를 누립니다.


덕분에 SF 작품들은 검마 판타지에게서 슬쩍 드래곤을 빌려왔습니다. 드래곤의 명성이 너무 대단하기 때문에 SF 작가들은 이 괴수를 그냥 놔둘 수 없었습니다. 잭 밴스와 앤 매카프리는 드래곤이 외계 괴수라고 뻥을 치고, 드래곤을 전쟁 병기로 신나게 써먹었습니다. 나오미 노빅은 대체 역사 소설을 썼으나, 역시 잭 밴스와 앤 매카프리처럼 드래곤을 전쟁 병기로 신나게 써먹었습니다. 고지라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대신 심해를 헤엄치지만 불을 뿜는 거대한 파충류 괴수입니다. 역시 드래곤과 비슷하죠. 아니, 킹기도라는 정말 우주 드래곤이로군요. <마스터 오브 오리온> 같은 게임도 우주 드래곤(!)을 빼먹지 않습니다.



드래곤은 정말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것 같습니다. 검마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을 통틀어 이렇게 인기를 누리는 괴수는 드물 것 같습니다. 크라켄 같은 괴수만이 드래곤과 대적할 수 있겠군요. 바다에 크라켄이 있다면, 지상에 드래곤이 있군요.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어요. 왜 하필 드래곤인가? 왜 드래곤은 이토록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가? 음, 단도직입적인 물음이지만,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중세 유럽 신화를 연구하는 사람은 이런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중세 유럽 신화를 잘 모르고, 그래서 왜 창작가들이 이렇게 드래곤에 열렬히 구애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대부분 창작가들은 별로 생각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유명한 창작물이 드래곤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걸 모방했을 수 있습니다. 선구자적인 작품이 뭔가 기발한 설정을 선보이면, 다른 작가들은 그걸 모방하죠. 그렇다면 왜 선구자적인 작품들은 드래곤을 이용했을까요. 드래곤의 어떤 점이 작가들의 심장을 건드렸을까요. 드래곤이 다른 괴수보다 더 대단한 특징이 있을까요.



이건 아주 개인적인 추측이고, 그래서 근거가 전혀 없지만, 그래도 한 번 용감무식하게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드래곤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이 놈이 온혈 동물이 아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 인간은 포유류입니다. 그래서 포유류를 비롯한 온혈 동물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당연히 다른 포유동물에게 친근감을 느낍니다. 조류는 파충류와 가깝고, 사실 어떤 생물학자들은 조류와 파충류를 한 묶음(사우롭시드)으로 분류합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물론이고 요즘 현대인들조차 조류를 파충류의 부류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새들은 불길함을 상징하지만, 조류는 파충류만큼 혐오스럽지 않습니다. 참새나 까치나 비둘기는 뱀이나 도마뱀이나 악어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까마귀가 불길한 동물이라고 해도 뱀의 혐오스러움에 비교될 수 없을 겁니다. 포유류와 조류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파충류(특히 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파충류 괴수를 훨씬 무섭거나 혐오스럽게 생각했고, 그래서 드래곤은 다른 괴수들보다 더 흉악해졌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드래곤은 비단 파충류만 대표하지 않습니다. 드래곤은 양서류와 어류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드래곤은 (포유류와 조류를 제외한) 파충류, 양서류, 어류 등의 이질적인 이미지를 대변합니다. 각종 설화에서 형태는 달랐으나 드래곤은 파충류 (혹은 양서류나 어류) 괴수였습니다. 이 놈은 비늘이 달리거나 꿈틀거리나 차갑거나 어쨌든 뭔가 포유류와 조류 같지 않은 온갖 특징을 대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드래곤은 곤충을 비롯한 절지동물을 대변하지 않으나, 절지동물들은 너무 작기 때문에 괴수의 원형이 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메뚜기 떼처럼 재난이 될 수 있었으나, 괴수는 될 수 없었죠.


그래서 드래곤은 다른 흉악한 것들을 대변하는 괴수가 되었고, 유럽 기독교는 이것을 아주 유용하게 써먹었습니다. 사탄을 드래곤과 동일시했고, 드래곤은 더욱 유명한 괴수가 되었죠. 이는 유럽 창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여러 작가들이 드래곤을 작품 속에 집어넣습니다. 이게 계속 후대에 영향을 미쳤고, 마침내 드래곤은 괴수물의 왕좌에 앉습니다. 흠, 그럴 듯한 이론 같지만, 과연 이게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저 머리 속의 망상일 뿐이기 때문에….



어쨌든 저는 이런 이유 때문에 우주 구축함이 외계 드래곤을 때려잡는다고 생각합니다. 인류는 오래 전부터 비늘이 달린 생명체를 혐오했고, 그래서 작가들은 드래곤을 유용하게 써먹었고, 그 와중에 여러 특징들이 덧붙었고, 그게 외계 드래곤까지 이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스페이스 오페라의 여러 포악하고 혐오스러운 파충류 외계인들을 드래곤의 사촌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성적인 종족이든 우주 괴수든, 파충류를 향한 인류의 혐오를 대변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우리가 인류로 남아있는 이상, 이런 파충류 외계인이나 우주 드래곤은 계속 등장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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