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통 속의 뇌와 헤게모니 본문
언젠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이버펑크 소설들은 '통 속의 뇌'라는 가정을 즐겨 이용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상 세계에 갇혔다면, 그 사람은 가상 세계와 현실을 쉽게 구분하지 못할 겁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진짜 사물을 보고, 진짜 냄새를 맡고, 진짜 맛을 느끼고, 진짜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건 전부 착각입니다. 그 사람이 보고 맡고 느끼고 듣는 사물과 냄새와 맛과 소리는 전기적인 신호에 불과합니다. 가상 세계를 구현하는 중앙 처리 장치는 온갖 신호들을 보내고, 그 사람은 그저 전기적인 신호를 받을 뿐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현실을 느끼고 싶다면, 그 사람은 기계에서 뛰쳐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기계가 계속 진짜 같은 신호들을 보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기계에서 함부로 뛰쳐나오지 못합니다. 종종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뭔가가 잘못 돌아간다고 어렴풋하게 생각하나, 그 사람은 여전히 기계 속에 머뭅니다. 수많은 작가들은 그 사람이 영원히 가상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사이버펑크의 전형적인 불행이죠. 이런 논리를 다른 문제에 적용하면 어떨까요. 가령, 통 속의 뇌 실험을 '팩트'와 연결한다면?
'팩트'는 요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잘 먹히는 단어들 중 하나일 겁니다. '팩트 체크'는 마치 신성한 진리 같습니다. 누구나 팩트를 외치고, 누구나 자신들이 팩트를 이야기한다고 주장합니다. 팩트는 삼라만상을 해결하는 요소입니다. 팩트만 이야기하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팩트에 가깝다고 치열하게 싸웁니다. 솔직히 저는 이게 유행처럼 보입니다. 마치 어떤 맛집이 유명해지면, 다들 그 맛집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처럼. 팩트가 유행이 되었기 때문에 다들 팩트를 향해 우르르 몰려갑니다.
사실 팩트를 파악하는 행위는 언제나 중요했습니다. 그게 중요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팩트가 정말 중요할까요? 모두 팩트를 부르짖고 열광하는 것처럼 팩트가 정말 중요한 요소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팩트는 분명히 중요한 요소이나, 그건 전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팩트' 역시 지배적인 관념 안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정말 평등하다면, 팩트는 제일 중요한 요소일 겁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은 처참하게 불평등하고, 그래서 팩트는 제일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팩트보다 우선합니다.
가상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전기적인 신호들이 현실이라고 착각합니다. 기계가 계속 사람들에게 전기적인 신호들을 보내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상 세계 외부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저는 '팩트'가 이런 착각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팩트를 중시합니다. 하지만 그 팩트가 어디에서 비롯했고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령, 수많은 사람들은 중국이 미세 먼지를 뿜는다고 욕합니다. 그건 분명히 사실입니다. 중국은 나쁩니다. 그건 팩트입니다. 하지만 왜 그런 사람들은 유럽 강대국들을 욕하지 않을까요.
과거에 자본주의가 한창 발달했을 때, 유럽 강대국들 역시 엄청난 매연을 뿜었습니다. 유럽 자본주의는 수많은 환경 오염들을 일으켰고, 노동자들과 빈민들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렇게 유럽 국가들은 신나게 자본주의의 혜택을 누렸어요. 그들은 별로 아쉽지 않을 겁니다. 그 동안 실컷 해먹었기 때문에. 하지만 중국은 유럽보다 훨씬 늦게 자본주의 산업을 발달시켰습니다. 정말 유럽이 중국을 욕하고 싶다면, 유럽은 자신들이 누리는 혜택들을 포기하고 중국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열심히 중국만 욕하고, 유럽 강대국들을 욕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비단 이 문제를 환경 오염에만 적용할 이유는 없겠죠. 아프리카 흑인들은 잔인한 내전을 벌입니다. 왜 그럴까요. 깜둥이 새끼들이 야만적이기 때문에? 수많은 비디오 게임들은 헐벗은 여자 캐릭터들을 판매합니다. 왜 그럴까요. 남자들이 본능적으로 짐승이기 때문에? 사실 수많은 사람들은 깜둥이 새끼들이 야만적이라고 말하고, 성욕이 남성적인 본능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지배적인 관념 너머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런 주장은 유럽 강대국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끔찍하게 착취했다는 사실과 남자들이 거대 자본들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외면합니다. 진짜 문제는 그겁니다.
팩트는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지배적인 관념이죠. 자본주의 세상에서 기득권들은 계급 구조에 유리한 사상들을 꾸준히 퍼뜨리고, 계급 구조를 비판하는 사상들을 꾸준히 검열합니다. 그래서 오직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만 사람들은 팩트를 이야기할 뿐입니다. 사실 그건 팩트가 아니죠. 그저 세상의 일부분이나 겉표면에 불과하죠. 수박 겉표면을 열심히 핥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수박 속을 먹는다고 착각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수박 겉표면을 수박 속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일부 사실만이 전부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디오 게임 속의 헐벗은 여자 캐릭터가 창작과 표현의 자유라고 말합니다. 흠, 표현의 자유? 하지만 사람들이 지배적인 관념을 숭배하는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가 존재할까요? 헐벗은 여자 캐릭터가 정말 표현의 자유일까요? 광신을 따르는 행위가 자유로운 의지인가요? 팩트 역시 마찬가지겠죠. 정말 팩트를 주장하고 싶다면, 우리는 '헤게모니를 깨야' 합니다. 팩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팩트에 앞서 헤게모니가 훨씬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헤게모니를 깨지 못한다면, 기계 장치 속에서 꾸준히 전기적인 신호들만 받아먹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