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쥬라기 공원 III>와 스피노사우루스의 위상 본문
[아, 당당한 야생과 무시무시한 괴수, 공포의 포식동물이 되지 못한 그 이름, 스피노사우루스.]
다른 시리즈 영화들과 달리, 영화 <쥬라기 공원 III>는 스피노사우루스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여러 영화들 중에서 <쥬라기 공원 III>는 유일하게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1편 <쥬라기 공원>부터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까지, 이 시리즈는 계속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반면, <쥬라기 공원 III>는 아주 강력한 스피노사우루스를 묘사하고, 심지어 티-렉스를 깔아뭉갭니다. 이건 고증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게다가 수많은 티-렉스 팬들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아니, 어쩌면 후자는 전자보다 중요할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쥬라기 공원> 시리즈에 고증을 바라겠습니까. 마이클 크라이튼은 고생물학 고증을 중시했으나, 원작 소설과 달리, 영화는 신나는 액션 블록버스터가 되었습니다. 이제 '깃털 없는' 벨로시랩터는 상징이 되었고, 그래서 이 영화 시리즈를 볼 때, 더 이상 관객들은 고증을 바라지 않습니다. 스피노사우루스가 고증을 무시했다고 비판하고 싶다면, 관객들은 깃털 없는 벨로시랩터를 함께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스피노사우루스는 엄청나게 욕설들을 퍼먹는 반면, 벨로시랩터는 그렇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고증이 아니라 로망이겠죠.
사실 이런 액션 모험 영화가 열심히 고증을 지킨다면, 사람들은 극장에 오지 않을 겁니다. 고증을 관찰하고 싶다면, 사람들은 자연 다큐멘터리 서적을 읽거나 동영상을 볼 겁니다. 만약 공룡 동물원에서 고생물학자들이 학술적인 답사 여행을 돌아다닌다면, 관객들이 그걸 좋아할까요. 어쩌면 이제 <쥬라기 공원> 시리즈에 열광하는 관객들은 공룡 팬이 아니라 괴수 팬인지 모르죠. 그들은 유전 공학 괴수에게 열광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그들은 자신들만의 괴수를 공룡이라고 왜곡하고, 그런 망상 속에서 행복하게 지내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사상의 자유가 있고, 착각하는 자유 역시 사상의 자유에 속할 겁니다. 뭐, 착각은 자유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죠.
따라서 왜곡된 망상 속에서 관객들이 행복하게 깃털 없는 벨로시랩터를 바라본다고 해도, 그건 잘못이 아니겠죠. 문제는 관객들이 벨로시랩터를 관대하게 용서하고 스피노사우루스를 사정없이 욕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고증 문제가 아닙니다. 왜 스피노사우루스가 욕을 먹겠어요. 이건 고증 때문이 아니겠죠. 티라노사우루스는 로망이고, 스피노사우루스가 그런 티라노사우루스를 짓눌렀기 때문에, 관객들은 욕할 겁니다. <쥬라기 공원 III>에서 스피노사우루스는 가장 강력한 포식동물이자 무시무시한 괴수가 되어야 했고, 티-렉스는 스피노사우루스를 위한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관객들은 이걸 용서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쥬라기 공원 III>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괴수로서 스피노사우루스가 마무리를 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편 <쥬라기 공원>에서 인간들은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원작 소설에서 공원 레인저 로버트 멀둔은 간신히 티-렉스를 상대하나, 영화에서 어떤 인간들도 티-렉스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사실 원작 소설에서도 후반부까지 로버트 멀둔은 티-렉스를 처리하느라 끙끙거렸죠. 티-렉스가 사방을 돌아다니고, 초식공룡 목장에 들어가고, 커다란 사우로포드를 잡아먹는다고 해도, 공원 경비대는 그저 손가락만 빨아야 했습니다.
영화에서 공원 경비대는 아예 제대로 나오지 않고, 티-렉스는 무소불위 강력한 괴수가 되었습니다. 괴수물은 괴수를 무섭게 포장해야 합니다. 이건 당연한 사실입니다. 괴수물은 괴수를 무섭게 포장해야 합니다. 문제는 <쥬라기 공원 III>가 이걸 무시한다는 사실입니다. 영화 후반부까지 스피노사우루스는 무시무시한 괴수입니다. 티-렉스를 비롯해 아무것도 스피노사우루스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스피노사우루스는 사방을 돌아다닐 수 있고,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인간들은 스피노사우루스를 퇴치합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인간들은 괴수를 퇴치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들이 괴수를 퇴치할 때, 괴수가 낑낑거리며 도망갈 때, 괴수는 위상을 잃습니다. 게다가 스피노사우루스는 공룡입니다. 스피노사우루스는 악마나 흡혈귀나 좀비나 유령이 아닙니다. 공룡은 야수이고, 공룡은 악당이 아닙니다. 하지만 <쥬라기 공원 III>에서 인간들은 스피노사우루스를 퇴치하고, 스피노사우루스는 악당이 되었습니다. 결국 스피노사우루스는 무시무시한 자연의 힘을 드러내는 괴수가 아닙니다. 스피노사우루스는 인간들에게 쫓겨나는 악당입니다. 설사 인간들이 스피노사우루스를 쫓아낸다고 해도, 스피노사우루스는 그런 꼴불견을 보이지 말아야 했습니다.
<킹콩>을 보세요. 킹콩 역시 인간들에게 죽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킹콩은 꼴불견을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킹콩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나, 예나 지금이나 킹콩은 당당한 야생입니다. <쥬라기 공원 III>에서 스피노사우루스가 당당한 야생인가요? 인간들에게 쫓겨나고 낑낑거리는 스피노사우루스가 당당한 야생이 되나요? 그건 아니죠. 어떻게 공룡 영화가 야생을 무시할 수 있나요? 왜 공룡 영화가 낑낑거리는 육식공룡을 묘사하나요? 스피노사우루스가 주역이 아니었습니까? 왜 주역 공룡이 낑낑거리며 도망가야 하나요?
리틀풋이 나오는 애니메이션 <공룡 시대>에서 육식공룡은 악당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룡 시대>에는 인간이 없습니다. 인간이 없기 때문에 <공룡 시대>에서 육식공룡이 악당이 되거나 꼴불견을 보인다고 해도, 그건 단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쥬라기 공원 III>에는 인간이 나오고, 인간(문명)과 스피노사우루스(야생)는 적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생은 당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스피노사우루스는 낑낑거리는 꼴불견을 보여줬습니다. 게다가 문제는 비단 그것만이 아닙니다. 막판에서 <쥬라기 공원 III>는 군대를 보여줍니다. 군대는 엄청난 무력을 자랑하고, 스피노사우루스는 일개 야생동물 따위로 추락합니다. 현대적인 화력 앞에서 스피노사우루스가 상대가 되겠어요. 군대를 목격하는 순간, 사람들은 스피노사우루스를 더 이상 강자로 여기지 않을 겁니다.
이게 뭡니까? 장난합니까? 왜 공룡 영화에서 가장 거대한 포식동물이 일개 야생동물로 추락해야 하나요? 물론 어떤 관객들은 이런 전개와 결말을 좋아할지 모릅니다. 취향들은 다양할 테고, 취향에는 우열이 없겠죠. 누군가가 <쥬라기 공원 III>를 재미있게 봤다고 해도, 그건 그 관객의 취향이에요. (게다가 저처럼 쌈마이한 괴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관객을 더욱 비난하지 못하겠죠.) 그렇다고 해도 <쥬라기 공원 III>에서 스피노사우루스는 꼴불견들을 연출했습니다. 괴수/공룡을 보여주는 영화로서 <쥬라기 공원 III>는 진짜 로망을 지키지 못했어요.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이것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