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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진이, 지니>와 <그린 플래닛>, 자연 문학들 본문

감상, 분류, 규정/자연과 문명

<진이, 지니>와 <그린 플래닛>, 자연 문학들

OneTiger 2020. 6. 12. 20:01

[만약 어떤 소설이 자연 생태계, 야생 동물, 환경 보호를 이야기한다면, 이 소설은 자연 문학일 겁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자연 생태계, 야생 동물, 환경 보호를 이야기한다면, 이 소설은 이른바 자연 문학(Nature Literature)이 될 겁니다. 잭 런던은 <야생의 부름>을 썼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썰매개입니다. 소설 초반부에서 동물 주인공은 안락한 문명을 떠나고 거친 야생을 만납니다. 주인공은 거친 야생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나, 점차 주인공은 야생과 동화합니다. 심지어 주인공은 꿈을 꾸고 아득하고 원시적인 분위기에 빠집니다. 나중에 주인공은 야생으로 들어가고 늑대들과 어울립니다. 주인공이 동물이고, 동물이 야생에 빠지기 때문에, <야생의 부름>은 자연 문학일 겁니다.

 

코맥 매카시는 <국경을 넘어>를 썼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소년은 늑대들에게 감동합니다. 하지만 목장 주인들은 늑대들을 없애기 원합니다. 어느 날, 주인공 소년은 덫에 걸린 늑대를 만나고 늑대를 풀어줍니다. 주인공 소년은 늑대와 함께 국경을 넘으나, 상황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이 자연 문학에 속할 수 있나요? 소설 초반부에서 소년과 늑대가 만나기 때문에, 이 소설이 자연 문학에 속하나요? 어떤 독자들은 고개들을 끄덕일 겁니다. 하지만 <야생의 부름>과 달리, 주인공 소년은 늑대들과 함께 지내지 않습니다. 소설 초반부 이후, 더 이상 늑대들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야생의 부름>에서 동물 주인공과 썰매개들, 야생 자연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나, <국경을 넘어>에서 늑대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지 않습니다. 소설 초반부 이후, 더 이상 주인공 소년은 늑대들에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국경을 넘어>는 자연 문학에 속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야생의 부름>이 야생과 동물들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 소설이 자연 문학에 속한다면, <백경>은 어떤가요? 허먼 멜빌은 <백경>을 썼습니다. 소설 주연 등장인물들은 고래잡이들이고, 그들은 야생 동물들을 사냥합니다. 향유 고래를 비롯해 여러 고래들은 야생 동물들입니다. 포경선 피쿼드는 고래들과 치열하게 싸웁니다.

 

소설 화자는 고래 생태를 조사하고, 고래 내부를 관찰하고, 다른 해양 동물들을 언급합니다. <백경>이 자연 문학에 속하나요? 많은 독자들은 고개들을 끄덕일 겁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모비 딕이 자연의 힘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야생의 부름>과 <백경>은 다릅니다. <야생의 부름>에서 인간과 썰매개는 우정을 드러냅니다. <백경>에서 남자 선원들은 여러 고래들을 죽입니다. <야생의 부름>은 우정을 보여주나, 남자 선원들은 사냥꾼입니다. 사냥꾼들은 고래에게 우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야생의 부름>과 <백경>은 똑같이 동물 권리를 중시하지 않으나, <백경>은 훨씬 심합니다.

 

 

비록 <야생의 부름>이 동물 권리를 중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야생의 부름>은 우정을 강조합니다. 반면, 피쿼드 선원들은 고래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피를 반깁니다. 고래가 죽어가고 붉은 피를 뭉클뭉클 뿜는 동안, 포경선 선원들은 쾌재를 부릅니다. <야생의 부름>에서 소설 주인공은 동물입니다. 비록 이 소설이 동물 권리를 중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소설은 동물 시점을 조명합니다. 반면, <백경>에서 소설 등장인물들은 인간들입니다. <백경>은 야생 동물에게 자리를 주지 않습니다. 고래 시점에서 <백경>은 서술하지 않습니다. <야생의 부름>과 <백경>은 대조적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야생의 부름>과 <백경>이 대조적이라고 해도, 분명히 양쪽에서 (야생) 동물들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양쪽은 똑같은 자연 문학에 속할 수 있습니다. 양쪽이 자연 문학에 속하기 때문에, <거인을 바라보다> 역시 자연 문학에 속할 겁니다. 해양 생태학 연구원 엘린 켈지는 <거인을 바라보다>를 썼습니다. <거인을 바라보다>는 고래 생태학 서적입니다. <백경>에서 고래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처럼, <거인을 바라보다>에서 고래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건 소설보다 다큐멘터리, 수필에 가깝습니다. 엘렌 켈지는 프로 소설 작가보다 해양 생태학 연구원입니다.

 

 

비록 <야생의 부름>과 <백경>이 대조적이라고 해도, 두 소설은 똑같은 자연 문학에 속합니다. 하지만 <거인을 바라보다>는 소설보다 자연 과학 서적입니다. 이 책에서 엘렌 켈지는 생태학 지식들을 소개합니다. <거인을 바라보다>는 해양 생태계를 설명하고, 소재 그 자체는 자연 문학에 속하나, 자연 과학 서적 <거인을 바라보다>가 자연 문학에 속할 수 있나요? 자연 과학이 문학에 속할 수 있나요? 영문 위키피디아는 이른바 자연 작문(Nature Writing)을 설명합니다. 자연 작문은 소설과 논픽션을 함께 포함합니다. 비록 <거인을 바라보다>가 논픽션이라고 해도, 이 책은 자연 작문에 속합니다.

 

<거인을 바라보다>가 자연 작문에 속하기 때문에, 이건 자연 문학에 속할지 모릅니다. <거인을 바라보다>는 비단 자연 과학 서적일 뿐만 아니라 생태학 수필에 가깝습니다. 이 책은 문학 형식들을 동원합니다. 소설 <야생의 부름>과 과학 서적 <거인을 바라보다>는 너무 다르나, 양쪽은 똑같은 자연 문학에 속할 수 있습니다. 만약 <거인을 바라보다>가 자연 문학에 속한다면, 소설 <진이, 지니>는 어떤가요? 정유정 작가는 <진이, 지니>를 썼습니다. 소설 <진이, 지니>에서 야생 보노보는 커다란 비중, 핵심 비중을 차지합니다. 영장류 사육사 이진이는 주인공이고, 야생 보노보 지니는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소설 <진이, 지니>는 판타지를 덧붙입니다. 어떤 사고 때문에, 이진이는 지니에게 빙의합니다. 육체는 보노보이나, 정신은 인간입니다. 야생 보노보 지니가 밀렵 거래 품목이기 때문에, 동물 조련사는 지니를 엄청나게 학대했고, 보노보 육체 속에서 인간 이진이는 고통을 직접 겪습니다. 여러 측면들에서 <진이, 지니>는 자연 문학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인간이 야생 동물에게 빙의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실에서 인간은 야생 동물에게 빙의하지 않습니다. 빙의는 비(非)현실입니다. 빙의가 비현실이기 때문에, <진이, 지니>와 <거인을 바라보다>는 너무 다릅니다. 양쪽은 완전히 대조적입니다.

 

<거인을 바라보다>는 과학을 설명하나, <진이, 지니>는 비현실을 가장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진이, 지니>가 비현실을 가장한다고 해도, 분명히 이 소설에서 야생 동물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이 소설이 강렬한 동물 권리를 표현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자연 문학에 속할 겁니다. 많은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이 소설이 자연 문학에 속한다고 분류할 겁니다. 엘렌 켈지 역시 여기에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비현실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면,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역시 자연 문학에 속할 겁니다. 어슐라 르 귄은 SF 작가이고,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역시 SF 소설입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환경 보호가 중심 주제이기 때문에, 이런 SF 소설들은 <진이, 지니>와 비슷한 범주를 형성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으로서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외계 삼림 행성을 이야기합니다. 목재 자원을 얻기 위해 제국주의 세력은 외계 삼림 행성을 침략합니다. 제국주의 세력은 외계 삼림을 마구잡이로 벌목하고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제국주의 세력은 외계 행성 원주민들을 착취합니다. 나중에 제국주의 세력과 외계 원주민들은 크게 충돌합니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천연 자원(목재 자원) 고갈, 풍요로운 삼림, 지속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주제들은 자연 문학에 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계 삼림 행성은 비현실입니다. 현실에서 과학자들은 외계 삼림 행성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아직 우주 탐사대는 외계 삼림 행성에 방문한 적이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외계 생태계가 존재하는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만약 외계 삼림 행성이 존재한다면, 비록 여기에서 지적 문명이 살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지구 사람들은 엄청나게 놀랄 겁니다. 외계 삼림 행성은 인류 사고 방식을 완전히/영원히 바꿀 겁니다. 지구 사람들이 외계 삼림 행성을 인식한 이후, 지구 사람들은 과거 사고 방식으로 돌아가지 못할 겁니다. 인류 문명 역사에서 이건 한 획을 그을 겁니다. 아니, 이건 두 획을 긋고, 세 획들을 긋고, 무수한 획들을 그을 겁니다. 외계 삼림 행성은 정말 거창한 사건입니다. 거창한 비현실이 자연 문학에 속하나요?

 

 

비현실이 걸림돌이 아니기 때문에, 거창한 비현실, 외계 삼림 행성은 자연 문학에 속할 수 있습니다. <진이, 지니>가 자연 문학에 속하는 것처럼,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자연 문학에 속합니다.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이고, 동시에 이 소설은 자연 문학입니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 자연 문학에 속하기 때문에, 다른 SF 소설들 역시 자연 문학에 속할 수 있습니다. 새시 로이드는 <카본 다이어리 2015>를 썼습니다. 기후 변화는 홍수를 부르고, 마을은 물에 잠깁니다. 이건 비현실입니다. 침수된 마을 그 자체는 비현실이 아니나, 아직 기후 변화와 대규모 홍수는 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과학자들은 어떻게 기후 변화가 인류 사회에 피해를 미칠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과학자들은 여러 재난들을 예측하나, 이것들보다 기후 변화는 경미하거나 심각할지 모릅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뉴욕 2140>을 썼습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보다 <뉴욕 2140>은 훨씬 비약합니다. 소설 표지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뉴욕은 물에 잠깁니다. 하지만 킴 스탠리 로빈슨은 자신이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고 설명합니다. <뉴욕 2140>보다 기후 변화는 훨씬 경미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뉴욕 2140>은 환경 오염, 지구 온난화를 경고합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와 <뉴욕 2140>은 이른바 Cli-Fi, 기후 소설에 속합니다. Cli-Fi들이 행성급 환경 오염,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기 때문에, Cli-Fi들은 자연 문학에 속할 수 있습니다. <뉴욕 2140>은 사이언스 픽션이고, 동시에 이건 Cli-Fi와 자연 문학입니다. <야생의 부름>과 <거인을 바라보다>와 <진이, 지니>와 달리, <카본 다이어리 2015>는 야생 동물을 이야기하지 않으나, 지구 온난화는 생물 다양성을 파괴합니다. 생태학자들은 지구 온난화가 생물 다양성을 파괴한다고 걱정합니다. 비록 <카본 다이어리 2015>가 야생 동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기후 소설은 자연 문학에 속합니다.

 

<야생의 부름>부터 <뉴욕 2140>까지, 이런 문학들은 자연 문학입니다. 하지만 문학은 자연 환경을 표현하기 위한 유일한 매체가 아닙니다. 글자 매체 이외에 다른 매체들 역시 자연 환경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오델 호수>는 초기 생태계 시뮬레이션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담수 동물을 조종하고 담수 생태계를 관찰합니다. <오델 호수>는 어설픈 오픈 월드이나, 1994년 게임 <울프>는 생태계 시뮬레이션과 본격적인 오픈 월드를 결합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늑대를 조종하고, 드넓은 자연 환경을 돌아다니고, 여러 상황들을 겪습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으로서 <울프>는 (간단한) 생태 백과 사전을 포함합니다.

 

 

<울프>와 달리, <쉘터 2>는 시뮬레이션 요소들을 별로 포함하지 않습니다. <울프>는 1994년 게임이고, <쉘터 2>는 2015년 게임이나, 오히려 <쉘터 2>보다 <울프>는 충실한 시뮬레이션 요소들을 구현합니다. <울프>와 달리, <쉘터 2>는 생태 백과 사전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오델 호수>와 <울프>와 <쉘터 2>는 자연 생태계를 구현하고,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들을 조종합니다. 세 비디오 게임들이 자연 문학인가요? 비디오 게임은 문학이 되지 못합니다. <울프>는 문학이 아닙니다. <야생의 부름>보다 <울프>는 늑대 생태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나, <울프>는 문학이 아닙니다.

 

비록 <울프>보다 <야생의 부름>에서 늑대 생태가 작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야생의 부름>이 소설이기 때문에, <야생의 부름>은 자연 문학에 속하고, <울프>는 속하지 못합니다. 자연 문학이 비디오 게임들을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 문학은 너무 비좁은 범주입니다. 자연 작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연 문학과 자연 작문은 오직 글자 매체만 분류합니다. 비단 <오델 호수>와 <울프>와 <쉘터 2>만 아니라 많은 비디오 게임들은 자연 환경, 야생 동물, 환경 보호를 표현합니다. <에코 더 돌핀>은 생태계 시뮬레이션이 아니나, 게임 플레이어는 돌고래를 조종하고 환상적인 해양 환경을 탐험합니다.

 

 

<에코 더 돌핀>은 생태계 시뮬레이션보다 아케이드 게임, 액션 어드벤처에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가 돌고래를 조종하고 해양 환경을 탐험하기 때문에, <에코 더 돌핀>에서 자연 환경과 야생 동물은 핵심 비중,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모래 언덕 바다 Dune Sea> 역시 생태계 시뮬레이션보다 사이드 스크롤링 비행 게임에 가깝습니다. <에코 더 돌핀>이 판타지에 기반하는 것처럼, <모래 언덕 바다>는 판타지에 기반합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가 야생 기러기를 조종하고, 야생 기러기가 여러 자연 환경들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자연 환경과 야생 동물은 핵심 비중을 차지합니다.

 

<오델 호수>부터 <모래 언덕 바다>까지, 어떤 것은 시뮬레이션이고, 어떤 것은 액션 게임이나, 비디오 게임 문화에서 동물 조종 게임들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심지어 <포카혼타스>처럼, 어떤 게임들은 자연의 힘, 동물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비디오 게임 <포카혼타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수달을 직접 조종하지 않으나, 포카혼타스는 수달의 힘에 빙의하고 강물 속을 헤엄칩니다. 이렇게 동물 조종 게임들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미래 게임들 역시 동물 조종을 계승할 겁니다. 하지만 동물 조종 이외에 샌드 박스 역시 자연 환경을 표현합니다. <심파크>에서 삼림 레인저는 국립 공원을 조성합니다.

 

 

[동물원 게임들은 야생 동물들을 보여줍니다. 동물원 게임들이 자연 문학 <진이, 지니>와 비슷한가요?]

 

 

게임 플레이어는 삼림 레인저가 되고, 식물상과 동물상을 조성하고, 생물 다양성을 연구합니다. <울프>가 생태 백과 사전을 포함하는 것처럼, 생태계 샌드 박스들은 백과 사전을 포함하곤 합니다. <심파크>와 달리, <와일드라이프 파크>는 동물원 건설/경영 게임입니다. 동물원 게임으로서 <와일드라이프 파크>는 많은 야생 동물들을 늘어놓습니다. 동물원은 억압적인 감옥이고, <진이, 지니>는 동물원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나, 분명히 <와일드라이프 파크>에서 야생 동물들이 핵심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진이, 지니>와 <와일드라이프 파크>는 비슷합니다. 적어도 <심파크>와 <진이, 지니>는 비슷합니다.

 

동물원과 달리, 국립 공원은 억압적인 감옥이 아닙니다. 국립 공원은 야생 보호 구역에 가깝습니다. <심파크>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야생 동물 사육사보다 삼림 레인저가 됩니다. 그래서 <와일드라이프 파크>보다 <심파크>는 훨씬 나을 겁니다. 하지만 동물원 건설/경영 게임이 반드시 나쁜가요? <와일드라이프 파크>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비디오 게임은 현실이 아닙니다. 아무리 <와일드라이프 파크>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많은 야생 동물들을 죽인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잔인한 동물 학살자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거대한 사파리를 조성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생물 다양성은 늘어나지 않습니다.

 

 

<와일드라이프 파크>는 샌드 박스 게임입니다. 샌드 박스 게임으로서 <와일드라이프 파크>는 다양한 게임 플레이들을 허용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동물원을 건설하기보다 거대한 사파리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에서 거대한 사파리가 나타난다고 해도, 이건 현실 생물 다양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아무리 <심파크>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생물 다양성과 생물량을 늘린다고 해도, 게임과 현실은 다릅니다.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동물원 게임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건 게임 플레이어가 동물 권리를 침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게임 생물량은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만약 비디오 게임이 현실이라면, 지금 당장 생태학자들은 <심파크>를 비롯해 생태계 시뮬레이션들을 플레이하고, 야생 보호 구역을 조성하고, 생물 다양성을 보호할 겁니다. 현실에서 자연 생태계는 위기에 빠졌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산업 폐기물들을 버리고, 야생 자연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세계화 자본주의는 착취 경제, 과잉 생산 경제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착취 경제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착취해야 합니다. 이런 착취 없이,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만약 세계화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기후 변화 역시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가 무엇인가요? 자본가가 대규모 산업 공장을 세우고, 임금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상품들을 판매할 때, 이건 일반적인 자본주의입니다. 토마 피케티 역시 이게 일반적인 자본주의라고 인정할 겁니다. 왜 자본가가 상품들을 판매하나요? 자본가는 이윤을 창출하기 원합니다. 자본가에게 다른 무엇보다 이윤 창출은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는 높은 매출, 경제 발전을 떠듭니다. 높은 매출을 갱신하기 위해 자본가는 많은 상품들을 만듭니다. 동시에 인력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자본가는 임금을 낮추기 원합니다. 임금이 낮아지기 때문에, 소비 능력은 낮아집니다.

 

아무리 자본가들이 선량해진다고 해도,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자본가는 잉여 노동 시간을 착취해야 합니다. 자본가가 잉여 노동 시간을 이윤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임금은 정당한 댓가가 아닙니다. 임금이 정당한 댓가가 아니기 때문에, 임금 노동자들의 소비 능력들은 낮아집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육아 노동, 가사 노동, 돌봄 노동은 노동이 되지 못하고, 이런 노동들은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많은 육아 노동자들, 가사 노동자들, 돌봄 노동자들은 여자들입니다. 여자들은 무급 노동자들입니다. 댓가 없이, 이런 노동자들은 힘들게 일합니다.

 

 

대형 할인점 주부 사원은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이나, 적어도 대형 할인점 주부 사원은 임금을 받습니다. 반면, 아무리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힘들게 돌본다고 해도, 할머니는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돌봄 노동들은 위기에 부딪히나, 남한 정부는 이것을 해결하지 않습니다. 오랜 동안, 남한 사회에서 여자 무급 노동이 상식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돌봄 노동들이 코로나 19 사태에 부딪힌다고 해도, 남한 정부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하기 때문에, 압도적인 무산자 민중들이 댓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 능력은 떨어집니다.

 

높은 매출을 갱신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많고 많은 상품들을 만드나, 무산자 민중들은 이것들을 소비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량은 늘어나나, 소비량은 생산량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인 과잉 생산 경제입니다. 과잉 생산은 거품이 되고, 거품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비(非)자본주의 영역을 시장 경제에 끌어들여야 합니다. 자연 환경이 시장 경제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시장 경제에 집어넣습니다. 자연 환경은 상품이 됩니다. 더 이상 자연은 자연이 아닙니다. 자연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상품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필연적으로 오염시킵니다.

 

 

하지만 보수 우파들은 오직 자본주의만 최선이라고 세뇌합니다. 보수 우파들은 자본주의가 착취 경제, 과잉 생산 경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수 우파들은 엄청난 착취들을 은폐합니다. 사회주의가 이것을 지적할 때, 오히려 그들은 사회주의를 매도하고, 억압하고, 왜곡합니다. 남한 시민들은 한국 전쟁이 북한 침략이라고 믿습니다. 이건 너무 한심한 거짓말입니다. 오히려 북한은 피해자입니다. 북한은 한국 전쟁을 개시했으나, 왜 북한이 피해자인가요? 이미 19세기부터, 악랄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한국 전쟁은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19세기부터, 악랄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학살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가해자, 범죄자이고, 사회주의는 피해자, 약자입니다. 이 상황에서 북한이 한국 전쟁을 개시했기 때문에, 북한은 전쟁 범죄자보다 전쟁 피해자입니다. 만약 북한이 전쟁 범죄자라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훨씬 악랄한 전쟁 범죄자들일 겁니다. 분명히 한국 전쟁은 비극이고, 김일성과 박헌영은 바가지로 욕설들을 퍼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김일성과 박헌영이 바가지로 욕설들을 퍼먹어야 한다면, 자본주의 국가 지도자들은 유조선으로 욕설들을 퍼먹어야 합니다. 북한과 자본주의 국가는 바가지와 유조선입니다.

 

 

[심각한 환경 오염들은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합니다. 환경 오염과 여자 무급 노동은 별개가 아닙니다.]

 

 

남한은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학살하고, 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하고, 심지어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키나, 남한은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그래서 남한은 악랄하고 폭력적인 국가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지구 온난화 범죄자이나, 남한은 지구 온난화 범죄자에게 들러붙습니다. 이 상황에서 북한은 가해자, 범죄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북한은 피해자, 약자입니다. 한국 전쟁은 침략보다 치열한 몸부림에 가깝습니다. 남한은 북한에게 백배 사죄해야 합니다. 하지만 엄청난 착취들을 은폐하기 위해 보수 우파들은 북한이 침략했다고 거짓말들을 늘어놓습니다.

 

이른바 인류세는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 수탈에 기반합니다. 서구 백인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끔찍하게 학살했기 때문에, 산업 자본주의가 제3세계 식민지들을 수탈했기 때문에, 지질학적인 환경 오염은 나타났습니다. 보수 우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탐욕스러운 인류가 자연 환경을 파괴한다고 거짓말합니다. 자본주의를 떠받들기 위해 보수 우파들은 식민지 수탈을 정당화하고 인류 전체가 환경 오염 범죄자라고 매도합니다. 사람들은 세뇌를 당하고 거짓말이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심지어 생태학자들, 환경 운동가들조차 거짓말들을 믿습니다. 그래서 기후 변화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서구 문명은 제3세계들을 끔찍하게 착취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가 역사학자, 지리학자가 되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끔찍한 식민지 수탈은 상식입니다. 서구 문명이 제3세계들을 착취했기 때문에, 서구 문명은 자본주의를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상식이 되지 못합니다. 보수 우파들은 식민지 수탈과 자본주의를 분리합니다. 보수 우파들은 우월한 백인(남자)들이 자본주의를 만들었다고 거짓말합니다. 사람들이 이런 거짓말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이 식민지 수탈과 자본주의를 연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식민지 수탈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얄팍하게 비판합니다.

 

사람들이 식민지 수탈과 자본주의를 연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경제학 관점에서 사람들은 식민지 수탈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윤리적으로 비판할 뿐입니다. 자본주의는 경제 영역이나, 사람들은 식민지 수탈을 윤리적으로 비판하고, 그래서 인종 차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보수 우파들은 식민지 수탈에 온갖 이유들을 덧붙이고 경제 영역을 은폐합니다. 심지어 보수 우파들은 식민지 수탈이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명예를 추구하기 위해 서구 문명이 식민지들을 수탈했다고 거짓말합니다. 보수 우파들은 온갖 방법들을 동원하고 식민지 수탈과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분리하기 원합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일으켰고, 그래서 식민지 수탈, 자본주의, 기후 변화, 인류세는 떨어지지 않으나, 보수 우파들이 식민지 수탈과 자본주의를 분리하기 때문에, 식민지 수탈, 자본주의, 기후 변화, 인류세는 독립적인 문제들이 됩니다. 기후 변화와 식민지 수탈 사이에는 관계가 없고, 자본주의와 식민지 수탈 사이에는 관계가 없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들을 함께 고민하지 못합니다. 식민지 수탈, 자본주의, 기후 변화, 인류세가 얽히고 설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들을 함께 고민해야 하나, 보수 우파들이 식민지 수탈과 자본주의를 분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고민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후 변화를 근본적으로 고민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가 여자 무급 노동에 기생하고, 과잉 생산이 나타나고, 자연 환경이 상품이 되기 때문에, 성 해방 없이, 환경 오염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환경 오염과 여자 착취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 가지를 함께 고민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여자 무급 노동, 여자 착취가 당연하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가부장 제도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끔찍한 성 폭행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와 성 폭행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두 가지는 얽히고 설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고민하지 못합니다.

 

 

식민지 수탈, 자본주의, 기후 변화, 인류세가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여자 무급 노동 역시 이것들과 얽히고 설킵니다. 환경 보호와 성 해방은 별개가 아닙니다. 두 가지는 함께 움직입니다. 그래서 만약 자연 문학이 비단 환경 보호만 아니라 성 해방을 함께 이야기한다면, 이 자연 문학은 모범 사례가 될 겁니다. 소설 <카본 다이어리 2015>는 비단 지구 온난화만 아니라 여자 권리를 함께 이야기합니다. 자연 문학으로서 <카본 다이어리 2015>는 모범 사례입니다. 엘린 켈지는 자신이 엄마라고 강조하고, <거인을 바라보다> 역시 모성을 강조합니다. 소설 <진이, 지니> 후기에서 정유정 작가는 보노보에게 '여성스러운' 측면이 있다고 말합니다. 정유정 작가는 침팬지보다 여성스러운 보노보를 선택했습니다.

 

소설 해설에서 정여울 평론가는 엄마와 모성을 언급합니다. 자연 문학들에게 모성은 핵심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착취 경제(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고, 모성 사회(공유 사회)가 이것을 막고 자연 환경을 돌보기 때문입니다. 모성 사회에서 자연 환경 역시 돌봄 대상이 되고, 기후 변화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 사회는 돌봄 노동 사회화를 실현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모성 사회와 환경 보호를 연결하지 못합니다. 수구 꼴통 할배들은 중국 대기 오염을 욕하나, 그들이 모성 사회를 지지하나요? 아니, 그들은 그저 중국을 욕할 뿐입니다. 이 관점에서 수구 꼴통 할배들과 얄팍한 진보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얄팍한 진보들 역시 그저 중국을 욕할 뿐입니다. 얄팍한 진보들은 모성 사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미 여섯째 대멸종은 진행 중인지 모릅니다. <카본 다이어리 2015>와 <뉴욕 2140>은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생물 다양성과 생물량은 처참하게 감소합니다. 만약 비디오 게임이 현실이라면, 생태학자들은 샌드 박스 게임들을 플레이하고 생물 다양성과 생물량을 늘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은 현실이 아닙니다. 아무리 샌드 박스 게임에서 생물량이 늘어난다고 해도, 이건 현실 생물량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비디오 게임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동물원 게임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건 동물 권리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심파크>와 <와일드라이프 파크>가 비슷하다고 분류할지 모르고, 다른 게임 플레이어들은 반대할지 모릅니다. <와일드라이프 파크>는 <진이, 지니>와 어울리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와일드라이프 파크>가 어울리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심파크>는 어울릴 수 있습니다. 만약 <심파크>가 자연 문학과 어울릴 수 있다면,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은 어떤가요? <그린 플래닛>은 화성을 테라포밍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풍요로운 녹색 삼림들을 조성합니다. 풍요로운 녹색 환경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린 플래닛>은 자연 문학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사고 방식을 확장합니다. 자연 문학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확장된 자연'을 제시합니다.]

 

 

<그린 플래닛>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중요한 물음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지구에서 여섯째 대멸종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제프 베조스 같은 사람들은 외계 행성 개척이 대안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외계 행성 개척이 대안이 될 수 있나요?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기후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자본주의,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 수탈, 인류세, 기후 변화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화성 개척 문명이 자본주의를 타파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화성이 삼림 행성이 된다고 해도, 또 다시 화성 개척 문명은 환경 오염들을 일으킬 겁니다. 화성 개척 문명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을 폭력적으로 재현할 겁니다.

 

뭐라고 제프 베조스와 유명 인사들이 떠들든, 외계 행성 개척은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무산자 민중 계급이 자본가 계급을 몰아내고 자본주의를 타파할 때, 온갖 세뇌들("한국 전쟁은 북한 침략이다.")이 사라질 때, 이건 근본적인 환경 보호가 될 겁니다. 이렇게 사이언스 픽션은 사고 방식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그린 플래닛>은 사이언스 픽션이고, 사이언스 픽션은 외계 행성으로 사고 방식을 확장할 수 있습니다. 바이오펑크와 환경 아포칼립스 역시 사고 방식을 확장합니다. 아무리 <야생의 부름>이 감동적이라고 해도, <카본 다이어리 2015>와 달리, <야생의 부름>은 새로운 자연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커다란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진이, 지니>보다 <서바이빙 마스: 그린 플래닛>은 훨씬 폭넓은 고민을 제시합니다. 사이언스 픽션 없이, 우리는 환경 보호를 고민할 수 있으나, 사이언스 픽션이 사고 방식을 확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을 이용하고 폭넓은 환경 보호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진이, 지니>보다 <그린 플래닛>이 폭넓은 고민을 제시한다고 해도, 이건 비디오 게임입니다. <진이, 지니>는 소설이나, <그린 플래닛>은 게임입니다. 소설과 게임이 어울릴 수 있나요? 게임은 문학이 아닙니다.

 

자연 문학은 <야생의 부름>과 <거인을 바라보다>와 <진이, 지니>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과 <카본 다이어리 2015>와 <뉴욕 2140>을 포함할 수 있으나, <울프>와 <심파크>와 <쉘터 2>와 (<와일드라이프 파크>와) <그린 플래닛>은 여기에 속하지 못합니다. 자연 문학은 비좁은 범주입니다. 애석하게도 <야생의 부름>과 <진이, 지니>와 <울프>와 <그린 플래닛>을 함께 담기 위한 범주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연 문학은 범주를 확장하고 비단 소설만 아니라 만화,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을 포함해야 합니다. 아니면 자연 문학은 새로운 범주로 거듭나야 합니다.

 

 

※ 그림 <Environmental Pollution> 출처: kai Stachowiak,

https://www.publicdomainpictures.net/en/view-image.php?image=230499&picture=environmental-pol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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