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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쥬라기 공원>, 형식과 매체 차이 본문

감상, 분류, 규정/괴수들과 개조 생명체들

<쥬라기 공원>, 형식과 매체 차이

OneTiger 2020. 4. 28. 20:07

[이 신비롭고 우아하고 환상적인 장면은 SF 생태계입니다. 동시에 SF 생태계는 비디오 게임에 기반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독서가 고상한 취향이라고 믿습니다. 고상한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 됩니다. 이른바 문학 소녀, 문학 소년은 지적이고 세련된 향기를 풍깁니다. 독서는 교양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교양을 쌓기 위해 인간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반면, (비디오) 게임 플레이는 고상한 취향이 되지 못합니다. 비디오 게임은 불량 식품, 마약과 비슷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약쟁이가 됩니다. 비디오 게임 플레이는 교양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인간은 사악한 비디오 게임을 버려야 합니다. 독서와 (비디오) 게임 플레이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전자는 고상하고 긍정적이고, 후자는 사악하고 부정적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들이 많은 교양 인문학 서적들을 읽는다고 해도, 만약 이 서적들이 자유 민주주의를 열심히 찬양한다면, 이 독서는 교양으로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만약 교양 인문학 서적들이 자유 민주주의가 좋다고 거짓말들을 열심히 지껄여댄다면, 사람들은 이것들을 읽고 좀비들이 될 겁니다. 독서는 고상한 교양보다 자유 민주주의 좀비가 됩니다. 사람들은 자유 민주주의 좀비들이 되고 성 폭행들과 인종 차별들과 빈부 격차와 환경 오염들을 외면합니다. 악랄한 독재 국가 헬조선에서 많은 독서들은 자유 민주주의 좀비로 이어집니다. 게임 플레이는 이런 좀비 독서와 다를지 모릅니다.



<압주>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분명히 <압주>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람들이 <압주>를 플레이한다면, 사람들은 자유주의 광신에 빠지지 않을 겁니다. 이 게임은 자유 민주주의가 좋다고 거짓말을 나불거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게임'은 풍요롭고 웅장하고 신비로운 해양 생물 다양성을 예찬합니다. <압주>는 왜 자연이 원초적인지 묘사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자연이 경이롭다고 느낄 겁니다. 자연이 경이롭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현실 속의 환경 오염들을 훨씬 진지하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어쩌면 생태학 서적 10권들보다 비디오 게임 <압주> 하나는 훨씬 나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많은 서적들을 읽는다고 해도, 만약 이 서적들이 자유 민주주의를 숭배한다면, 사람들은 자유주의 좀비들이 될 겁니다. 비록 <압주>는 그저 비디오 게임에 불과하나, 자유주의 좀비 독서보다 게임 <압주> 플레이는 훨씬 낫습니다. <압주>에게 고작 좀비 독서 따위는 감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이 사례는 매체 차이가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좀비 독서와 비디오 게임 <압주> 사이에서 매체 차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체 차이보다 내용입니다. 좀비 독서와 게임 <압주>에서 매체보다 내용이 중요한 것처럼, SF 장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합성어 북튜버(Booktuber)는 서적(book)과 유투버(youtuber)를 결합합니다. 북튜버는 유튜버가 책을 이야기한다고 가리킵니다. 만약 어떤 유튜버에게 주된 소재가 독서라면, 이 유투버는 북튜버가 될 겁니다. 북튜버 역시 유투버에 속하나, 다른 많은 유투버들과 달리, 북튜버들은 인기를 끌지 못합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책들을 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독서보다 동영상을 좋아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은 수많은 동영상 채널들을 늘어놓습니다. 왜 사람들이 신나고 화려한 동영상들보다 지루하고 밋밋한 책들을 선택해야 하나요? 책들이 밋밋하기 때문에, 북튜브 동영상 역시 밋밋합니다.


북튜브 동영상에서 기본 소재는 책입니다. 하지만 책은 글자 매체입니다. 글자 매체는 추상적입니다. 추상적인 글자 매체는 시각적인 동영상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과 영화 <쥬라기 공원>을 비교해보세요. 두 가지는 대조적입니다. 아무리 양쪽이 똑같이 공룡 사파리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소설과 영화는 대조적입니다. 공룡 사파리 '소설'과 공룡 사파리 '영화'가 대조적인 것처럼, 책과 동영상은 대조적입니다. '시각적인' 북튜브 동영상에게 주된 소재는 '추상적인' 독서입니다. 북튜버는 이런 모순에 부딪혀야 하고, 몇몇 인기 북튜버 이외에 북튜버들은 커다란 인기를 끌지 못합니다.



북튜버들이 책들을 소개하기 때문에, 북튜브 동영상들과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북튜브 동영상들이 책들을 소개하는 것처럼, 이 블로그 역시 책들을 소개합니다. <프랑켄슈타인>, <에코토피아 뉴스>, <붉은 별>,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식물 아내>, <미친 아담>, <쥬라기 공원>,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 <둠스데이 북>, <시간 여행자의 아내>, <2312>, <다섯 번째 계절>, <카본 다이어리 2015>는 소설입니다. 소설은 책입니다. 소설이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종이책과 전자책은 '책'입니다. '책'이라는 글자 매체 없이, 소설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프랑켄슈타인>부터 <카본 다이어리 2015>까지, 이것들은 소설'책'이고, 이 블로그는 이런 소설책들을 이야기합니다. 북튜브 동영상들과 이 블로그는 똑같이 책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양쪽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공통점보다 차이점은 훨씬 큽니다. 북튜버들은 오직 소설에만 치중하지 않습니다. 북튜버들은 인문학 서적들과 경영 서적들과 자연 과학 서적들을 이야기합니다. 북튜브 소재들 중에서 소설은 제한적입니다. 아무리 범위가 문학으로 넓어진다고 해도, 북튜브 소재들 중에서 문학은 제한적입니다. 게다가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 역시 오직 소설에만 치중하지 않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SF 생태계를 묘사합니다. 공원 관계자들은 복제 공룡 사파리가 폐쇄적인 동물원이라고 간주하나, 나중에 그들은 공룡 사파리가 열대 밀림과 상호 작용한다고 깨닫습니다. 공룡 사파리는 열대 밀림에 기반하고 상호 작용 생태계를 조성합니다. 이건 SF 생태계입니다. 현실에서 고생물학자들은 어떻게 중생대 스테고사우루스와 홀로세 열대 밀림이 상호 작용하는지 연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공룡 사파리는 SF 생태계입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처럼, 영화 <쥬라기 공원>은 SF 생태계를 묘사합니다. 공원 관계자들은 그들이 공룡들을 통제한다고 간주하나, 공룡들은 번성합니다.


공룡들은 번성하고 열대 밀림 생태계로 들어갑니다. 복제 공룡들은 생태계 구성 요소가 됩니다. 이건 SF 생태계입니다. 소설과 영화는 똑같이 SF 생태계를 묘사하고, 생태학 SF 덕후는 소설과 영화를 함께 떠들어야 합니다. 생태학 SF 덕후와 달리, 북튜버들은 '영화' <쥬라기 공원>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북튜버들이 영화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북튜버들에게 영화는 주된 소재가 아닙니다. 북튜버들은 앞자리 좌석이 불편하다고 투덜대지 않고, 멀티 플렉스 독점을 비판하지 않고, 관람 예절("제발 스포하지 마세요!")을 설득하지 않습니다. 북튜버들은 극장을 찾기보다 독서 행사장을 찾습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북튜버들은 소설'책'과 다른 매체들을 구분합니다. SF 팬들은 매체들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많은 작가들, 독자들, 평론가들은 소설이 가장 중요한 SF 매체라고 주장하고, 이건 타당한 주장이나, 그렇다고 해도 그림, 만화,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테이블 게임, 비디오 게임 역시 SF 매체가 될 수 있습니다. 메리 셸리와 쥘 베른과 에드워드 벨라미에게 오직 소설만 SF 장르에 속했으나, 21세기 초반 오늘날에서 여러 매체들은 SF 장르에 속합니다. 북튜버들은 <압주>를 이야기하지 않으나, 생태학 SF 덕후에게 <압주>는 환상적이고 황홀하고 우아합니다. SF 장르는 매체를 뛰어넘습니다.


사키사카 이오는 학원 로맨스 만화 <아오하라이드>를 그렸습니다. 북튜버들에게 소설 <쥬라기 공원>은 만화 <아오하라이드>에 가까울 겁니다. 양쪽 모두 '책'이기 때문입니다. 소설과 만화는 다르나, 분명히 양쪽 모두 출판 매체입니다. 반면, 생태학 SF 덕후에게 소설 <쥬라기 공원>은 만화 <아오하라이드>보다 비디오 게임 <압주>에 가깝습니다. 양쪽 모두 SF 생태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압주>는 지적 존재가 사라진 이후 주인공 잠수부가 수호자 백상아리와 함께 여러 해양 지역들을 방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생태학 SF 덕후는 <압주>를 <쥬라기 공원>과 함께 분류합니다. 매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소설 작가이고, 소설은 출판 매체입니다. 어슐라 르 귄이 <압주>보다 여기에 가깝나요?]



이건 형식, 매체가 SF 생태계 설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고생물학자들은 복제 스테고사루우스를 직접 만지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를 묘사하기 위해 사람들은 형식을 동원합니다. 어떤 화가는 그림을 그릴 테고, 어떤 작가는 소설을 쓸 테고, 어떤 프로그래머는 시각 효과를 구현할 겁니다. 형식이 무엇이 되든, SF 설정을 묘사하기 위해 사람들은 형식을 동원해야 합니다. 심지어 생태학 SF 덕후들이 잡담들을 나누고, 수다들을 떨고, 노가리들을 까는 동안, 잡담과 수다와 노가리 역시 형식, 매체가 됩니다.


잡담과 수다와 노가리는 언어라는 폭넓은 범주에 속합니다. 언어는 지배적인/사회적인 기호입니다. 사회적인 기호는 보편적입니다. 언어는 보편적입니다. 6살짜리 여자 아이부터 70세 할머니까지, 모두 언어를 사용합니다. 언어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언어는 비싸지 않습니다. 심지어 국가 기관은 초등학교 교육을 의무화하고 언어를 가르칩니다. 만약 사회 구성원들이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사회 관계들은 무너질 겁니다. 국가 기관이 언어를 직접 가르치는 것처럼, 언어는 보편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는 비싸지 않습니다. 생태학 SF 덕후들은 잡담들을 나누고, 노가리들을 까고, 언어를 쉽게 동원합니다.



잡담들과 수다들과 노가리들 속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존재합니다. 언어라는 형식 속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스테고사우루스를 성공적으로 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가리 같은 오직 특정한 형식 속에서만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존재하지 않으나, 노가리(언어)가 비싸지 않기 때문에, 생태학 SF 덕후들은 어떻게 열대 밀림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가 살아가는지 쉽게 노가리를 깔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가리를 까기보다 그림을 그리기는 훨씬 어려울 겁니다. 언어와 달리, 그림은 보편적이지 않고 싸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림이 보편적이라고 해도, 적어도 언어보다 그림은 상대적입니다. 국가 기관은 표준 언어를 장려(주입)하나, 국가 기관은 표준 그림을 장려(주입)하지 않습니다. 비록 사회 구성원들이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고 해도, 사회 관계들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합니다. 요시오카 후타바가 키쿠치 토우마에게 말을 건넬 때, 키쿠치 토우마는 "아아, 내 마음은 벅차오르는 중이야!"라고 생각할 겁니다. 이건 언어입니다.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키쿠치 토우마는 (홍조를 붉히고) 언어를 기본적으로 동원합니다. 언어는 기본이나, 그림은 기본이 아닙니다.



언어보다 그림은 비쌉니다. 아무 도구 없이, 우리는 육체(성대와 구강 구조)를 동원하고 언어를 사용합니다. 아기가 옹알이할 때, 아기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반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우리는 도구를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흙바닥에 낙서한다고 해도, 우리는 뭔가(흙바닥)를 동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육체만으로 그림을 그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어보다 그림은 비쌉니다. 그림보다 영화는 훨씬 비쌉니다. 오랜 동안, 인류 문화들은 수많은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쇼베 동굴의 붉은 표범부터 우마야드 모스크 프레스코까지, 인류 문화들에서 그림들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인류 문화들이 그림들을 그리는 동안,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서구 근대화 이후, 마침내 초기 영화들은 나타납니다. 20세기 이후, 영화 산업은 커지기 시작합니다. 1930년대 영화는 공룡을 묘사할 수 있었으나, 시각 효과는 딱딱했고 기계적이었습니다. 스톱 모션 스테고사우루스는 뚝뚝 끊어집니다. 슈트 액션과 다른 합성 시각 효과들 역시 어색했습니다. 20세기 후반, 마침내 영화는 생생한 공룡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생생한 공룡을 묘사하기 위해 영화는 비싼 제작 비용을 투입합니다. 비싼 제작 비용 없이, SF 영화 속의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너무 어색해지거나 존재하지 못합니다.



노가리(언어) 속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아주 쉽게 존재할 수 있으나, 영화 속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너무 비쌉니다. 영화 속의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너무 커다란 비용을 요구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생태학 SF 영화를 촬영하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만화를 그리거나 소설을 써야 합니다. 소설, 만화, 영화는 문화 예술에 속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문화 예술과 자본을 분리합니다. 사람들은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문화 예술이 나타난다고 착각합니다. 심지어 문학 평론가들조차 보편적인 문화 예술을 추구합니다. 영화 속의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이게 헛소리라고 일축합니다.


레드 벨벳은 아이돌 가수입니다. 무대에서 레드 벨벳은 춤과 노래를 선사합니다. 트와이스는 아이돌 가수입니다. 무대에서 트와이스는 춤과 노래를 선사합니다. 블랙핑크는 아이돌 가수입니다. 블랙핑크는 춤과 노래를 선사합니다. 여자친구 역시 아이돌 가수입니다. 레드 벨벳, 트와이스, 블랙핑크, 여자친구는 모두 춤과 노래를 선사합니다. 춤과 노래는 문화 예술에 속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문화 예술과 자본을 분리합니다. 이게 올바른 논리인가요? 아이돌 가수 팬들은 고개들을 흔들 겁니다. 레드 벨벳, 트와이스, 블랙핑크는 이른바 대형 기획사(SM, JYP, YG)에 속합니다. 여자친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돌 가수 팬들은 대형 기획사보다 중소 기획사가 불리하다고 주장합니다. 대형 기획사는 막대한 자본을 동원하고 아이돌 가수들을 지원하나, 중소 기획사는 막대한 자본을 동원하지 못합니다. 중소 기획사 아이돌 가수들은 막대한 지원을 받지 못합니다. 보컬 트레이닝부터 예능 방송 출현까지, 이건 여러 측면들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아무리 빅히트가 쏘스뮤직을 인수했다고 해도, 여자친구는 중소 기획사 소속이고, 이건 여자친구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적어도 어떤 아이돌 가수 팬들은 대형 기획사보다 중소 기획사가 너무 불리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이 사실인가요?


어쩌면 이건 그저 억지 망상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이게 그저 억지 망상에 불과하다고 해도, 분명히 막대한 자본과 문화 예술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블록버스터 영화 산업은 엄청난 광고들을 때리고 엄청난 수익을 얻습니다. 엄청난 광고들 속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존재합니다. 엄청난 광고 비용들 없이,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심지어 SF 칼럼니스트를 자처하는 누군가조차 사이언스 픽션이 또 다른 세계라고 주장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또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현실은 여기에 개입하지 못합니다. 애석하게도 이건 그저 무식한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SF 칼럼니스트를 자처하는 누군가는 사이언스 픽션이 또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현실이 여기에 개입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나, 이건 그저 무식한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현실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형식 없이, 사이언스 픽션은 절대 존재하지 못합니다. 고대 인류는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를 알지 못했으나, 그들은 이야기들을 퍼뜨렸고, 글들을 썼고,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사이언스 픽션보다 형식(말소리와 글자와 그림)은 우선합니다.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는 나타납니다. 이건 또 다른 모순을 일으킵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상업화를 비판합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시장 경제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나, 이 소설은 상업화를 크게 비판합니다. 영화 <쥬라기 공원>은 상업 영화입니다. 특히,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입니다. 블록버스터는 상품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블록버스터 영화는 존재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자연 생태계들을 교란합니다. 자본주의는 엄청난 무역량들과 인구 이동들을 선호하고, 이것들은 자연 생태계들을 교란합니다. 최근에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가 심각하다고 난리법석을 떠나,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기 전에, 이미 환경 전문가들은 자유 시장 경제가 자연 생태계들을 교란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자연 생태계들이 망가지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들은 줄어듭니다. 자연 생태계들이 망가지기 때문에, 이건 또 다른 돌연변이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태계 교란은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를 부추길지 모릅니다. 아무리 코로나 19 사태가 잠잠해진다고 해도, 몇 십 년 이후, 또 다른 전염병 사태는 커다란 피해를 미칠지 모릅니다. 이미 야생 동물들은 대대적인 전염병 사태에 시달립니다. 시장 경제, 상업화에서 자연 환경은 상품이 됩니다. 자연 환경은 환경보다 상품입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상업화와 생태계 교란을 비판하나, 블록버스터 영화 <쥬라기 공원>은 상업화와 생태계 교란에 기반합니다.


이건 황당한 모순입니다. <쥬라기 공원>은 상업화와 생태계 교란을 비판하나, <쥬라기 공원>은 상업화와 생태계 교란에 기반합니다. 이건 오직 <쥬라기 공원>만 모순을 일으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자친구는 서정적인 노래들을 부릅니다. 여자친구는 연예 사업에 기반합니다. 연예 사업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기반합니다. 자본주의는 민영화를 선호합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공공 의료를 추구했다면, 인류 문명은 충분한 의료진을 확보했을 테고 전염병 사태에 대처했을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공공 의료와 충분한 의료진을 개무시하고 오직 의료 민영화만 외칩니다. 수많은 환자들은 고통에 시달립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복제 공룡을 만나지 못합니다. 굶주리고 병드는 사람들 속에서 복제 공룡은 존재합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수많은 환자들은 고통에 시달리나, 자본주의 속에서 여자친구는 서정적인 노래들을 부릅니다. 굶주리고 병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여자친구와 서정적인 노래들은 그저 미친 돈지랄에 불과할 겁니다. 굶주리고 병드는 사람들에게 레드 벨벳과 트와이스와 블랙핑크는 그저 미친 돈지랄에 불과합니다. 이건 레드 벨벳이 진짜 돈지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레드 벨벳이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기반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기 때문에, 레드 벨벳은 문제가 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레드 벨벳보다 자본주의입니다. 적어도 레드 벨벳 노래들은 상업화를 직접 비판하지 않습니다. 여자친구 노래들 역시 생태계 교란을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노래 <Here We Are>는 환경 사회학과 가깝지 않습니다. 노래 <Here We Are>와 달리, <쥬라기 공원>과 환경 사회학은 가깝습니다. <Here We Are>보다 <쥬라기 공원>과 환경 사회학은 훨씬 가깝습니다. 하지만 <쥬라기 공원>은 상업화와 생태계 교란에 기반합니다. <쥬라기 공원>은 자기 모순에 빠집니다. 형식, 매체와 사이언스 픽션이 절대 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쥬라기 공원>은 자기 모순에 빠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황당무계한 공상이라고 조롱합니다. 현실에서 복제 스테고사우루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황당무계한 공상이라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현실(형식, 매체) 없이, 사이언스 픽션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 SF 작가는 언어를 고찰해야 합니다. 주류 문학 작가들이 언어를 고찰하는 것처럼, SF 작가 역시 언어를 고찰합니다. <쥬라기 공원>은 SF '소설'입니다. 형식(소설)과 비일상적인 상상력(공룡 사파리)은 사이언스 픽션을 함께 만듭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황당무계한 공상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공룡 사파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주류 문학 독자들보다 SF 독자들은 현실(형식)이 무엇인지 훨씬 깊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공룡 사파리가 당연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 역시 당연하지 않습니다. SF 독자들은 형식을 고찰하고 현실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비(非)현실은 형식을 요구합니다.


비(非)현실은 형식을 요구하고, 형식은 비(非)현실에 영향을 미칩니다. 1970년대 서구 문화에서 환경 운동은 커다란 붐을 일으켰습니다. 1962년 <침묵의 봄>은 1970년대 시끌벅적한 환경 운동으로 이어지고, 다시 환경 운동 분위기는 1980년대 SF 장르에 영향을 미칩니다. 1980년대 SF 장르는 1990년대 SF 장르로 이어집니다. 조지 터너는 <Drowing Towers>를 썼고, 주디스 모펫은 <Pennterra>를 썼고, 존 반즈는 <Mother of Storms>를 썼고, 데이빗 브린은 <지구>를 썼습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과 <붉은 화성> 3부작은 1990년대 생태학 SF 장르를 대표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대표적인 Cli-Fi 작가입니다.



어쩌면 1990년 생태학 소설 <쥬라기 공원> 역시 이 흐름에 합류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생태학 SF 흐름과 <쥬라기 공원> 사이에는 관계가 없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쥬라기 공원>은 상업화와 생태계 교란을 비판합니다. 생태학 SF 흐름 역시 거시적인 환경 변화를 고찰합니다. 그래서 <쥬라기 공원>과 <붉은 화성> 3부작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비록 <붉은 화성> 3부작이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를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쥬라기 공원>과 <붉은 화성> 3부작은 생태학 SF 범주에 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쥬라기 공원>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과 비슷합니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1972년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천연 자원 고갈, 삼림 파괴, 제국주의 침략을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SF 평론가들이 어슐라 르 귄과 생태학을 연결할 때, <세상 숲>은 대표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생태학 SF 흐름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어슐라 르 귄은 요란한 반전 분위기와 함께 <세상 숲>을 썼습니다. <세상 숲>이 SF 생태계(황폐해진 삼림 행성)를 논의하고, <쥬라기 공원> 역시 SF 생태계(복제 공룡 사파리)를 묘사하기 때문에, <세상 숲>과 <쥬라기 공원>은 비슷한 범주(생태학 SF)에 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SF 생태계를 다르게 표현합니다.



영화는 동영상이고, 동영상은 시각 형식, 매체입니다.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들은 시각 체험을 통과합니다. 시각 체험을 위해 관객들은 영화를 찾습니다. 특히,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경이로운 시각 효과는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경이로운 시각 효과를 구경하기 위해 관객들은 <쥬라기 공원>을 찾습니다. 소설은 시각 효과를 동원하지 못합니다. <파괴된 사나이>가 텍스트 그래픽을 동원하는 것처럼, 아무리 소설이 시각 효과를 동원한다고 해도,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글자는 추상적입니다. 추상적인 글자 매체 소설은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를 생생하게 묘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관객들이 '영화' <쥬라기 공원>을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관객들은 '소설' <쥬라기 공원>을 읽지 않을지 모릅니다. 소설이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를 생생하게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소설이 복제 스테고사우루스를 생생하게 묘사하지 못한다면, 왜 SF 팬들이 소설을 읽어야 하나요? 소설은 글자 매체이고, 어떤 관점에서 이건 단점이나, 또 다른 관점에서 이건 장점입니다. 논의는 언어를 동원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논의하는 동안, 우리는 다른 무엇들보다 언어를 사용합니다. 글자 매체로서 소설은 논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게는 이런 매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줄리엣 비노쉬가 명품 배우라고 해도, 만약 2시간 동안 줄리엣 비노쉬가 연이어 떠들고 떠들고 다시 떠든다면, 관객들은 영화가 질린다고 느낄 겁니다. 시각 매체 영화는 추상적인 논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합니다. 반면, 소설은 논의 과정을 서술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뒤돌아보며> 같은 소설은 소설보다 사상 서적에 가깝습니다. 심지어 소설은 일장 연설조차 서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쥬라기 공원>보다 소설 <쥬라기 공원>은 환경 사회학 논의를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소설에서 여러 등장인물들은 논의하고 토론합니다. 반면, 영화에서 논의와 토론은 희박합니다.


<쥬라기 공원> 주연 등장인물들은 과학자들이나, 영화에서 그들은 논의하고 토론하기보다 뛰고 구르고 달립니다. 영화가 시각 매체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과학자들은 논의하고 토론하기보다 뛰고 구르고 달려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환경 사회학 논의를 듣기 원한다면, 사람들은 공룡 사파리 영화보다 공룡 사파리 소설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렇게 형식(소설, 영화)은 비(非)현실(공룡 사파리)에 영향을 미칩니다. 비단 소설과 영화만 아니라 비디오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소설을 일방적으로 읽습니다. 관객이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영화를 일방적으로 봅니다.



"나는 스테고사우루스들과 갈리미무스들과 카마라사우루스들을 합사하기 원해!" 아무리 이렇게 독자와 관객이 생각한다고 해도, 독자와 관객은 소설과 영화 속으로 뛰어들지 못합니다. 독자와 관객은 복제 공룡 사파리를 직접 건설하지 못합니다. 독자와 관객은 복제 공룡 사파리를 일방적으로 읽고 봅니다. 반면, 게임 플레이어는 복제 공룡 사파리를 직접 건설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스테고사우루스들과 갈리미무스들과 카마라사우루스들을 합사하기 원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세 공룡들을 합사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능동적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T-렉스를 제외할 수 있습니다.


소설과 영화에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는 핵심이나, 어떤 게임 플레이어는 육식 공룡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여기저기에서 다들 T-렉스에게 열광하기 때문에, T-렉스는 너무 질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T-렉스가 생체 도살 기계라고 간주합니다. T-렉스는 웅장한 생태계보다 끔찍한 도살을 상징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것들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오직 초식 공룡들만으로 복제 공룡 사파리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관람객으로서 게임 플레이어는 공룡 사파리를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관람객이 되고 환상적인 공룡 사파리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



[소설 독자와 영화 관객과 달리, 게임 플레이어는 환상적인 복제 공룡 사파리를 직접 건설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설과 영화, 게임은 다릅니다. 소설과 영화, 게임은 똑같은 복제 공룡 사파리를 묘사하나, 세 형식들에서 복제 공룡 사파리들은 다르게 존재합니다. 독자는 환경 사회학 논의를 고민하고, 관객은 경이로운 시각 효과에 감탄하고, 게임 플레이어는 사파리 차량을 몰고 스피노사우루스 우리에 들어갑니다. 이건 영화보다 소설이 낫거나 게임보다 영화가 뒤쳐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과 영화와 게임에게는 다양한 장점들이 있고, SF 팬들은 다양한 장점들을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비단 소설과 영화와 비디오 게임만 아니라 만화와 연극과 애니메이션과 테이블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아무리 소설과 영화와 게임이 다르다고 해도, 전반적으로 SF 장르는 형식과 매체를 뛰어넘습니다. <쥬라기 공원: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쥬라기 공원: 오퍼레이션 제네시스>가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사파리 차량을 직접 운전하고, 짜증나는 폭우를 헤치고, 스피노사우루스에게 경적을 울릴 수 있습니다. 스피노사우루스는 투덜거리고 사파리 차량을 공격할 테고, 육식 공룡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게임 플레이어는 차량을 열심히 운전해야 합니다. 아니면 게임 플레이어는 공원 레인저 헬기를 띄우고 스피노사우루스에게 마취 주사를 직접 날릴 수 있습니다.



<쥬라기 공원: 오퍼레이션 제네시스>가 비디오 게임이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공원 레인저 헬기를 직접 띄우고 조종합니다. <오퍼레이션 제네시스>가 비디오 게임인 것처럼, <킹덤 러시>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오퍼레이션 제네시스>와 <킹덤 러시>는 똑같은 비디오 게임입니다. 하지만 SF 관점에서 이건 중요한 유사성이 아닙니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과 <아오하라이드>는 똑같은 출판 매체입니다. <세상 숲>과 <아오하라이드>는 관객과 게임 플레이어보다 (소설/만화) 독자를 똑같이 요구합니다. 서점 MD에게 이건 중요한 유사성이나, SF 장르에게 이건 중요한 유사성이 아닙니다.


SF 장르에게 가장 중요한 유사성은 '서구 근대화+비(非)현실'입니다. <오퍼레이션 제네시스>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에게는 유사성(서구 근대화+비현실)이 있습니다. 양쪽 모두 서구 근대화(생태학)를 이용하고, 양쪽 모두 비현실(복제 공룡 사파리와 외계 삼림 행성)을 이야기합니다. SF 평론가는 다른 무엇보다 이것(서구 근대화+비현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SF 장르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서구 근대화+비현실'입니다. 북튜버와 생태학 SF 독자가 다른 것처럼, <아오하라이드>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 다른 것처럼, SF 장르는 형식, 매체 차이를 뛰어넘고, SF 평론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찬양하기 위한 '독서'보다 생태계 '게임' <압주> 플레이가 나은 것처럼, 형식과 매체 차이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모든 독서는 고상하지 않고, 언제나 모든 게임 플레이는 불량 식품이 아닙니다. 자유주의 좀비 독서보다 생태학 SF 게임이 나은 것처럼, 게임 <압주>가 게임 <킹덤 러시>보다 소설 <세상 숲>에 가까운 것처럼, 형식과 매체는 모든 것을 장악하지 않습니다. 이건 SF 평론가가 형식, 매체 차이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SF 장르가 형식, 매체 차이를 뛰어넘는다고 해도, 소설에서 SF 장르는 출발했고, 여전히 소설은 가장 적합한 SF 형식인지 모릅니다. 형식과 매체는 비현실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형식과 매체 없이, 비현실은 존재하지 못합니다.


SF 평론가에게 형식과 매체보다 '서구 근대화+비현실'은 가장 중요하나, 동시에 SF 평론가는 형식 없이 비현실이 존재하지 못한다고 인식해야 합니다. 형식 없이, 비현실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막대한 광고 비용들 없이, 복제 스테고사우루스가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SF 평론가는 사이언스 픽션에 현실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 게임 <쥬라기 월드 에볼루션> 스크린샷 출처: 𝔍𝔬𝔥𝔫𝔰𝔬𝔫 陳,

https://steamcommunity.com/sharedfiles/filedetails/?id=2070250219


※ 게임 <오퍼레이션 제네시스> 스크린샷 출처: TheGamingBeaver,

https://www.youtube.com/watch?v=dhaQjP1MZ_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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