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창작물이 말하지 않는 것, 지배적인 관념 본문
[이건 외계 개척 행성입니다. 하지만 이건 절대 순수한 상상력이 아니고, 여기에는 생산 조건들이 있어요.]
"비평은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 비평은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밝히는 것과 동시에 그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으나 말하지 못한 것까지 함께 밝혀야 한다. 전자가 공감이라면 후자는 비평이다. 이런 각오와 균형이 없는 비평은 제정신을 가지고 쓴 비평이 아니다."
황석영이 쓴 <심청>이 나왔을 때, 이렇게 작가 장정일은 쓰게 혹평했습니다. 사실 이 혹평은 소설 <심청>보다 소설 <심청>의 해설을 지적합니다. 소설 <심청>의 해설은 <심청>이 근대성, 모더니티를 멋지게 해석했다고 칭찬했습니다. 장정일은 이런 해석이 진부한 주례사 비평이고 엉터리 비평이라고 깝니다. <심청>의 해설에는 객관성이 없습니다. <심청>의 해설은 <심청>이 뛰어나다고 일방적으로 호평하고 <심청>이 드러내는 단점과 한계를 지적하지 많습니다. 장정일은 비평에 균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평은 창작물이 말하는 것과 창작물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함께 언급해야 합니다.
<심청>의 해설은 소설 <심청>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심청>의 해설은 그저 황석영 작가와 소설 <심청>에게 열렬히 공감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장정일은 이게 그저 상투적인 해설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건 비단 소설 <심청>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닐 겁니다. 소설, 만화, 연극, 영화, 게임을 비롯해 수많은 창작물들은 어떤 것들을 말하고 어떤 것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창작물들이 어떤 것들을 말하지 않을 때, 왜 창작물들이 그것들을 말하지 못하나요? 여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으나, 지배적인 관념은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할 겁니다.
"아, 씨발, 왜 그렇게 존나게 골치 아프게 따져? 지배적인 관념? 왜 우리가 그걸 따져야 해? 왜 우리가 비평해야 해? 비평이 반드시 필요한가? 창작물이 뭔가를 말하든, 뭔가를 말하지 않든, 나체로 삼바춤을 추든, 왜 우리가 지배적인 관념을 따져야 해? 이렇게 비평가들이 존나게 골치 아프게 떠들기 때문에, 작가들은 비평가들을 싫어할 거야. 이언 매큐언을 봐. 이언 매큐언은 비평문을 읽지 않아. 비평가들이 존나게 이상한 소리들을 떠들기 때문이야."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비평이 필요하지 않다고 따질지 모릅니다. 심지어 소설 작가들은 비평가들을 너무 싫어할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는 모든 비평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좀 더 나은 것이 될 수 있었어."
네, 그렇습니다. 이 문구는 모든 비평을 요약합니다. 모든 비평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좀 더 나은 것이 될 수 있었어." 모든 비평은 좀 더 나은 것을 말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좀 더 나은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정체 상태에서 우리는 머물 겁니다. 문제는 하늘에서 이런 정체 상태가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두룩한 3류 저질 포르노 소설들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3류 저질 포르노 소설을 비평하지 않는다면, 가부장적인 편견 속에서 우리는 머물 겁니다. 우리는 가부장적인 편견을 깨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왜 가부장적인 편견 속에서 우리가 3류 저질 포르노 소설을 읽는지 알아야 합니다.
소설 작가에게는 사상과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 작가는 3류 저질 포르노를 쓸 수 있습니다. 독자가 3류 포르노를 읽고 껄떡댄다고 해도, 이것 역시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속할 겁니다. 그 자체로서 이런 껄떡질은 잘못이 아닙니다. 왜곡된 성 관념 때문에 독자가 반드시 포르노 소설을 읽을까요? 3류 포르노 소설이 여자의 몸을 왜곡한다고 해도, 그게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 독자는 포르노 소설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독자는 왜곡된 성 관념보다 문체나 필력이나 형식 구조나 단어 선정들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독자는 내용(왜곡된 성 관념)보다 형식(문체와 필력과 문단 구조)을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내용이 3류라고 해도, 표현 방법은 1류일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내용과 표현 방법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예술 평론가들이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를 호평한다고 해도, 예술 평론가들은 해바라기를 연구하는 식물학자들이 아닙니다. 그림 <해바라기>를 이해하기 위해 예술 평론가들은 대학 식물학과에 수강 신청서를 내거나 식물학자들을 초빙하거나 식물학 도감을 뒤적이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꽃밭에서 해바라기가 아름답고 당당하게 자란다고 해도, 예술 평론가들은 해바라기를 칭찬하지 않을 겁니다. 꽃밭의 해바라기는 그림이 아니고, 여기에는 강렬한 표현 방법이 없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렸기 때문에, 예술 평론가들이 <해바라기>를 호평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고흐가 해바라기가 아니라 장수 거북이나 아무르 호랑이나 스테고사우루스를 그렸다고 해도, 예술 평론가들은 고흐 그림을 호평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비단 내용만이 아니라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입니다. 예술 평론가들에게 식물학 지식이 없다고 해도, 그들은 얼마든지 <해바라기>를 호평할 수 있습니다. 그림 <해바라기>가 강렬한 표현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람들은 <해바라기>를 감상합니다. 식물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것과 그림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람들이 식물 해바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은 그림 <해바라기>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이것처럼, 독자가 3류 저질 포르노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내용보다 표현 방법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포르노 소설이 인상적으로 허구적인 장치들(시점이나 추상화나 비유나 서술 문장)을 동원하기 때문에, 독자는 포르노 소설을 즐겁게 읽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왜곡된 성 관념 때문에 독자가 3류 포르노 소설을 읽는다고 비판하지 못합니다. 다른 가능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말 내용 때문에 독자가 3류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소설은 허구입니다. 허구는 현실이 아닙니다. 허구는 명제가 아니고, 우리는 허구로 사실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이것과 반대로 독자는 페미니즘 소설을 이용해 삐뚤어진 성 관념을 즐길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 소설이 남자가 여자를 성 폭행한다고 묘사할 때, 독자는 이 장면을 이용해 껄떡댈 수 있습니다. 소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가 섹스 장면을 묘사할 때, 독자는 이 장면에 가부장적인 편견을 주입할 수 있습니다. 소설 <식물 아내>에서 남자 농부가 식물 아내를 덮칠 때, 독자는 강간을 연상하고 이 장면을 즐길 수 있습니다. 소설 <늑대 여자>에서 남자가 늑대 여자를 길들일 때, 독자는 늑대 여자보다 남자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습니다. 문학은 수많은 해석들을 낳고, 작가는 수많은 해석들을 막지 못합니다.
만약 독자가 페미니즘 소설을 이용해 껄떡댈 수 있다면, 페미니즘 소설이 섹스 장면과 성 폭행 장면을 묘사하지 말아야 하나요? 만약 작가가 성 폭행 장면을 소설 속에 집어넣는다면, 이게 반드시 잘못이 되나요? 작가가 껄떡질을 의도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소설을 이용해 얼마든지 껄떡댈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 소설 역시 삐뚤어진 자위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독자가 해석할 때 독서가 존재하기 때문에, 소설 작가는 이걸 원천봉쇄하지 못합니다. 리처드 로티 같은 실용주의 철학자가 무궁무진한 해석들을 주장하는 것처럼, 페미니즘 소설은 가부장적인 해석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리처드 로티가 틀렸다고 반박합니다. 분명히 리처드 로티의 주장에는 치명적인 결함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작가는 수많은 문학 해석들을 막지 못합니다. 게다가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록산 게이가 말하는 것처럼, 페미니스트들 역시 창작물들을 이용해 가부장적인 편견들을 만납니다. 창작물들이 가부장적인 편견들을 드러낼 때, 페미니스트들이 반드시 이것들을 외면해야 하나요? 하지만 현실 속에서 아주 숱한 창작물들은 가부장적인 편견들을 담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이것들을 절대 소비하지 말아야 하나요? 페미니스트들이 금욕적으로 살아가야 하나요?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같은 창작물이 가부장적인 편견을 담는다면, 페미니스트들이 절대 <너의 이름은>을 관람하지 말아야 하나요?
진짜 문제는 포르노 소설 독자가 속하는 상황입니다. 어떤 고립된 공간 속에서,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이고 초월적인 시공간에서 독자는 껄떡대지 않습니다. 특정한 생산 조건들(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은 3류 저질 포르노를 만듭니다. 현실이라는 생산 조건 없이, 창작물은 나타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하드 SF 작가들조차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하드 SF 작가가 외계 행성 생태계를 묘사하고 싶다고 해도, 하드 SF 작가는 순수하게 상상하지 못합니다. 이건 불가능할 겁니다. 하드 SF 작가는 지구 자연 생태계를 참고하고 여기에서 상상력을 끌어내야 합니다.
지구 자연 생태계에 탄소 기반 생명체들이 있기 때문에, 하드 SF 작가는 탄소 기반 생명체들을 참고하고 규소 기반 생명체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창작물은 현실에서 비롯합니다. 하드 SF 작가가 현실을 참고하는 것처럼, 3류 포르노 작가 역시 현실을 많이 참고할 겁니다. 3류 포르노 작가는 가부장적인 사회라는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독자가 3류 포르노를 읽고 껄떡댈 때, 이건 문제가 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성 차별 관념들과 성 폭행 문화들이 만연하기 때문에, 소설 작가는 3류 포르노를 쓰고 독자는 그걸 읽습니다. 현실에 강간이라는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소설 작가가 쉽게 강간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현실에 강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소설 작가가 순수하게 오직 상상력만으로 강간이라는 폭력을 묘사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자본주의가 페미니즘을 왜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락하고 1차원적인 페미니즘을 열심히 믿습니다. 숱한 사람들은 여자의 당당한 정체성이 페미니즘의 전부라고 착각합니다. 민주당 같은 보수 우파 정당이 1차원적인 페미니즘을 말할 때, 수많은 사람들은 그게 페미니즘의 전부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문재인은 페미니즘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저승에서 클라라 체트킨이 이걸 본다면, 체트킨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분통을 터뜨릴 거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문재인을 페미니즘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근본적인 페미니즘을 쉽게 상상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사람들이 급진적인 페미니즘을 쉽게 만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뭔가가 없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상상하지 못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사고 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3류 포르노 소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3류 포르노 소설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소설 작가는 순수하게 오직 상상력만으로 3류 포르노 소설을 쓰지 못합니다. 가부장 문화라는 현실이 있기 때문에, 작가는 저질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가부장 문화라는 현실 속에서 독자는 지배적인 관념을 재생산할지 모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독자가 3류 포르노를 읽을 때, 이렇게 현실과 창작물은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비평은 이걸 지적하고 이게 문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단 3류 저질 포르노 소설만 아니라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태학 SF 소설들 역시 예외가 되지 못합니다. 비평가는 생태학 SF 소설들이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 지적해야 합니다. 비평가는 어떻게 생태학 SF 소설들이 '생산되는지' 말해야 합니다. 소설 <우주의 개척자>는 개척자들이 외계 위성을 개척한다고 말합니다. 외계 위성에서 개척자들은 새로운 자연 생태계를 조성하고 농사를 짓습니다.
비평가는 얼마나 외계 위성 개척자들이 힘들게 농사를 짓는지, 왜 살아있는 상호 작용이 까다로운지, 무엇이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사회인지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전부가 아닙니다. 비평가는 왜 <우주의 개척자>가 인구 폭발을 걱정하는지 지적해야 합니다. 비평가는 <우주의 개척자>가 자본주의 문제를 외면하고 은폐한다고 지적해야 합니다. 사실 폭력적인 자본주의 체계가 지배적이기 때문에, 이런 현실은 <우주의 개척자>를 만들었습니다. <우주의 개척자>에게는 이런 생산 조건이 있습니다. <우주의 개척자> 이외에 다른 생태학 사이언스 픽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우주의 개척자>처럼, 비디오 게임 <이매진 어스>는 외계 행성 개척을 이야기합니다.
<이매진 어스>는 자본주의 영리 기업들이 우주 시대를 열고 외계 행성들을 개척한다고 말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외계 개척 관리자가 되고 수익과 부를 창출해야 합니다. 하지만 왜 인류 사회가 영리를 추구해야 하나요? 인류 사회는 평등하게 외계 개척 생태계를 관리할 수 있어요. 현실 속에서 세계화 자본주의가 평등한 공동체들을 짓밟기 때문에, 평등한 공동체들은 쉽게 드러나지 못하고, <이매진 어스>처럼 외계 개척 게임 역시 자본주의를 이야기합니다. 비평가는 이런 생산 조건들을 지적해야 합니다. 비평가는 폭력적인 자본주의가 사이언스 픽션들을 만든다고 지적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생태학 SF 비평은 이런 것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