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중세 스팀펑크가 매력적인 이유 본문
[게임 <메일스트롬> 예고편의 한 장면. 드워프 증기 함선은 과도기적인 분위기를 풍길 수 있죠.]
조지 오웰은 어느 글에서 홍차가 먼저인가 우유가 먼저인가 논의했습니다. 밀크티를 만들 때 어떤 사람들은 홍차에 우유를 붓습니다.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은 우유에 홍차를 붓습니다. 무엇이 먼저 찻잔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밀크티는 맛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뭐, 각자 취향이 다르겠죠. 전문가들은 우유에 홍차를 부으라고 조언하나, 모두 그런 조언을 따를 필요는 없겠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스팀펑크를 떠올리곤 합니다. 홍자와 우유를 붓는 문제처럼 스팀펑크는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겹치는 지점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교집합을 이룬다면, 스팀펑크는 그 교집합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전에 말한 것처럼 어떤 스팀펑크는 사이언스 픽션과 비슷하고, 또 어떤 스팀펑크는 판타지와 비슷합니다. <아누비스의 문>은 시간 여행 이야기지만, 사실 판타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털 엔진>은 좀 더 사이언스 픽션에 가깝고 판타지를 어느 정도 배제합니다.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은 본질적으로 판타지입니다. (작가는 이걸 뉴 위어드 테일이라고 부르더군요.)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이 사용하는 설정을 슬쩍 빌리죠.
홍자를 붓느냐, 우유를 붓느냐. 이런 문제처럼 창작가는 사이언스 픽션을 강조하거나 판타지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결국 스팀펑크는 본질적으로 판타지가 되겠으나, 창작가는 농도를 조절할 수 있어요. 창작가는 완전한 판타지를 쓰거나 사이언스 픽션처럼 보이는 판타지를 쓸 수 있습니다. 밀크티가 맛이 달라지는 것처럼 그런 창작물들 역시 서로 다른 느낌을 풍길 겁니다. 유명한 스팀펑크 소설들은 19세기나 20세기 초반의 유럽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도서 사이트에서 소설 목록을 검색하면, 19세기 유럽 설정을 이용한 스팀펑크 소설들이 주르륵 등장하곤 합니다.
<마술사가 너무 많다> 같은 소설이 그렇습니다. 어떤 비평가는 이걸 스팀펑크가 아니라 가스등 판타지라고 부르더군요. 하지만 좀 더 시선을 돌리면, 중세 유럽에 각종 기계 공학과 유전자 공학을 접목하는 스팀펑크들을 볼 수 있습니다. 스팀펑크 설정에서 19세기 유럽은 대세를 차지했으나, 중세 유럽 역시 나름대로 비중을 차지했어요. 특히, 비디오 게임에서 이런 면모를 쉽게 확인할 수 있죠. <토치라이트> 같은 게임은 전형적인 중세 검마 판타지처럼 보이나, 골렘을 빙자한 각종 로봇들과 보행 병기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중세 스팀펑크는 19세기 스팀펑크와 전혀 다른 느낌을 풍기죠.
만약 보행 전차가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을 걷는다고 해도 그건 자연스러워 보일지 모릅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은 공업을 크게 발전시켰기 때문이죠. 철갑함 같은 함선들도 돌아다녔고요. 산업 혁명은 많은 것들을 바꿨고, 그래서 스팀펑크 작가들은 산업 혁명을 즐겨 이용하죠. 하지만 중세 유럽에 대규모 공업 단지와 철갑함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산업 혁명은 꿈 같은 소리이고, 중세 유럽인들은 고작 대포를 만들 뿐이었어요. 19세기 유럽인들은 모두 총기에 익숙하나, 13세기 유럽인들은 총기는 고사하고 대포조차 낯설게 바라보겠죠.
따라서 보행 전차가 13세기 유럽 도시를 걸어다닌다면, 그 광경은 꽤나 낯설지 모릅니다. 보행 전차가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을 걷는다면 그건 별로 어색하지 않을지 모르나, 반면, 보행 전차가 13세기 유럽 도시를 걷는다면 그건 꽤나 어색한 풍경이 될 겁니다. 19세기 스팀펑크는 산업 혁명이라는 디딤돌에 기댈 수 있으나, 13세기 스팀펑크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면모에 매력을 느낄지 모릅니다. 마법이 아니라 기이한 과학이 지배하는 판타지…. 이런 판타지는 전형적인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벗어날 수 있겠죠.
19세기 스팀펑크는 13세기 스팀펑크보다 훨씬 사이언스 픽션처럼 보일 겁니다. 대규모 공업은 과학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고, 사실 19세기 과학자들은 생물학과 물리학과 화학에서 두드러지게 성장했습니다. 비록 제대로 싸우지 못했으나, 19세기에 과학은 종교에게 대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3세기에 과학은 종교를 전혀 물리치지 못했어요. 사실 과학이라는 개념은 부족했죠. 그때는 신화와 종교가 사람들을 지배했죠. 그래서 13세기 스팀펑크는 사이언스 픽션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행 전차와 무전기와 인공 지능은 13세기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13세기 중세를 이용해 사이언스 픽션을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왜 13세기 중세를 이용해 사이언스 픽션을 이야기하느냐고 반문할 겁니다. 차라리 19세기가 훨씬 어울리는 배경이죠. 하지만 13세기 스팀펑크는 그만큼 독특한 느낌을 풍길 테고, 저는 그게 나쁘지 않은 취향이라고 생각해요. 13세기 스팀펑크가 일으키는 오묘한 배합 역시 나쁘지 않을 겁니다. 도서 사이트의 소설 목록에 19세기 스팀펑크뿐만 아니라 중세 스팀펑크들도 줄줄이 올라왔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