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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 미덥지 못한 생태학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 미덥지 못한 생태학

OneTiger 2018. 6. 22. 19:03

켄 워턴이 쓴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은 꽤나 흥미로운 단편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거시적이거나 장대하거나 세상을 획기적으로 뒤집지 않으나, 좀 더 다른 관점에서 생태학 같은 과학을 조명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학문들을 자연 과학이라고 여길 겁니다. 생태학은 그렇게 많은 인기를 끄는 학문이 아니죠. 저는 생태학이 뭔가를 직접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가시적인 성과를 좋아합니다. 과학자들이 항공기나 컴퓨터나 약물을 만든다면, 사람들은 그게 대단하다고 생각할 테고 과학이 위대하다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생태학은 그런 가시적인 결과물을 창출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생태학은 자연 환경에서 생물 다양성이 무슨 관계들을 맺었는지 관측합니다. 이건 분명히 자연 과학적인 방법이나, 뭔가를 직접 생산하지 않습니다. 이런 생태학은 미연에 홍수나 질병이나 환경 오염들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생태학이 그렇게 각종 위험들을 방지한다고 해도, 그건 직접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생태학은 가시적인 생산물을 창출하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은 생태학에 별로 감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생태학은 생물들이 행동하는 양식을 관찰합니다. 하지만 이런 양식은 다양한 변수들을 포함합니다. 이런 양식은 아주 다양한 변수들을 포함합니다. 열 길 물 속을 알아도 사람 마음을 모른다는 속담처럼, 생물들의 행동 양식을 정확하게 계산하기는 어렵습니다. 생물들이 행동하는 양식은 꽤나 추상적인 것 같고, 계량화하기 힘듭니다. 어떻게 인간이 계랑하지 못하는 것이 자연 과학이 될 수 있을까요? 자연 과학적인 방법은 변수들을 통제하고 실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생태학은 자연 과학보다 사회 과학에 어울리는 분야일지 모르죠.


생물학과 깊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생태학은 자연 과학에서 벗어나지 않겠으나, 종종 생태학은 자연 과학보다 사회 과학에 가까워 보입니다. 동물 무리가 행동하는 양식을 관찰하는 생태학자는 사람들이 행동하는 양식을 관찰하는 사회학자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물리학 같은 하드 과학과 달리, 생태학은 소프트 과학이 되고, 사람들은 생태학을 자연 과학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는 모든 생태학이 추상적이고 사회 과학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태학의 수많은 측면들은 분명히 자연 과학에 속합니다. 하지만 자연 과학으로서 생태학은 물리학보다 인기를 덜 끄는 것 같습니다.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에서 소설 주인공은 어떤 공학자입니다. 이 공학자는 어떤 무인도에 정착했습니다. 아내가 철새들을 관찰하는 생태학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동료들 역시 비슷한 생태학자들이고요.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은 주인공 공학자가 어떻게 생태학자들을 바라보는지 보여줍니다. 생태학자들에게 물리 공학자는 이방인입니다. 물리 공학자는 물리적인 성질을 계산하고 기계를 만드나, 생태학자들은 어떻게 동물들이 행동하는지 관찰합니다. 공학자와 생태학자는 완전히 다르고, 양쪽 모두 똑같은 자연 과학자라고 해도, 공학자는 생태학자가 미덥지 않다고 여깁니다.


아무리 생태학자들이 냉철하게 철새들을 관측한다고 해도, 그건 항공기나 컴퓨터를 만드는 행위와 다릅니다. 공학자는 철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보다 무인기들이 비행하는 원리를 계산하는 쪽을 좋아합니다. 저는 이런 대비가 아주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기계와 생명체. 금속과 유기체 조직. 인공적인 것과 천연적인 것. 이런 대비는 생체 장비, 살아있는 기계로 발전할 수 있겠죠.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은 그런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나, 관점 그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종종 과학자들은 생명체 역시 살아있는 로봇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생명체와 기계는 별로 멀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계는 우리 인간이 만든 결과물이고, 생명체는 자연 발생적으로 탄생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각종 작물들과 가축들을 개량하고 새로운 개조 생명체를 만든다고 해도, 그것들의 원본은 자연 발생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계들이 등장했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명체는 그렇지 않고, 아무리 우리가 개조 생명체들을 만든다고 해도, 우리는 어떻게 생명이 등장했는지 영원히 밝히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광신도들은 계속 지적 설계 같은 헛소리를 떠들겠죠.)


설사 우리 인류가 외계 행성에서 기계 문명이나 기계 생태계를 발견한다고 해도, 우리는 어떤 지적인 생명체들이 그런 기계들을 만들었다고 추정할 겁니다. 그런 기계들이 스스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있겠으나,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그런 기계들을 만들었다고 추정할 겁니다. 그런 추정은 훨씬 설득력이 높겠죠.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생명체들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체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왜 동물들이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동물 관찰 연구는 별로 엄중하지 않은 과학 같습니다.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에서 소설 주인공이 생태학을 미덥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생태학이 엄중하지 못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생태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대중적인 관점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대중적인 관점은 생태학을 무시하고 생태학이 전달하는 가치를 왜곡할지 모릅니다. 흔히 우리가 과학자를 연상할 때, 우리는 실험 도구를 사용하거나 뭔가 첨단 장비를 조작하는 사람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자연 환경 속에서 동물들을 관찰하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진지한 과학자보다 아마추어 연구자에 가깝다고 여길 겁니다.


제인 구달 같은 사람은 분명히 과학자입니다. 하지만 리처드 파인만 같은 과학자와 제인 구달은 서로 다른 위상을 드러냅니다. 리처드 파인만은 훨씬 대중적인 자연 과학자에 가깝습니다. 생물학자 역시 생태학자와 많이 다릅니다. 첨단 제약 산업을 연구하는 생물학자는 동물 무리를 관찰하는 생태학자보다 훨씬 자연 과학자에 가깝게 보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소멸의 땅>이 생물학자가 아니라 생태학자를 이야기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생물학은 뭔가를 창출하고 생산하는 학문이 될 수 있으나, 생태학은 그렇지 않죠.



이는 생태학에게 그런 가능성이나 잠재력이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생태학 역시 분명히 자연 과학입니다. 하지만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생물학에 비해 생태학은 엄중하지 않고 뭔가를 창출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은 그런 시각을 보여줍니다. 이 소설은 결국 그런 시각이 그저 오해에 불과하다고 해명합니다. 소설 주인공 공학자는 철새들을 관찰하고 철새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태학이 엄중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만약 엄중함이 기준이 된다면, 생태학은 다른 자연 과학들보다 꽤나 뒤쳐질 겁니다.


저는 인터넷 어딘가에서 수학이나 물리학, 화학 등이 생물학을 훨씬 앞서가는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건 <위험한 과학책>을 쓴 랜들 먼로가 그린 그림일 겁니다. 그림 속에서 생물학은 수학이나 물리학, 화학보다 훨씬 뒤쳐쳤고, 그건 생물학이 별로 엄중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생물학이 별로 엄중하지 못하다면, 생태학은 훨씬 소프트 자연 과학에 가깝겠죠. 그리고 생태학이 별로 엄중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생태학이 연구한 결실을 무시할지 모르죠. 생태학은 자동차나 항공기나 선박이나 약물을 만들지 않아요. 이게 무슨 자연 과학일까요.



생태학자들이 숲을 자세히 관찰한다면, 그들은 홍수 같은 재난을 방지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연구 결과는 굉장히 중요하고, 어쩌면 자동차나 컴퓨터 생산보다 훨씬 중요할지 모르죠. 하지만 사람들은 삼림 관찰보다 자동차 생산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겠죠. 어쩌면 이건 산업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일지 모릅니다. 산업 자본주의는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고 파는 과정을 선호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생산하지 않거나 적당히 생산한다면, 산업 자본주의는 당장 힘을 잃을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뭔가를 계속 생산하라고 주문합니다. 자본주의는 그저 관찰하거나 연구하거나 보존하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시장을 확장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계속 더 많은 이윤을 쌓기 원하고, 그래서 계속 뭔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설사 그게 과잉 생산으로 이어지고, 사회 전체가 그 생산량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멈추지 않습니다. 옛날 동화에는 멈추지 않고 소금을 생산하는 멧돌이 나옵니다. 멧돌은 과잉 소금 생산으로 엄청난 재앙을 불렀죠. 자본주의는 그런 멧돌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뭔가를 생산하라고 계속 주문합니다. 우리는 그런 주문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뭔가를 계속 만드는 공학이나 화학을 선호할지 모릅니다. 이는 그저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나, 어쩌면 이런 추측은 완전히 틀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SF 소설들 역시 어느 정도 이런 관점을 드러낼지 모릅니다. SF 소설들은 뭔가를 계속 만들기 좋아합니다. SF 소설들은 로봇을 만들고, 우주선을 만들고, 강화복을 만들고, 나노 기계들을 만듭니다. SF 소설들은 인간들이 계속 뭔가 첨단 장비를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드 SF 소설은 기술 애호적인 SF 소설입니다. 자연 현상을 관찰하는 행위에 치중하는 SF 소설들이 상대적으로 많을까요? SF 세상에 그런 소설들이 많을까요? 글쎄요, 저는 자연 현상을 관찰하는 소설보다 첨단 장비를 만드는 소설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SF 소설은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SF 소설은 탄생했습니다.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는 엄청난 생산력을 자랑하고, 따라서 SF 소설은 그런 생산력을 선호할 겁니다. SF 소설 역시 뭔가를 계속 만드는 행위를 좋아하겠죠. 그래서 SF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뭔가를 계속 만들고 만들고 또 만들겠죠. 사람들은 그저 관찰이나 탐사에서 머물지 않을 겁니다. 관찰이나 탐사에 치중하는 소설들 역시 많겠으나, 그런 소설들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기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SF 소설 속에서도 사람들은 계속 기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에서 생태학자들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원합니다. 새들이 이상하게 행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생태학자들은 어떤 첨단 장비가 문제를 일으켰을 거라고 추정합니다. 생태학자들은 첨단 장비를 다루는 공학자들을 초청하고, 공학자들에게 문제를 설명하기 원해요. 하지만 소설 주인공 공학자는 그런 설명이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할 거라고 반박합니다. 공학자들은 믿을 수 있는 자료를 원합니다. 생태학자에게 철새들의 행동 양식은 믿을 수 있는 자료이나, 공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인공 공학자의 표현처럼) '빌어먹을 신천옹'은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깐깐한 과학자들이 야생 동물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느껴요. 과학자들(공학자들)이 그렇게 느낀다면, 일반인들은 훨씬 까칠하게 생태학을 평가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고작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이나 동물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무슨 과학이 되느냐고 반박할지 모르죠. 어쩌면 그런 행위(동물 무리를 관찰하는 행위)가 너무 일상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태학을 우습게 여길지 모르죠. 사람들은 지식인이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거창하고 어렵고 복잡한 지식이 진짜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지식이 일상적이고 쉽고 간결하다면, 아무리 그 지식이 중요한 교훈을 전달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학계가 너무 일상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어떤 지식들은 복잡합니다. 어떤 지식들은 간결해지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쉽게 익히지 못하기 때문에 복잡한 지식은 소수만이 독점하는 권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권력자들은 지식이 계속 복잡하기 원할 테고, 사람들이 간단한 지식을 추구하기 원하지 않겠죠. 갈수록 지식이 복잡해지는 이유들 중 하나는 그것 때문일지 모르죠.


그래서 소수 지식인 계층은 다수 농민이나 노동자 계층과 갈라지고, 소수 지식인 계층은 권력자가 될지 모르죠. 때때로 우리는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사실을 숭배합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복잡한 함수들을 들이댈 때, 아무리 결과가 엉터리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걸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복잡함입니다. 지식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에서 공학자들 역시 비슷한 시각을 드러냅니다.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은 단편 소설이고, 위와 같은 주제들을 크게 강조하지 않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큰 것처럼, 어쩌면 저는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을 너무 과대 해석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동안 저는 저런 주제들을 머릿속에 떠올렸습니다. 저는 독자들이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에서 저런 주제들을 충분히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흠, 예전에 저는 폭발물 처리반과 군견 병사들이 모의 훈련에 참가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폭발물 처리반은 금속 탐지기를 이용했고, 군견 병사들은 당연히 폭발물 탐지견을 이용했죠.


누군가는 탐지견보다 금속 탐지기가 훨씬 믿음직스럽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왜? 탐지견이 동물이고, 금속 탐지기가 기계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런 사고 방식은 법정에 영향을 미칠 겁니다. 아무리 탐지견이 중요한 흔적을 포착했다고 해도, 법정에서 판사는 물리적인 증거로 그걸 인정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탐지견이 동물이기 때문이죠. 저는 그런 판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동물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래서 인간은 동물보다 기계를 신뢰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기계는 우리가 만든 결과물이죠. 이런 사례들은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과 아무 관계가 없지 않겠죠.



동시에 생태학자들이 등장하는 소설로서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은 생태적인 재난을 경고합니다. 자본주의는 뭔가를 계속 만들고 시장을 넓히라고 강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자본주의는 파국적인 재난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은 자본주의를 강렬하게 비판하지 않으나, 어떻게 자본주의가 파국으로 이어지는지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사실 이게 너무 흔한 사례이기 때문에 제가 구태여 길게 설명할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사람들은 뭔가 대대적인 공사가 벌어진다면 그게 큰 돈을 벌어줄 거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런 커다란 공사들은 자연 경관과 삶을 훼손하고, 약자들과 야생 동물들에게 고통을 안깁니다. <철새 이동 경로의 수정>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나, 이건 분명히 자본주의가 저지르는 전형적인 착취들 중 하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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