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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지상의 여자들>과 현실 속의 가부장 사회 본문

감상, 분류, 규정/소설을 읽다

<지상의 여자들>과 현실 속의 가부장 사회

OneTiger 2019. 4. 19. 20:15

만약 어떤 소설이 외계인을 이야기한다면, 이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될 겁니다. 외계인은 이질적입니다. 외계인은 우리 인간과 다릅니다. 외계인은 다른 환경에 속합니다. SF 소설은 이런 차이들을 계속 강조할 겁니다. 인간 독자들은 이런 차이들을 읽고 인간을 다시 돌아볼 수 있습니다. 거울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계인이 거울이 된다면, 인간 독자는 인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얼마나 인간과 외계인이 다른지 살펴보고 인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건 인간을 살피기 위해 인간이 무조건 외계인을 살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계인 없이, 인간은 인간을 살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호등이 대조적인 색깔을 이용하는 것처럼, 인간과 외계인이 대조적이라면, 인간은 인간을 훨씬 자세히 살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차이들을 강조하기 위해 사이언스 픽션은 외계인을 묘사합니다. 자연 과학적인 고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도, 수많은 SF 소설들은 외계인들을 묘사합니다. 수많은 SF 소설들에서 외계인은 다른 행성 생명체보다 이방인에 가깝습니다. 사실 최초의 본격적인 SF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이미 이방인을 말했습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 속의 인조인간은 이방인입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어떻게 연금술사가 인조인간을 만들 수 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메리 셸리는 이게 가능하다고 짐작했으나, 자세한 원리를 밝히지 않습니다. 인조인간을 만드는 방법은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는 인조인간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조인간은 인류 사회와 어울리지 못합니다. 인조인간은 이방인이고 추방자입니다. 그래서 인조인간은 자신이 인류 사회를 떠나야 한다고 참담하고 비통하게 구구절절 토로합니다. '이방인'은 사이언스 픽션이 선사하는 가장 커다란 미덕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문학이 '이방인'을 이용한다면, 문학은 이질적인 요소를 훨씬 강조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소설이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베트남 여자를 묘사한다면, 소설 작가는 이질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원할 겁니다. 남한 사회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입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는 가난, 제3세계, 여자를 차별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 제3세계, 여자는 이질적입니다. 가난한 베트남 여자는 아주 완벽한 이방인입니다. 가난한 베트남 여자는 외계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남한 사회 속의 가난한 베트남 여자를 묘사한다면, 이 소설은 정말 외계인(이방인)을 묘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소설 작가는 가난한 베트남 여자를 외계인(이방인)에 비유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을 말하기 위해 많은 작가들은 외계인을 비롯해 근대적인 진보를 이용합니다. 작가들이 우주 항해와 거대한 우주선과 미래 메트로폴리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도, 외계인은 훌륭한 문학적인 도구이고, 그래서 많은 작가들은 저도 모르게 SF 작가가 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여자는 이방인이 되고, 그래서 SF 소설들은 근대적인 진보를 이용해 여자를 외계인이나 다른 존재들에 비유합니다. 지구에서 외계인이 이방인이 되는 것처럼, SF 소설들은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여자들이 이방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어요. 만약 이런 이방인들이 주류가 된다면, SF 소설들은 훨씬 전복적인 감성을 퍼뜨릴 수 있을 겁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인조인간이 비참한 심정으로 극지로 떠나는 것처럼, 이방인들은 주류가 되지 못합니다. 이방인들은 피지배 계층, 밑바닥 계층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이런 밑바닥 계층이 주류가 된다면, 인류 사회는 뒤집어질 테고, 이건 문자 그대로 전복적이고 놀라운 감성이 될 겁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여자들이 주류가 된다면, 이건 전복적이고 놀라운 감성이 될 겁니다. 그래서 SF 소설들은 여자들의 공동체를 상상하곤 합니다. SF 소설들은 남자들의 공동체를 상상하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들이 남자들의 공동체를 상상한다고 해도, 이건 별로 전복적이지 않습니다. 왜? 이미 가부장적인 사회가 남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현실은 남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가부장적인 경제이고 남성적인 경제입니다. 남한 사회를 비롯해 자본주의 국가들은 남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이미 현실이 남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이 남자들의 공동체를 상상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여성적인 남자들이 공동체를 이룬다면, 여기에는 어떤 가치가 있을 겁니다. 가부장적인 사회가 여성적인 남자를 찌질하다고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성적인 공동체는 전복적입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들은 남성적인 공동체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남성적인 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해도, 이건 진부함과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이건 지배적인 관념을 되풀이할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여성적인 공동체가 어울립니다. 18세기 사라 스콧이 쓴 <천년 홀과 주변국 묘사>처럼, 원형적인 SF 소설들 역시 여성적인 공동체를 묘사했습니다. 박문영이 쓴 <지상의 여자들>은 여성적인 공동체 소설의 연장선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구주라는 지역에서 남자들은 사라집니다. 남자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구주에서 여자들은 목소리들을 높일 수 있습니다. 구주는 여자들의 공동체가 됩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문자 그대로 남자들이 하늘로 사라지고 지상에 오직 여자들만 남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등장인물이 농담하는 것처럼,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입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왜 남자들이 사라지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박문영 작가가 직접 밝히는 것처럼, 소설은 실종 사건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외계인들이 남자들을 납치했나요? 아니면 이게 저주나 흑마술인가요? 아니면 갑자기 남자 유전 형질에 문제가 생겼나요? 이유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외계인을 운운하나, 이건 그저 근거 없는 소문에 가깝습니다. 정말 외계인들이 남자들을 납치했다고 해도, 외계인들 때문에 <지상의 여자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않을 겁니다. 이방인들이 주류가 되었기 때문에, 여자들이 목소리들을 높이기 때문에, <지상의 여자들>은 전복적인 감성을 퍼뜨리고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분류할 때, 사람들은 자연 과학적인 고증에 주목합니다. 어떤 창작물이 우주 구축함을 묘사할 때, 사람들은 그 창작물이 사이언스 픽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창작물이 우주 구축함을 묘사한다고 해도, 여기에 전복적인 감성이 없다면, 이게 정말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을까요?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가부장적인 사회는 때리고, 죽이고, 부수고, 차별하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가부장적인 사회는 식민지를 수탈하기 원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남성적인 노동은 여성적인 노동을 식민지화하고 수탈하고 착취합니다.



우리가 구태여 사이언스 픽션을 구경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현실 속에서 우리는 숱한 착취들과 수탈들과 폭력들을 겪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외계인과 우주 구축함과 동력 강화복과 매스 드라이버를 늘어놓는다고 해도, 이것들이 가부장적인 착취들과 수탈들과 폭력들을 옹호하고 숭배한다면, 이것들은 별로 전복적이지 않을 겁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전복적이지 않다면, 사이언스 픽션이 지배적인 관념을 숭배한다면, 이게 정말 짜릿한 경이가 될 수 있나요? 많은 SF 독자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전복적이고 짜릿한 경이를 연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우주 구축함이나 거대 괴수가 도시를 때려부순다고 해도, 결국 이건 남성적인 측면들을 강조할 겁니다. 우주 구축함과 거대 괴수가 도시를 때려부술 때, 이건 여성적인 측면들을 강조하지 못할 겁니다. 이게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상상 과학이라는 측면에서 우주 구축함과 거대 괴수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우주 구축함과 거대 괴수는 사이언스 픽션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주 구축함과 거대 괴수보다 <지상의 여자들>은 훨씬 경이로운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에는 첨단 우주 구축함이 없으나, 온갖 스페이스 오페라들보다 <지상의 여자들>은 훨씬 거대할지 모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에서 과학 기술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진보는 비단 과학 기술들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근대적인 진보는 밑바닥 계급이 저항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산업 공장이 강력한 노동 조합을 만드는 것처럼, 근대적인 진보 때문에 여자들은 어디에 자신들이 속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피지배 계급이고 가부장적인 사회가 반드시 피지배 계급을 착취한다고 자각할 수 있습니다. 메리 셸리는 최초의 본격적인 SF 작가입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메리 셸리의 어머니)는 선구적인 성 해방 지식인입니다. 18~19세기 근대적인 진보 속에서 사이언티픽 로망스들과 저항 운동들은 함께 나타났습니다.


양쪽은 동창생(?)입니다. 이건 우연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양쪽이 동창생이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저항 운동들을 탄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피지배 계급이 저항한다는 내용은 사이언스 픽션의 또 다른 정체성인지 모릅니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소설 속에서 피지배 계급이 주류가 될 때, 그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습니다. 외계인이나 우주선이나 차원 관문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여자들의 공동체 소설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상의 여자들>을 비롯해 여자들의 공동체 소설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될 겁니다. 박문영 작가는 실종 사건보다 '실종 사건 이후'를 강조했으나, '실종 사건 이후' 역시 얼마든지 사이언스 픽션이 될 겁니다.



남자들이 허공으로 붕 떴기 때문에, 지상에 여자들이 남았기 때문에, 정말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입니다. 만약 <지상의 여자들>이 <여자는 땅>이라는 제목을 지었다고 해도, 이건 잘 어울렸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농담 같은 제목과 달리, <지상의 여자들>에는 웃음기가 없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차갑고 건조하고 거칠거칠합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달콤한 꿀이나 기름기가 도는 고기나 담백한 두부보다 거칠고 씁쓸한 나물에 가깝습니다. 이 소설은 여자들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남자들이 허공으로 붕 떴기 때문에, 여자들은 목소리들을 높일 수 있습니다. 뭐라고 여자들이 말할까요? 여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여자들의 공동체 소설들은 여러 가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소설 <천년 홀과 주변국 묘사>는 여자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소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는 가부장적인 남자가 여자들의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소설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는 여자들이 가부장 문화를 처절하고 필사적으로 물리친다고 말합니다. 만화 <원더 우먼>은 여자들의 공동체에 가부장 문화를 덧씌우고 여자들이 열광적으로 전쟁에 뛰어든다고 묘사합니다. <원더 우먼>은 여자들의 공동체를 이용해 남성 판타지를 자극할 수 있어요. 왜 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오직 원더 우먼만 어깨와 허벅지를 드러내나요? 왜 남자 초인 영웅들은 쫄쫄이로 온 몸을 감싸고, 오직 여자 초인 영웅만 어깨와 허벅지를 드러내나요? 창작물은 여자들의 공동체를 얼마든지 가부장 문화 속으로 밀어넣을 수 있습니다. 소설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와 만화 <원더 우먼>은 대조적입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어떨까요? 이 소설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심각한 폭력들을 견디는지 이야기합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문자 그대로 땅, 바닥을 바라봅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하늘, 위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밑바닥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폭력을 견뎌야 합니다. 사방에는 폭력들이 넘쳐나고, 사회적인 약자들은 폭력들을 견뎌야 합니다. 여자는 사회적인 약자이고, 사회적인 약자로서 여자는 숱한 폭력들을 견뎌야 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소수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라는 문구처럼, 여자는 소수자가 아닙니다. 가부장적인 사회가 식민지를 착취해야 하기 때문에, 남성적인 노동이 여성적인 노동을 착취해야 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사회적인 약자가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이윤을 추구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오직 이윤만을 추구합니다. 이윤은 유일무이한 동기입니다. 자본주의에게 이윤 이외에 다른 동기는 없습니다.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 경제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돌봄 노동입니다. 돌봄 노동과 사회적인 재생산 없이 인류 문명은 망합니다. 영리 기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류 문명은 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수 만 년 동안, 영리 기업 없이 인류 문명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사회적인 재생산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200년 안에 인류 문명은 망할 겁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을 관람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리 기업보다 돌봄 노동은 선천적입니다. 영리 기업보다 돌봄 노동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심각한 모순에 봉착합니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리 기업보다 돌봄 노동은 선천적입니다. 사회 구조가 사회적인 부를 돌봄 노동에 분배한다면, 영리 기업들은 이윤을 제대로 축적하지 못할 겁니다.


영리 기업들은 더 높은 수익률을 찍기 원하나, 사회 구조가 사회적인 부를 돌봄 노동에 분배한다면, 더 높은 수익률은 불가능합니다.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보다 영리 기업들을 우대하고 싶어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돌봄 노동 없이 인류 문명은 망합니다. 당장 아무도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는다면, 몇 십 년 이후, 자본가 계급은 어떤 노동력도 확보하지 못할 겁니다. 아니, 노동력이고 나발이고, 당장 아무도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는다면, 인류 문명은 망할 겁니다. 그래서 사회 구조는 돌봄 노동에 대대적으로 분배해야 하나, 자본주의는 이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건 아주 심각한 모순입니다. 어떻게 자본주의가 모순을 해결하나요? 대답은 '착취'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반드시 착취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착취, 차별, 수탈을 강요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을 착취합니다. 여자들이 아이들을 낳고 먹이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두 젖가슴과 자궁이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가부장적인 사회는 생물적인 특성을 돌봄 노동으로 연결했습니다. 가부장적인 사회는 여자들에게 특정한 생물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에 여자들이 돌봄 노동들을 맡아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는 여자들을 돌봄 노동들에 억지로 밀어넣고, 돌봄 노동들은 여성적인 노동이 됩니다.


그래서 여자는 자애로운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여자는 아이와 가정을 자애롭게 돌봐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가부장적인 편견이고 세뇌이고 거짓말입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에서 어떤 등장인물은 왜 여자가 관용적이고 너그러워야 하는지 묻습니다. 이건 세뇌입니다. 여자라는 성별과 자애로운 성품 사이에는 필수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분명히 여자들에게는 두 젖가슴과 자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여자가 반드시 돌봄 노동을 맡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자들 역시 얼마든지 돌봄 노동들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돌봄 노동들에 참가한다면, 남성적인 노동은 약해질 겁니다. 가부장적인 사회는 무너질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돌봄 노동들에 사회적인 부를 분배한다면, 영리 기업들은 제대로 이윤을 축적하지 못할 겁니다.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들을 착취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사람들이 노동력들을 판매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망할 겁니다. 돌봄 노동들 없이, 사회적인 재생산은 없고, 노동력들 역시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돌봄 노동들이 필수적임에도, 더 많은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이걸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돌봄 노동들을 은폐하고 무시하고 착취하고 수탈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여성적인 노동을 무시해야 하고 여자들을 무시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차별과 폭력과 수탈이 옳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절반이 여자들임에도, 여자들은 사회적인 약자가 됩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이런 사회적인 약자들을 반영합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이 지상 위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심각한 폭력들을 견디는지 반영합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폭력들을 조명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웃음과 즐거움과 따스함과 여유가 없습니다. 이 소설에는 한숨과 비명과 눈물과 서러움이 있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냉장고 속의 사포와 비슷합니다. 이건 차갑고 거칠거칠합니다. 차가운 사포가 피부를 문지른다면, 피부는 따갑고 쓰라릴 겁니다.



소설 속에서 여자들이 한숨을 쉬고,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뿌리고, 서럽다고 통곡하기 때문에, 문장 구조들 역시 단순합니다. 약자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약자들은 길게 말하지 못합니다. 약자들은 길다랗고 화려한 미사여구들을 읊조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여유가 있을 때, 사람들은 미사여구들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여자의 눈 앞에서 강간범이 달려든다면, 여자는 미사여구들을 읊조리지 못할 겁니다. "오오, 지배적인 관념에 세뇌를 당한 그대여, 이 순간에서 강자와 약자로서 그대와 나는 폭력적인 관계를 맺노라." 여자는 절대 이런 문구를 읊조리지 못할 겁니다.


<지상의 여자들>에게 이런 문구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여자들>은 짧게 말합니다. 문장들은 길지 않습니다. "아, 씨발, 세상이 정말 존나게 더러워. 왜 내가 당해야 해? 왜 내가 참아야 해? 내가 죄인이야? 젠장, 여자가 죄인이야? 빌어먹을 한남충 개새끼들 때문에 나는 정말 못 살겠어." 이런 문구들은 길지 않습니다. 이런 문구들에는 화려한 미사여구가 없어요. <지상의 여자들>은 호흡을 길게 끌지 않습니다. 가끔 이 소설은 명상에 빠지나, 그렇다고 해도 호흡은 길지 않습니다. 사방에서 성 폭행범들이 달려든다면, 약자들은 호흡을 길게 끌지 못할 겁니다.



이건 디스토피아가 반드시 짧은 문장들을 서술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디스토피아 소설이 여유로운 사람들을 따라간다면, 아무리 디스토피아 세상이 암울하고 절망적이라고 해도,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풍성하고 길다란 문장들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상의 여자들'이라는 제목처럼,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여유로운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바라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어떻게 피해자가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 보여줍니다. 어떤 소설이 성 폭행을 묘사한다고 해도, 관점들은 다를 수 있습니다.


소설은 가해자의 시점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소설은 피해자의 시점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소설은 전지적 시점을 선택하고 가해자를 훨씬 많이 쳐다볼 수 있습니다. 소설은 전지적 시점을 선택하고 아래에서 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시점들은 다양한 분위기들을 연출할 겁니다. 만약 소설 시점이 가해자를 선택한다면, 이런 시점은 고통스러운 피해보다 삐뚤어진 정복 욕구를 강조할 겁니다. 문학은 허구적인 장치들을 동원하고, 독자는 허구적인 장치들을 이용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독자는 범죄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지상의 여자들>은 후자에 초점을 맞춥니다.



소설 시점과 달리, 소설 속의 공권력은 피해자들에게 별로 초점을 맞추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소설 속의 공권력은 남자들이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의 공권력은 사람들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여자들은 외계인이고 이방인입니다. 남자들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공권력은 남자들보다 사람들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현실 속에서도 수많은 언론 매체들은 지배적인 시점들, 가부장적인 시점들을 강조합니다. 성 폭행 사건이 터진다면, 언론 매체들은 좋다고 그걸 기사화할 겁니다. 가부장적인 사회는 성 폭행 문화를 만들고, 성 폭행 문화 속에서 성 폭행 사건은 좋은 자극이 될 거에요.


반면, 자본주의가 수많은 사람들을 굶겨죽인다고 해도, 언론 매체들은 이걸 기사화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산문에서 시점은 아주 중요한 장치입니다. 문학은 이런 시점들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사회적인 관계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에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다른 산문들보다 문학을 선택할 겁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보여주고, 독자는 그들과 사회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독자는 피해자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피해자들은 울부짖습니다. 피해자들은 고통스럽다고 울부짖습니다. 가해자들이 존재할 때, 피해자들은 제대로 목소리들을 내지 못합니다. 이제 가해자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크게 떠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 전반부와 소설 후반부는 다릅니다.



소설 전반부는 얼마나 여자들이 고통을 억누르는지 보여줍니다. 반면, 소설 후반부에서 가해자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여자들은 분노를 터뜨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침없이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래서 <지상의 여자들>은 1부와 2부를 나눕니다. 1부는 고통을 억누르고, 2부는 분노를 터뜨립니다. 너무 오랜 동안 고통이 억눌렸기 때문에, 분노는 거칠고 극단적이고 서투릅니다. 여자들이 사회적인 약자라고 해도, 남자들처럼 여자들 역시 거친 분노를 터뜨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분노를 비난할 겁니다. 그들은 여자들이 남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겁니다. 그들은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중립적인 시각이 중요하다고 말할 겁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에서도 어떤 등장인물은 중립을 말합니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에 중립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사회 구조는 가부장적으로 기울어졌고, 따라서 중립은 가부장 문화로 기웁니다. 아무리 지식인들이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중립적인 시각을 씨부린다고 해도, 결국 지식인들은 가부장 문화로 기웁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얼어죽을 중립 따위는 없습니다. 소설 속에서 여자들은 가부장 문화가 '먼저 잘못했다'고 따집니다. 가부장 문화는 '먼저' 잘못했습니다. 가부장 문화가 '먼저' 잘못했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먼저' 사과하고 배상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중립을 지껄이고 절대 약자들을 편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참으로 행복하고 평화롭습니다.



참으로 행복하고 평화로운 이 세상에서, 사회 곳곳에서 여자들은 폭력들을 견뎌야 합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수많은 여자들을 전반적으로 조명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소설 시점이 특정한 소설 주인공을 따라간다면, 소설은 수많은 사람들을 전반적으로 살피지 못할 겁니다. 소설 <세계 대전 Z>에서 특파원처럼 소설 화자는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합니다. 이런 소설 주인공은 꽤나 특별합니다. 이런 소설 화자는 주인공보다 인터뷰를 위한 장치에 가깝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여자들>에 특정한 소설 주인공이 있음에도, 소설은 주인공을 별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소설 주인공을 벗어나고 수시로 다른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짧은 에피소드들을 나열합니다. 수많은 에피소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에는 일관된 줄거리와 흐름이 있으나, 줄거리와 흐름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비선형적입니다. 사실 정체 불명의 이유 때문에 남자들이 사라진다면, 선형적이고 치밀한 줄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거에요. <지상의 여자들>은 일관된 줄거리보다 수많은 현장들을 짧게 반영합니다. 수많은 현장들은 모이고 모이고 모이고, 마침내 이것들은 억압적인 사회를 전반적으로 완성합니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이미 독자가 소설 결말을 안다고 해도, 이건 독서를 크게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선형적이고 일관된 흐름보다 수많은 나열들입니다.



어떤 관점에서 <지상의 여자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가 무너지기 때문에, <지상의 여자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대재난을 이용해 인류 문명을 진단하고 싶어합니다.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문명이라는 가면을 벗기고 인간이 추악하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이게 헛소리라는 사실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인류 문명을 진단하겠다고 폼을 잡고 열심히 주절거리나, 결국 이런 소설들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절대 분석하지 않습니다. 이런 소설들은 자본주의가 착취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인류 문명 전체를 비난합니다.


이런 소설들은 거창한 포부를 자랑하나, 시야는 너무 좁습니다.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바늘 구멍보다 작은 시야로 인류 문명을 진단한다고 난리법석을 피웁니다. 반면,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헛소리를 떠들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인류 문명을 진단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이 폭력들을 견딘다고 묵묵히 반영합니다. 약자들은 폭력들을 견디느라 바쁩니다. 그들은 인류 문명을 진단하기 위한 여유를 찾지 못해요. 만약 <지상의 여자들>이 인류 문명을 진단한다고 설친다면, 소설 시점과 소설 구성과 소설 주제는 엇갈릴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정답을 말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정답이 없다고 아쉬워할지 모르나,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보다 이런 반영은 훨씬 낫습니다. 적어도 이런 반영은 헛소리를 떠들지 않아요.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인류 전체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오직 남자들만 문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숱한 남자들은 폭력들을 저지르나, <지상의 여자들>은 그게 전부라고 단정하지 않아요. 남자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지상에 여자들이 남는다고 해도, 폭력과 차별과 수탈은 사라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들은 <지상의 여자들>이 그저 반영할 뿐이고 설명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반영들 속에는 작은 실마리가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 성연은 말합니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여자가 되고 싶어. 여성적으로 나는 고민하고 싶어."


네, 중요한 것은 여자와 남자라는 정체성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탐욕스럽다는 본질이 아닙니다. 성연은 여성으로서 자신이 고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성적인 측면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과 인류의 본질보다 여성적인 측면, 사회적인 약자, 피지배 계급입니다. 아무리 지상에 여자들이 남는다고 해도, 여자들이 다시 가부장 문화를 이룩한다면, 지상의 여자들은 또 다시 차별하고 착취하고 수탈할 겁니다. 남자들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인류 사회가 여성이 된다면, 여성으로서 인류 사회는 차별들을 몰아낼 수 있을 거에요.



우리가 정체성 문제에 치중한다면, 우리는 차별들을 몰아내지 못할 겁니다. 성연은 여자라는 정체성보다 여성이라는 계급 측면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많은 창작물들은 계급보다 정체성에서 사회 문제들이 나타난다고 이야기합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를 보세요. <주토피아>는 정체성 문제에 매달리고 인류 사회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정체성들이 있습니다. <주토피아>는 우리가 다양한 정체성들을 인정할 때 차별들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정말 사회 문제들이, 각종 차별들과 폭력들이 정체성에서 비롯하나요?


중산층 백인 아저씨가 가난한 흑인 소녀를 차별할 때, 이게 정체성 문제인가요? 나이와 피부 색깔과 생식기 때문에 중산층 백인 아저씨가 가난한 흑인 소녀를 차별할 수 있나요? 하지만 정말 피부 색깔과 생식기가 문제라면, 왜 중산층 백인 아저씨가 미셸 오바마에게 끽 소리하지 못하나요? 가난한 흑인 소녀와 달리, 왜 미셸 오바마가 당당하게 돌아다닐 수 있나요? 정말 나이가 문제라면, 왜 가난한 백인 아저씨가 재벌 흑인 아이에게 굽신거리나요? 사람들이 장애인을 장애우라고 존중한다면, 하늘에서 장애인 주거 시설이 뚝 떨어지나요? 사람들이 반려 동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수족관 돌고래들이 바다로 돌아갈 수 있나요?


아니, 장애우나 반려 동물 같은 단어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수구 꼴통 정치인들 역시 얼마든지 반려 동물이라는 단어를 나불거릴 수 있어요. 문제는 정체성이 아닙니다. 문제는 계급입니다. 흑인 소녀가 무산자 민중 계급에 속하기 때문에, 미셸 오바마가 자본가 계급에게 막대한 이득을 주기 때문에, 흑인 소녀와 미셸 오바마는 다릅니다. 그리고 계급은 생산 수단에서 비롯합니다. 장애우나 반려 동물이라는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단어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생산 수단을 공유하고 새롭게 사회 구조를 짜야 합니다. 하지만 <주토피아>는 이걸 말하지 않아요. <주토피아>는 계급 문제, 생산 수단 공유, 여성적인 노동 사회화를 은폐하고 정체성 문제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정체성들을 인정한다고 해도, 우리가 생산 수단을 공유하지 못한다면, 이윤을 축적하기 위해 가부장적인 자본가 계급은 계속 온실 가스들을 뿜을 겁니다. 자유주의적인 관용 정신, 정체성 논의는 절대 이걸 막지 못해요. 기후 변화 때문에 바다에서 돌고래가 고통스럽게 죽어갈 때, 우리는 죽어가는 돌고래가 여성, 약자, 피지배 계급이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체성보다 계급을 따질 수 있어요. 여자들이 남자들을 밀어낸다고 해도, 이건 여성적인 측면이 아닐 겁니다. 인류 사회가 여성적으로 바뀔 때, 피지배 계급이 계급 차별을 없앨 때, 기후 변화 속에서 돌고래는 고통스럽게 죽어가지 않을 겁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본격적으로 생물 다양성과 자연 생태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가끔 이 소설은 그저 야생 동물들을 비롯해 생물 다양성을 음미할 뿐입니다. 작가 후기에서 박문영 작가는 죽은 수리들과 농약을 언급합니다. 이건 <침묵의 봄> 분위기를 풍기나, <지상의 여자들>은 생태적인 상상력에 비중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이건 좀 아쉬워요. 만약 <지상의 여자들>이 정말 사이언스 픽션이라면, 생태적인 상상력이 좀 더 들어간다고 해도, 이건 나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 정말 외계 식생이나 거대 괴수가 나온다면, 분위기는 많이 흐트러질 겁니다. 비록 <지상의 여자들>이 생태학 SF 소설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이 소설에는 중요한 생태 철학이 있습니다.


성연이 돌고래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피지배 계급으로서 돌고래와 성연은 하나가 됩니다. 어쩌면 첨단 바이오 돔보다 이런 생태 철학은 훨씬 중요한지 모릅니다. 숱한 생태학 SF 소설들을 보세요. 생태학 SF 소설들은 첨단 바이오 돔, 외계 식생, 테라포밍, 기후 변화, 거대 괴수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태학 SF 소설들이 자연을 여성이라고 인식하나요? 이런 생태학 SF 소설들이 인류 사회가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나요? 숱한 생태학 SF 소설들은 여성적인 인류 사회를 말하지 않아요. <위기의 지구 돔을 구하라> 같은 가벼운 10대 소설부터 <세븐이브스> 같은 우주 탐사물까지, 다들 인류 문명이 탐욕스럽다고 신나게 주절거려요.



[생태학 SF들은 이런 인공 생태계를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게 생태적인 상상력의 전부일까요?]



첨단 바이오 돔이나 거대 괴수는 정말 매력적인 소재입니다. 소설 <위기의 지구 돔을 구하라>는 아주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축물을 보여줍니다.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축물 안에는 작은 지구 생태계가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구 자연 생태계를 축소하고 거대한 바이오스피어 건축물 안에 집어넣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정말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런 생태학 SF 소설은 헛소리로 흘러가고 가부장적인 자본주의에 충성합니다.


비록 <지상의 여자들>이 생태학 SF 소설이 아니라고 해도, 숱한 생태학 SF 소설들보다 <지상의 여자들>은 훨씬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무너뜨리고, 생산 수단을 공유하고, 돌봄 노동들을 사회화할 때, 인류 사회는 여성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인류 사회는 정말 지상의 여자들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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