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저주받은 걸작들과 시대에 따른 재평가 본문
흔히 우리는 허먼 멜빌이 쓴 <백경>이 미국 문화의 금자탑이라고 추켜세웁니다. 미국 고전 문학들을 꼽을 때, 평론가들은 주저하지 않고 <백경>을 꼽습니다. <백경>은 수많은 후대 작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 문학을 자세히 논평하고 싶다면, 평론가들은 <백경>을 빠뜨리지 못할 겁니다. 이런 사례들을 고려한다면, <백경>이 나타났을 때, 독자들은 아주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습니다. 허먼 멜빌이 <백경>을 출간했을 때, 반응은 별로 뜨겁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평론가들은 <백경>이 미치광이 소설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나 악평은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반응조차 호의적이지 않았어요. 허먼 멜빌은 <주홍 글씨>를 쓴 나다니엘 호손을 존경했고, <백경>에 호손을 존경한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나다니엘 호손 역시 <백경>에 냉담했고, 허먼 멜빌은 크게 실망합니다. 이것 때문에 허먼 멜빌은 창작 의욕을 크게 잃어버립니다. 만약 21세기에 허먼 멜빌이 부활한다면, 멜빌은 깜짝 놀랄 겁니다. 멜빌은 자신의 소설이 미국 최고의 소설이라는 상황을 납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20세기에 평론가들이 <백경>을 재해석 및 재평가했기 때문에 <백경>은 금자탑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경>은 유일무이한 사례가 아닙니다. 소설 창작 세상에서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재해석이나 재평가는 흔한 사례입니다. 만약 수많은 출판사들이 어떤 소설을 무시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런 소설이 엉터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런 엉터리 소설은 퓰리처 수상작이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문전박대를 당하는 만화가가 엉터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엉터리 만화가는 아주 선구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모릅니다. 그 만화가가 만든 애니메이션은 길이길이 남는 역사적인 걸작이 될지 모르죠.
아니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숱한 명성들을 쌓은 어떤 소설가들은 잊혀질지 모릅니다. 한때 그들은 빛나는 거성이었으나, 흐르는 세월은 그런 별빛을 가릴지 모르죠. 시대에 따라 창작가들과 창작물들은 재평가를 받습니다. SF 세상에도 이런 사례는 있습니다. 예전에 말한 것처럼,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현대 장르 창작계를 주름잡는 작가입니다. 크툴루 신화가 없었다면, 현대 장르 창작계는 굉장히 달라졌을 겁니다. 수많은 후대 창작가들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유산을 따릅니다. 그래서 생전에 러브크래프트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을까요? 아서 코난 도일처럼 러브크래프트가 성공적인 작가가 되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러브크래프트는 가난에 시달리는 빈곤한 작가였어요.
만약 어거스트 덜레스 같은 추종자가 재평가하지 않았다면,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그저 사라졌을지 모릅니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분명히 생전에 러브크래프트는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인기는 고사하고, 러브크래프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바랐습니다. 문예 비평가 콜린 윌슨은 그런 러브크래프트가 아주 불행한 작가였다고 회고합니다. 흔히 우리는 <블레이드 러너>를 저주 받은 걸작이라고 부릅니다. 개봉 당시, <블레이드 러너>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영화 감독들과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블레이드 러너>가 대단한 걸작이라고 추켜세우나, 개봉 당시, <블레이드 러너>는 그런 호평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블레이드 러너>는 <이티>에게 밀려났죠. 이는 존 카펜터가 감독한 <괴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블레이드 러너>와 <괴물>과 <이티>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습니다. 하지만 <이티>는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고, <블레이드 러너>와 <괴물>을 죽을 쒔죠. 나중에 두 영화는 재평가를 받았고, 두 영화 모두 저주 받은 걸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저주 받은 걸작이라는 평가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러브크래프트는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사례를 접할 때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재미가 뭘까요? 재미있는 소설이 뭘까요?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이 있을까요? 만약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이 있다면, 왜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가난에 시달려야 했을까요? 만약 오늘날 러브크래프트가 지적 재산권을 받는다면, 수많은 소설들, 애니메이션들, 비디오 게임들에게 엄청난 자금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생전에 독자들이 러브크래프트를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리들리 스콧이나 존 카펜터나 해리슨 포드나 커트 러셀이 단명했다면, 그들은 <블레이드 러너>나 <괴물>이 재평가를 받는 순간을 지켜볼 수 없었을 겁니다. 만약 그들이 단명했다면, 세상을 뜨는 순간까지, 그들은 <블레이드 러너>나 <괴물>이 실패작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저는 어떤 소설이 재미있거나 재미없는 소설이라고 함부로 단언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시대적인 한계에 갇혔을지 모릅니다.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 우리는 창작물들을 평가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철학자는 이론이 시대를 뛰어넘지 못하고 시대 속에서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비평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창작물을 비평할 때, 저는 장점들을 찾느라 애씁니다. 지금 당장 그게 혹평을 받는다고 해도, 나중에 그건 재평가를 받을지 모릅니다. 아무도 그걸 장담하지 못합니다. 물론 재평가와 상관없이 비판은 비판입니다. 가령, <세계 대전 Z> 같은 소설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보장한다고 망상을 주절거립니다. 아무리 평가를 유보한다고 해도, 헛소리는 헛소리죠. 아무리 비평이 재평가를 염두에 둔다고 해도, 헛소리까지 재평가를 받지 못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