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테러 호의 악몽>과 괴수물과 사이언스 픽션 본문
며칠 전에, 그러니까 금요일에 저는 어떻게 비경 탐험과 괴수물이 짝궁을 이루는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댄 시몬스가 쓴 <테러 호의 악몽>을 언급했고, <해저 2만리>나 <스페이스 비글>, <드라운드 어스> 등을 함께 거론했어요. 하지만 <테러 호의 악몽>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해저 2만리>나 <스페이스 비글>이나 <드라운드 어스>와 달리 <테러 호의 악몽>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댄 시몬스는 <일리움>이나 <하이페리온>처럼 굉장한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들을 썼으나, 그것과 상관없이 <테러 호의 악몽>은 SF 소설이 아니에요.
댄 시몬스는 탐사선의 구조와 기이하고 혹독한 극지 환경과 북극 원주민들의 문화를 생생하게 고증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을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부르지 못하겠죠. 물론 저는 <테러 호의 악몽>이 SF 소설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나, 그런 뉘앙스를 풍겼고, 따라서 제 실수입니다. 저는 <테러 호의 악몽>과 <스페이스 비글>을 함께 언급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아무리 고증이 가볍고 하드하지 않다고 해도 어쨌든 <스페이스 비글>은 분명히 SF 소설이라는 울타리에 들어갈 수 있어요. <해저 2만리>나 <콩: 해골섬>이나 <드라운드 어스> 역시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이고요.
제가 <테러 호의 악몽>과 <해저 2만리>와 <스페이스 비글>을 함께 언급한 이유는 비경 탐험과 괴수물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테러 호의 악몽>은 SF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비경 탐험 소설이고 괴수 소설이죠. 그런 관점에서 <테러 호의 악몽>과 <스페이스 비글>은 닮았어요. 따라서 비경 탐험과 괴수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테러 호의 악몽>과 <스페이스 비글>을 함께 논의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테러 호의 악몽>을 읽었을 때, 저는 이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인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게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다소 실망했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 작품은 멋진 비경 탐험 소설이고 괴수 소설입니다. 상상 과학을 덧붙였다면 훨씬 좋았겠으나, 상상 과학에서 출발하지 않았다고 해도, <테러 호의 악몽>은 멋진 이야기에요. <광기의 산맥>이나 <스페이스 비글>을 좋아한다면, <테러 호의 악몽>을 외면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따라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겠죠. "비경 탐험과 괴수와 상상 과학은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그런 관계는 <스페이스 비글>이나 <광기의 산맥>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테러 호의 악몽>은 그런 소설들과 어떻게 다른가?"
비경 탐험과 괴수는 사이언스 픽션만 차지할 수 있는 소재가 아닙니다. 고대 사람들 역시 영웅이 낯선 동굴을 헤매고 괴수를 물리치는 신화나 전설을 지었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처럼 검마 판타지를 대표하는 테이블 게임 역시 던전이라는 탐험과 드래곤이라는 괴수를 이야기하죠. 비경 탐험과 괴수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구태여 사이언스 픽션에 매달릴 이유는 없습니다. 판타지 작가 역시 얼마든지 그 두 요소를 묘사할 수 있어요. 하지만 SF 작가는 비경 탐험과 괴수에서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발상들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판타지 작가는 자신의 마음대로 드래곤이나 그리핀, 크라켄 같은 괴수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독자는 그런 묘사를 좋아하겠으나, 어떤 독자는 왜 상상력이 신화나 전설에 기대야 하는지 생각할 겁니다. 신화나 전설에 관심이 없는 독자는 상상에 논리를 덧붙이고 싶어하겠죠. 즉, 그런 독자는 외삽법을 좋아할 겁니다. 물론 그런 상상의 외삽법 역시 상상이라는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나, 적어도 독자는 외삽법 같은 상상에서 현실과 맞닿은 사안들을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 현실 속의 과학자들은 유전자 조작을 이용해 생체 비행선을 만들지 못하나, 적어도 생체 비행선이라는 상상은 현실 속의 유전 공학이나 생명 윤리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테러 호의 악몽>이 그런 과학적인 사안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이 극지의 흉포하고 기이한 육식동물을 이용해 과학적인 사안들을 논의할 수 있나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댄 시몬스가 소설 속에서 아무리 기이한 육식동물을 상상했다고 해도 그건 과학적인 사안과 별로 연관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멸종하는 북극곰을 연상할지 모르나, 생물 다양성 감소와 기이한 육식동물은 별로 연관이 없습니다. <광기의 산맥>은 어떨까요. 극지의 무시무시한 쇼거스는 과학적인 사안과 연관이 있나요?
글쎄요, 찰스 스트로스는 <또 다른 냉전>에서 쇼거스를 나노 머신 생명체로 묘사했으나, 그건 찰스 스트로스가 재해석한 결과일 뿐이죠. <광기의 산맥> 역시 과학적인 상상력이 약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신이 아니라 외계인에서 출발했고, 따라서 쇼거스는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에 가까워요. <스페이스 비글>의 익스톨이나 쿠알은 훨씬 사이언스 픽션에 가깝고요. 설사 <테러 호의 악몽>과 <광기의 산맥>이 비슷해 보인다고 해도 결정적인 차이는 존재합니다. 하나는 (미약하다고 해도) 상상 과학에서 출발했고, 다른 하나는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테러 호의 악몽>과 <광기의 산맥>을 비교했을 때, 저는 그런 상상 과학보다 비경 탐험과 괴수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습니다. 상상 과학적인 논의를 제외한다면, 얼마든지 <테러 호의 악몽>과 <광기의 산맥>을 비교할 수 있겠죠. 예전에 두 소설을 비교한 것처럼 어떤 소설에 반드시 한 가지 측면만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