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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부엌>,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 밀렵과 야생 동물 본문

생태/문화·기술로서 자연

<책들의 부엌>,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 밀렵과 야생 동물

OneTiger 2024. 1. 4. 08:10

[비디오 게임들은 종합 예술과 쌍방향 관계를 결합합니다.]



소설과 영화. 어떤 것이 폭력적인가요? 소설과 영화 중에서 어떤 것이 폭력적인가요? 대답은 전자보다 후자일 수 있습니다. 소설보다 영화는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어라,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전자보다 후자가 폭력적인가요? 소설보다 영화가 종합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전투를 묘사할 수 있습니다. 병사들은 소총들을 사격하고 유탄들을 던집니다. 어떤 병사들은 로켓들을 날립니다. 전차들은 포탄들을 날립니다. 전투기들은 기관총들을 사격하고 미사일들을 날립니다. 구축함들은 미사일들, 어뢰들을 날립니다. 소설은 이것들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글자들입니다.

 

아무리 소설이 이 전투들을 묘사한다고 해도, 이 전투들은 글자들입니다. 이것들은 사회적인 기호들입니다. 이건 글자들이 후천적이라는 뜻입니다. 이것들은 선천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소설 독자가 이 전투들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독자는 글자들을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소설 독자가 글자들을 해석하지 못한다면, 독자는 이 전투들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비단 전쟁 소설만 아니라 다른 소설들 역시 똑같습니다. 소피 킨셀라는 <스타벅스에 간 소녀>를 썼습니다. <스타벅스에 간 소녀>는 영국 소설입니다. 이건 영어 문화에 속합니다.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독자는 영어를 해석합니다.



만약 일본 독자가 영어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이 독자는 <스타벅스에 간 소녀>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일본 독자는 영어를 해석해야 합니다. 스미노 요루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썼습니다. 흐음, 비록 이 제목이 다소 끔찍하다고 해도, 이 소설은 끔찍하지 않습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일본 소설입니다. 이건 일본어 문화에 속합니다. 만약 독자가 이 소설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독자는 이 언어를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남한 독자가 일본어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이 독자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언어는 소설을 구성합니다.

 

언어(글자들)가 소설을 구성하기 때문에, 이건 언어 예술입니다. 소설이 언어(글자들)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하기 위해 독자는 글자들을 해석해야 합니다. 김지혜 작가는 <책들의 부엌>을 썼습니다. <책들의 부엌>은 남한 소설입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어 문화에 속합니다. 만약 독자가 이 소설을 이해하기 원한다면, 독자는 한국어를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영국 독자가 한국어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이 독자는 <책들의 부엌>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이 독자는 한국어를 해석해야 합니다. 비단 이 소설들만 아니라 다른 많은 소설들 역시 언어들에게 기반합니다.



만약 소피 킨셀라가 일본어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소피 킨셀라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스미노 요루가 한국어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스미노 요루는 <책들의 부엌>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김지혜 작가가 영어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김지혜 작가는 <스타벅스에 간 소녀>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스타벅스에 간 소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책들의 부엌>처럼, 다른 많은 소설들은 언어들에게 기반합니다. 만약 독자가 글자들을 해석하지 못한다면, 독자는 소설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 독자에게 글자들은 높은 장벽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소피 킨셀라가 일본어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소피 킨셀라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이 사례처럼, 소설 독자에게 글자들은 높은 장벽이 됩니다. 소설은 높은 장벽(글자들)을 포함합니다. 소설과 달리, (실사) 영화에서 언어는 전부가 아닙니다. (실사) 영화에서 언어보다 영상은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고지라: 마이너스 원>은 일본 영화입니다. 이게 일본 영화이기 때문에,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가 일본어에게 기반하는 것처럼, <마이너스 원>은 이 언어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 언어가 전부인가요? 필연적으로, 극장 관객이 일본어를 해석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비록 극장 관객이 이 언어를 해석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관객은 고지라가 구축함을 파괴한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일본어는 이 장면을 인식하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가 아닙니다. 이 언어 없이, 극장 관객은 고지라가 구축함을 파괴한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비단 이 장면만 아니라 다른 장면들 역시 똑같습니다. 비록 극장 관객이 일본어를 해석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 관객은 고지라가 방사열선을 뿜고 건물들을 파괴한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 언어 없이, 극장 관객은 이 장면을 인식합니다. 극장 관객이 이해하는 것처럼, 영화에서 언어보다 영상은 커다란 비중입니다.

 

만약 소설 독자가 일본어를 해석하지 못한다면, 독자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해석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 독자와 달리, 비록 극장 관객이 일본어를 해석하지 못한다고 해도, 극장 관객은 고지라가 방사열선을 뿜고 건물들을 파괴한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 사례는 소설보다 영화를 이해하기가 훨씬 쉽다고 증명합니다. 소설이 언어(글자들)에게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언어보다 영상이 커다란 비중이기 때문입니다. 글자들은 사회적인 기호들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합의하지 않는다면, 이 기호들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이 기호들은 추상적입니다. 글자들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소설은 글자들에게 기반합니다. 영화에서 언어보다 영상은 커다란 비중입니다.]



소설이 글자들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글자들이 사회적인 기호들이기 때문에, 이 기호들이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소설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글자들, 이 기호들은 추상적입니다. 소설은 추상적입니다. 독자가 소설을 해석하는 동안, 독자는 가시적인 장면을 상상합니다. 만약 독자가 상상하지 않는다면, 소설은 가시적인 장면을 선사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소피 킨셀라, 스미노 요루, 김지혜 작가가 좋은 문장들, 멋진 문장들, 재미있는 문장들을 쓴다고 해도, <스타벅스에 간 소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책들의 부엌>은 가시적인 장면들을 선사하지 않습니다. 이건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가시적으로, <고지라: 마이너스 원>은 고지라 외모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와 달리, 가시적으로, <책들의 부엌>은 다이앤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시우는 다이앤이 예쁘다고 느낄 겁니다. 아무리 다이앤이 예쁘다고 해도, 가시적으로, 소설 독자는 이 등장인물 외모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김지혜 작가가 좋은 문장들을 쓴다고 해도, 가시적으로, 소설 독자는 다이앤 외모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마이너스 원>에게는 이 구조적인 문제가 없습니다. 영상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비단 영상만 아니라 다른 것들 역시 똑같습니다. 소설이 여러 소리들을 포함하나요?



<책들의 부엌>이 소리들을 포함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소설 독자는 다이앤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김지혜 작가가 좋은 문장들을 쓴다고 해도, 독자는 다이앤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건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책들의 부엌>과 달리, <마이너스 원>은 여러 소리들을 포함합니다. 극장 관객은 여러 소리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약 고지라가 포효한다면, 극장 관객은 이 포효를 들을 겁니다. 이 영화는 비단 이 포효만 아니라 다른 여러 소리들 역시 포함합니다. <책들의 부엌>은 죽은 세계입니다. 아아…, 이 세계에서 아무 소리도 절대, 절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김지혜 작가가 좋은 문장들을 쓴다고 해도, 이 세계에서 아무 소리도 절대, 절대 존재하지 않습니다. <책들의 부엌>과 달리, <마이너스 원>은 살아있는 세계입니다. 고지라의 포효부터 구축함 포격까지, 이 세계에서 여러 소리들은 존재합니다. 죽은 새는 노래하지 않습니다. 죽은 새는 조용합니다. 조용한 세계는 죽은 세계입니다. 죽은 세계에서 아무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으음…, <책들의 부엌>에서 아무 소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죽은 세계입니다. 이건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영화는 살아있는 세계입니다. 극장 관객이 여러 소리들을 듣기 때문에, 이 세계는 살아있습니다.



비단 소리들만 아니라 배경 음악들 역시 똑같습니다. <책들의 부엌>은 배경 음악들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김지혜 작가가 좋은 문장들을 쓴다고 해도, 소설 독자는 다이앤 노래들을 듣지 못합니다. 이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이앤 노래들은 이 소설을 장식하지 않습니다. <책들의 부엌>과 달리, <마이너스 원>은 사토 나오키의 <디바인>을 포함합니다. 극장 관객은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디바인>은 이 영화를 장식합니다. 이 음악 덕분에, 아아~, 극장 관객은 훨씬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독자는 이 감정을 느끼지 않습니다. 소설이 배경 음악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소설보다 영화에서 배경 음악들은 훨씬 깊은 감정을 자극합니다. 아무리 김지혜 작가가 좋은 문장들을 쓴다고 해도, 이 소설가는 이 감정을 자극하지 못합니다. 영상부터 소리까지, 소설보다 영화는 살아있는 세계입니다. 소설보다 영화가 살아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전자보다 후자에서 살인은 훨씬 커다란 폭력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설이 전투를 묘사한다고 해도, 이게 죽은 세계이기 때문에, 에이…, 이 세계에서 살인은 밋밋한 폭력이 됩니다. 만약 영화가 전투를 묘사한다면, 이게 살아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우와~, 살인은 커다란 폭력일 겁니다. 그래서 소설보다 영화는 폭력적입니다.



아무리 소설이 전투를 묘사한다고 해도, 가시적으로, 독자는 병사가 붉은 피를 쏟는다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만약 영화가 전투를 묘사한다면, 아…, 가시적으로, 극장 관객은 병사가 붉은 피를 쏟는다고 인식할 겁니다. 소설 독자보다 극장 관객이 병사의 붉은 피를 인식하는 것처럼, 전자보다 후자는 폭력적입니다. 비록 병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고 해도, 소설은 이 비명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이 비명을 절대 듣지 못합니다. 독자와 달리, 아아…, 극장 관객은 이 비명을 듣습니다. 이 관객이 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듣는 것처럼, 소설보다 영화는 폭력적입니다.

 

아무리 병사들이 소총들을 사격한다고 해도, 소설 독자는 이 소리들을 듣지 못합니다. 소설 독자와 달리, 극장 관객은 이 소리들을 듣습니다. 극장 관객은 두 귀가 너무 따갑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소리들이 너무 시끄럽기 때문에, 아아…, 극장 관객은 전투를 겪을 수 있습니다. 비록 이게 직접 경험보다 간접 경험이라고 해도, 소설 독자보다 극장 관객은 전투를 겪을 수 있습니다. 소설 독자보다 극장 관객이 전투를 겪기 때문에, 전자보다 후자는 폭력적입니다. 거대 괴수 덕후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거대 괴수 덕후들은 소설보다 (실사) 영화를 좋아합니다. 소설보다 이게 폭력적이기 때문입니다.



[글자들과 달리, 가시적으로, 이 그림은 고지라의 흉악한 외모를 보여줍니다.]



고지라가 군함을 파괴하는 것처럼, 이 괴수는 폭력적입니다. 소설보다 영화가 폭력적이기 때문에, 전자보다 후자가 폭력적인 고지라를 표현하기 때문에, 거대 괴수 덕후들은 소설보다 (실사) 영화를 좋아합니다. 이건 언제나 소설보다 영화가 폭력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은 언어(글자)들에게 기반합니다. 이건 추상적인 것을 서술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심리가 있습니다. 심리는 추상적인 것입니다. 언어가 추상적인 것을 서술하기 때문에, 심리가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언어는 심리를 서술합니다. (심리처럼, 이념, 사상, 세계관은 추상적입니다. 언어는 이 추상적인 것들을 서술합니다.)

 

영화보다 소설이 글자들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영화보다 소설은 심리를 서술합니다. 만약 병사가 전투를 참혹하다고 느낀다면, 영화보다 소설은 이 심리를 서술할 겁니다. 영화보다 소설이 이 심리를 서술하는 것처럼, 어떤 독자들은 영화보다 소설이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들은 다양한 해석들을 보장합니다. 문화·예술들이 다양한 해석들을 보장하기 때문에, 비록 소설보다 영화가 폭력적이라고 해도, 이건 절대적인 규칙이 아닙니다. 이게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영화보다 소설이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글자들은 추상적입니다.



소설이 글자들에게 기반하기 때문에, 소설에서 폭력은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영화가 영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영화에서 폭력은 훨씬 가시적입니다. 그래서 소설보다 영화는 폭력적입니다. 적어도, 소설보다 영화에게는 훨씬 가시적인 폭력을 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극장 관객은 병사를 조종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영화가 폭력적이라고 해도, 극장 관객은 적군을 죽이지 못합니다. 아무리 영화에서 병사가 소총을 사격하고 적군을 죽인다고 해도, 극장 관객은 그저 이 장면을 바라볼 뿐입니다. 극장 관객은 이 장면에게 개입하지 못합니다. 극장 관객과 영화 병사는 일방적인 관계입니다.

 

비록 극장 관객이 조종하지 않는다고 해도, 영화에서 병사는 소총을 사격하고 적군을 죽입니다. 극장 관객과 상관없이, 영화에서 병사는 소총을 사격하고 적군을 죽입니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전쟁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소비에트 연방 저격수는 나치 병사들을 죽입니다. 만약 극장 관객이 조종하지 않는다면, 소비에트 연방 저격수가 나치 병사들을 죽이지 않나요? 극장 관객이 조종하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 저격수가 나치 병사들을 죽이나요? 만약 극장 관객이 실수한다면, 나치 병사들이 소비에트 연방 저격수를 죽이나요? 아니, 극장 관객은 이 장면에게 절대 개입하지 못합니다.



극장 관객과 상관없이, 소비에트 저격수는 나치 병사들을 죽입니다. 소비에트 저격수가 이 병사들을 죽이는 동안, 극장 관객은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소비에트 저격수와 극장 관객은 쌍방향 관계가 아닙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다릅니다. <스나이퍼: 엘리트 4>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여자) 소비에트 저격수를 조종할 수 있습니다. (여자) 소비에트 저격수는 나치 병사들을 죽이고 거점을 보호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조종하지 않는다면, 소비에트 저격수는 나치 병사들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조종하기 때문에, 소비에트 저격수는 나치 병사들을 죽입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실수한다면, 나치 병사들은 소비에트 저격수를 죽일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실수하고 소비에트 저격수가 죽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는 개입할 수 있습니다. 극장 관객이 절대 개입하지 못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가 개입하기 때문에, 극장 관객과 게임 플레이어는 다릅니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와 극장 관객은 일방적인 관계입니다. 극장 관객과 달리, <스나이퍼: 엘리트 4>와 게임 플레이어는 쌍방향 관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조종하고 소비에트 저격수가 사격하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와 소비에트 저격수는 하나가 됩니다. 둘은 훨씬 가까운 관계입니다.



<스나이퍼: 엘리트>는 비단 비디오 게임만 아니라 보드 게임이기도 합니다. 이 보드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여자) 소비에트 저격수를 조종하고 나치 병사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드 게임과 비디오 게임은 다릅니다. 보드 게임은 소설에 가깝습니다. 영상부터 배경 음악까지, 소설이 많은 것들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영상부터 배경 음악까지, 보드 게임은 많은 것들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 게임과 달리, 비디오 게임이 많은 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영화처럼, 이 게임은 종합 예술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영화가 종합 예술이라고 해도, 영화보다 비디오 게임은 쌍방향 관계입니다.

 

비단 <스나이퍼: 엘리트 4>만 아니라 다른 비디오 게임들 역시 똑같습니다. <레인보우 식스: 로그 스피어>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특수 부대를 조종하고, 총기들을 사격하고, 테러리스트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조종하기 때문에, 특수 부대는 적들을 죽입니다. 소설보다 영화는 폭력적입니다. 영화가 종합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처럼, 비디오 게임은 종합 예술입니다. 이건 비단 종합 예술만 아니라 쌍방향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건 가장 폭력적입니다. 소설, 보드 게임, 영화보다 비디오 게임은 폭력적입니다. 이건 비디오 게임들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 장면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비록 비디오 게임이 폭력적이라고 해도, 이건 허구(픽션)입니다. 비록 <레인보우 식스: 로그 스피어>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테러리스트들을 죽인다고 해도, 이건 진짜 살인들이 아닙니다. 비록 게임 플레이어가 마우스를 클릭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아무도 죽이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이 허구(픽션)이기 때문에, 비록 <로그 스피어>가 가장 폭력적이라고 해도, 이건 나쁘지 않습니다. 허구보다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에디 프라이스를 조종합니다. 허구보다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살아갑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입니다. 현실에서 많은 것들은 폭력을 부채질합니다.

 

진짜 문제는 비디오 게임(허구)보다 '현실'입니다. 비단 <레인보우 식스: 로그 스피어>만 아니라 다른 비디오 게임들 역시 똑같습니다. 게다가, <로그 스피어>와 달리, 어떤 비디오 게임들에서 폭력보다 다른 것들은 핵심 주제들이 됩니다. <기번: 비욘드 더 트리스>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이게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에, 영화가 종합 예술인 것처럼, <기번: 비욘드 더 트리스>는 종합 예술에 가깝습니다. 영상부터 음악까지, <비욘드 더 트리스>는 많은 것들을 포함합니다. 영화와 달리,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주인공을 조종합니다. 제목이 뜻하는 것처럼, 이 게임에서 주인공은 긴팔 원숭이입니다.



아무리 영화가 종합 예술이라고 해도, 영화보다 <비욘드 더 트리스>는 쌍방향 관계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긴팔 원숭이를 조종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와 긴팔 원숭이는 하나가 됩니다. 입체적인 열대 밀림에서 긴팔 원숭이가 활공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짜릿한 느낌, 아찔한 느낌, 빠른 느낌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극장 관객보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 느낌들을 겪습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이 느낌들을 겪는 것처럼, 게임 플레이어와 긴팔 원숭이는 하나가 됩니다. 양쪽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극장 관객보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 야생 동물에게 훨씬 깊은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아, 물론, 이 게임 주인공은 진짜 동물이 아닙니다. 이 게임 주인공은 그저 허구적인 등장인물(캐릭터)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허구보다 현실입니다. <비욘드 더 트리스>는 밀렵이 긴팔 원숭이들을 괴롭힌다고 묘사합니다. 현실에서 밀렵이 긴팔 원숭이들을 괴롭히기 때문에, 이 허구는 현실을 반영했을 겁니다. 왜 밀렵이 긴팔 원숭이들을 괴롭히나요? 왜 밀렵이 야생 동물들을 괴롭히나요? 많은 사례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밀렵꾼들이라고 증명합니다. 돈을 벌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가난합니다. 왜 돈을 벌기가 어렵나요? 세계화 자본주의는 극심한 가난을 유발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극심한 가난을 유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가난합니다. 특히, 서구 제국주의는 세계화 자본주의를 주도합니다. 오랜 동안, 서구 제국주의는 제3세계를 수탈했습니다. 그래서 제3세계 사람들은 훨씬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밀렵은 좋은 돈벌이가 됩니다. 이건 밀렵이 자본주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비욘드 더 트리스>가 종합 예술, 쌍방향 관계이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긴팔 원숭이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밀렵은 이 야생 동물을 괴롭힙니다. 이건 자본주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는 이 악랄한 경제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 게임 <Gibbon: Beyond the Trees> 스크린샷 출처:
https://store.steampowered.com/app/1837330/Gibbon_Beyond_the_Tr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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