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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이매진 어스>와 SF 평론, 지배적인 관념 본문

사회주의/우익 이데올로기 비판

<이매진 어스>와 SF 평론, 지배적인 관념

OneTiger 2020. 8. 30. 20:07



어슐라 르 귄은 <빼앗긴 자들>을 썼습니다. 이 소설은 노동자 평의회 사회를 이야기합니다. 자본주의 현실에서 독자는 살아가나, 현실과 달리, 소설 배경 무대는 노동자 평의회 사회입니다. 소설과 현실 양쪽에서 자본주의 사회와 노동자 평의회 사회가 대립하기 때문에, 만약 독서 모임에서 독자들이 이 소설을 토론한다면, 독자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할 겁니다. 적어도 독자들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논의할 겁니다. 소설 주제가 노동자 평의회 사회이기 때문에, 아무리 독자들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이 이 소설을 논의하는 동안, 자본주의 문제는 빠지지 않을 겁니다.

 

만약 독자들에게 사회주의 지식들이 (어느 정도) 있다면, 독자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빼앗긴 자들>은 어떻게 자본주의가 나타났는지 설명하지 않으나, 현실에서 자본주의는 대대적인 식민지 수탈에게 기반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식민지 수탈은 자본주의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합니다. 하늘에서 자본주의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합리적인 서구 백인 남자들은 자본주의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막스 베버는 유럽 문화가 잘났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나타났다고 설명했고, 심지어 사회학자들조차 이것을 받아들이나, 막스 베버는 그저 편협한 서구 중심주의에 불과합니다.



독서 모임에서 독자들은 <빼앗긴 자들>과 노동자 평의회 사회를 토론하고 막스 베버와 서구 중심주의를 깔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사회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빼앗긴 자들>에서 핵심 주제가 사회 문제(자본주의 반대)이기 때문에, 아무리 독서 모임에서 독자들이 막스 베버를 깐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핵심 주제가 사회 문제이기 때문에, <빼앗긴 자들>은 참여 문학에 가깝고, 독자들은 서구 중심주의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깔 수 있습니다. 비단 <빼앗긴 자들>만 아니라 다른 SF/판타지 문학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전 팰위크는 단편 소설 <늑대 여자>를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에서 늑대 여자는 길들여지지 않은 저항을 상징합니다. 남자는 늑대 여자를 길들이기 원하고, 늑대 여자는 개, 가축이 됩니다. 야성적인 늑대는 저항할 수 있으나, 가축으로서 개는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권력자는 민중들이 개돼지라고 말했을 겁니다. 가축으로서 민중들이 그저 하찮은 것에 불과한 것처럼, 가축으로서 여자는 그저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남자는 주인이고, 가축 여자는 주인 남자에게 종속됩니다. 현실에서도 많은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종속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자는 주체이고, 여자는 보조적입니다. 자본주의는 온갖 성 차별들과 성 폭력들을 야기합니다.



여자와 남자에게 가장 커다란 차이가 무엇인가요? 대답은 임신과 출산, 수유입니다. 여자에게는 젖가슴과 자궁이 있습니다. 여자는 아기를 낳고 아기를 먹입니다. 이건 여자의 가장 커다란 특성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관념은 여자가 육아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육아는 노동입니다. 노동자는 댓가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자들, 육아 노동자들은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여자에게 젖가슴과 자궁이 있기 때문에, 여자가 아기를 낳고 아기를 먹이기 때문에, 지배적인 관념은 육아가 여자의 소명이라고 주장합니다. 육아가 여자의 소명이기 때문에, 여자는 육아 노동자가 아닙니다.

 

여자가 육아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여자가 아기를 힘들게 돌본다고 해도, 노동자로서 여자는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노동자가 댓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이건 착취입니다. 자본주의는 여자들을 착취합니다. 자본주의는 악랄한 가부장 제도입니다. 악랄한 가부장 제도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종속됩니다. <늑대 여자>는 이것을 설명하지 않으나, 이 소설이 가축으로서 여자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만약 독서 모임에서 독자들이 <늑대 여자>를 토론한다면, 독자들은 소설과 현실을 비교하고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깔 수 있습니다. 독서 모임에서 독자들은 가부장 제도, 사회 구조를 깔 수 있습니다.



만약 수전 팰위크가 이 독서 모임을 본다면, 문학 작가로서 수전 팰위크가 이 토론을 환영할까요? 어쩌면 수전 팰위크는 반대할지 모릅니다. 수전 팰위크는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수전 팰위크는 <늑대 여자>가 참여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록 문학 작가가 반대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문학을 토론하고 사회 구조를 까댈 수 있습니다. 문학보다 현실이 훨씬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늑대 여자>는 종속적인 여자를 이야기하나, 수전 팰위크는 종속적인 여자를 직접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수전 팰위크는 현실을 모방했고 단편 소설을 썼습니다.

 

수전 팰위크가 단편 소설을 쓰기 전에, 이미 현실은 존재했습니다. 문학 작가보다 이미 현실은 먼저 존재했습니다. 작가 의도보다 현실은 먼저 존재하고, 작가 의도보다 현실은 훨씬 거대합니다. 비록 문학 작가가 반대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문학을 읽고 거대한 현실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늑대 여자>를 읽고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까댈 수 있습니다. 소설 <언런던>은 어떤가요? <언런던>은 '지하 런던'을 이야기합니다. 소설 배경 무대가 지하 런던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밑바닥 계급을 들여다봅니다. 이 소설은 밑바닥 계급과 평범한 시민들과 아래로부터의 민중 혁명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만약 독서 모임에서 <언런던>을 토론하기 위해 독자들이 아래로부터의 민중 혁명을 논의한다면, 소설 작가 차이나 미에빌이 이것을 환영할까요? 네, 차이나 미에빌은 환영할 겁니다. 이 작가가 사회주의 계열이기 때문에, 차이나 미에빌은 아래로부터의 민중 혁명을 환영할 겁니다. 그래서 <언런던>은 참여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독서 모임에서 독자들이 <언런던>을 토론하고 민중 혁명을 논의한다면, 적어도 이건 엉터리 독서 모임이 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독서 모임에서 독자들은 <빼앗긴 자들>과 <늑대 여자>와 <언런던>을 읽고 사회 구조, 자본주의를 지적하고 고발할 수 있습니다.

 

<빼앗긴 자들>과 <늑대 여자>에서 사회 문제가 핵심 주제이기 때문에, 차이나 미에빌이 사회주의 작가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지적하고 고발할 수 있습니다. 세 문학들이 참여 문학에 가깝기 때문에, 독자들은 사회 문제에 개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모든 문학은 참여 문학이 아닙니다. 어떤 문학들은 순수 예술에 가깝습니다. 많고 많은 문학들은 참여 문학에 가깝지 않습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만화,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테이블 게임, 비디오 게임에도 이야기(텍스트)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참여 문학에 가까우나, 어떤 이야기들은 참여 문학에 가깝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참여 문학에 가깝지 않다면, 독자들이 이 소설을 토론하고 사회 구조를 까댈 수 있나요? 만약 어떤 TV 드라마가 사회 구조를 고발하지 않는다면, 시청자들이 사회 구조를 까댈 수 있나요? 만약 어떤 테이블 게임이 사회 문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이 사회 구조를 까댈 수 있나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게 과도한 이데올로기 강요라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소설 평론은 이데올로기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평론은 순수한 소설 핵심, 작가 의도를 분석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참여 문학이 아니라면, 독서 모임에서 이데올로기는 부차적인 문제일 겁니다.

 

"평론은 이데올로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평론은 순수한 예술 핵심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듀나님이 영화 <설국 열차>에게 색깔론을 들이대지 말라고 주장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예술 문화 평론이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듀나님이 현실 참여 평론에 반대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평론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이상한 주장입니다. 그 자체로서 이 주장이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지 말라는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이 주장은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것 같으나, 이 주장 역시 이데올로기입니다.



"영화 <설국 열차>에게 색깔론을 들이대지 말라." 이 주장은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나, 동시에 이 주장은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이데올로기를 거부하자!" 이 주장은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이데올로기 논쟁에서 이 주장은 자유로운 것 같으나, 그 자체로서 이 주장이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되기 때문에, 결국 이 주장 역시 이데올로기 싸움입니다. "소설 평론은 페미니즘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이 주장은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것 같으나, 이건 그저 포장지에 불과하고, 이 주장은 페미니즘을 강요하지 않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알맹이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영화 <설국 열차>에게 색깔론을 들이대지 말라." 이 주장이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처럼, 아무리 평론이 순수 예술을 주장한다고 해도, 결국 이 평론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평론이 순수 예술을 주장한다고 해도, 결국 이데올로기에서 이 평론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건 모든 평론이 사회 구조를 비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평론에서 사회 문제는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독자들이 <늑대 여자>를 논의하는 동안, 독자들은 전형적인 늑대 인간 설정과 단편 소설 속의 늑대 여자 설정을 대조할 수 있습니다. <늑대 여자>가 판타지 소설이기 때문에, 이 대조 역시 타당한 논의입니다.



페미니즘 단편 소설 <늑대 여자>는 억압적인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나, 독자들이 가부장 문화를 필수적으로 논의해야 하나요? 이게 독자 의무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아무리 <늑대 여자>에서 페미니즘이 핵심 주제라고 해도, 독자들은 페미니즘 문학보다 판타지 문학으로서 <늑대 여자>를 토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차이나 미에빌이 사회주의 작가라고 해도, 독자들이 좌파 관념을 <언런던>에게 필수적으로 적용해야 하나요? 이게 독자 의무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독자들은 사회주의 문학보다 판타지 문학으로서 <언런던>을 토론할 수 있습니다. 독서 모임에서 사회 구조 비판은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빼앗긴 자들>은 SF 소설입니다. <늑대 여자>와 <언런던>은 판타지 (장편) 소설입니다. SF/판타지로서 <빼앗긴 자들>과 <늑대 여자>와 <언런던>은 비(非)현실을 이야기합니다. 현실에서 외계 위성 문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늑대 여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지하 런던과 쓰레기통 무협 고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비현실 설정입니다. SF/판타지 장르는 비단 이것들만 아니라 많고 많은 비현실 설정들을 자랑합니다. 만약 미래 과학자들이 장거리 우주선을 건조하고 바이오 돔을 우주선에게 장착한다면, 장거리 생물 군계 우주선은 비현실 설정이 될 겁니다.



현실에서 우주선 폐쇄 생태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어떻게 폐쇄 생태계가 (원활하게) 순환할지 장담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생물 군계 우주선에 탑승하지 못합니다. SF 소설은 생체 잠수정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체 잠수정은 부드러운 곡선들을 자랑할 겁니다. 일반적인 기계 잠수정들과 생체 잠수정은 다를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아무도 생체 잠수정을 건조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생체 잠수정에 탑승하지 못합니다. 생체 잠수정은 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아무도 생체 잠수정에 탑승하지 못하는 것처럼, 오직 현실에서만 독자는 SF 소설을 읽습니다.

 

아무리 SF 소설 작가가 생체 잠수정을 묘사한다고 해도, 오직 현실에서만 SF 작가는 생체 잠수정을 묘사합니다. 아무리 SF 소설이 비현실 설정, 생체 잠수정을 묘사한다고 해도, SF 소설은 진정한 비현실 세계에 속하지 않습니다. 오직 현실에서만 SF 작가, SF 소설, SF 독자는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SF 작가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아무리 SF 작가가 원한다고 해도, 현실에서 SF 작가는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SF 작가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이건 아주 아주 매력적인 작업이나, 현실에서 새로운 세계는 나타납니다. 오직 현실에서만 SF 작가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합니다. 현실에서 비현실은 비롯합니다.

 

 



현실에서 비현실이 비롯하기 때문에, 현실은 비현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현실이 무엇인가요? 현실에서 무엇이 가장 지배적인가요? 대답은 자본주의입니다. 현실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지배적이기 때문에,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를 떠받듭니다. 학교 교육들은 자본주의를 가르치고, 학생들은 자본주의를 배우고, 이 학생들은 어른들이 되고 사회 구성원들이 됩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자본주의를 떠받듭니다. 그들이 문화 예술들을 만들고 소비하는 동안, 자본주의는 문화 예술에게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비현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사이언스 픽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만들고 소비하는 동안, 자본주의는 사이언스 픽션에게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비디오 게임 <이매진 어스>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외계 행성을 개척합니다. 외계 행성은 풍요로운 자연 환경을 선사하나, 만약 개척 문명이 산업 발전에 너무 매달린다면, 행성 온난화와 해수면 상승은 개척 문명을 무너뜨릴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산업 발전을 추진하고, 동시에 게임 플레이어는 지속 가능한 경제를 유지합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산업 발전에 너무 매달린다면, 해수면 상승은 개척 도시를 덮칠 테고, 게임 플레이어는 암울한 화면을 쳐다볼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암울한 화면을 쳐다보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중얼거릴지 모릅니다. "인류가 너무 탐욕스럽기 때문에, 인류는 자연 환경을 오염시켜. 무분별한 소비는 옳지 않아." 비단 게임 플레이어만 아니라 많고 많은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인류, 무분별한 소비를 지적하고 지구 온난화를 비판합니다. 심지어 환경 운동가들조차 탐욕스러운 인류, 무분별한 소비를 지적합니다. 하지만 인류가 정말 탐욕스럽나요? 모든 인간이 똑같은 인류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식민지 수탈에게 기반합니다. 산업 자본가 계급이 온실 가스를 뿜는 동안, 식민지 민중들은 끔찍한 고통에 빠졌습니다.

 

자본주의는 가부장 제도입니다. 수많은 산업 자본가들은 남자들이고, 무급/미지급 노동자로서 여자들은 착취를 당했습니다. 이 게시글에서 첫째 문단과 셋째 문단이 설명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식민지 수탈에게 기반하고 육아 노동을 착취합니다. 서구 백인 남자 자본가와 남아메리카 열대 밀림 여자는 똑같은 계급이 절대 아닙니다. 심지어 복지 국가에서조차 백인 남자와 백인 여자는 똑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환경 운동가들조차 모든 인간이 똑같은 인류라고 뭉뚱그립니다. 이 주장이 자본주의 범죄를 은폐하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서구 남자) 산업 자본가들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산업 자본가 계급은 막대한 온실 가스를 뿜었으나, 지배적인 관념이 자본가 계급보다 인류 전체가 탐욕스럽다고 비난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자본주의 환경 오염을 은폐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를 떠받듭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지배적인 관념, 자본주의 광신을 받아들입니다. 무분별한 소비 역시 지배적인 관념입니다. 산업 자본가 계급은 소비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상품 생산자입니다. 무산자 민중들이 상품들을 소비하기 전에, 이미 자본가 계급은 무분별한 상품들을 생산합니다. 아무리 상품들이 남아돈다고 해도, 2017년 버버리가 엄청난 상품들을 폐기한 것처럼, 자본가 계급은 무분별합니다.

 

진짜 문제는 소비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무분별한 상품 생산입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관념은 상품 생산보다 소비를 떠벌입니다. 자본가 계급이 생산자이고, 무산자 민중들이 소비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소비가 문제라면, 환경 오염은 자본가들보다 무산자 민중들 책임이 됩니다. 만약 상품 생산이 문제라면, 환경 오염은 무산자 민중들보다 자본가들 책임이 됩니다. 그래서 지배적인 관념은 무분별한 소비를 떠벌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환경 운동가들은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미 현실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는 지배적인 관념을 <이매진 어스>에게 적용합니다.



듀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듀나님이 환경 오염을 지적했을 때, 듀나님은 인류 전체를 모욕했고, 가부장 편견을 받아들였고, 서구 제국주의에게 충성했습니다. 남한 사회에서 비단 듀나님만 아니라 여러 SF 작가들/평론가들은 식민지 수탈, 가부장 편견을 무시하고 인류 전체를 모욕합니다. 비단 SF 작가들/평론가들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남한 사회는 식민지 수탈, 가부장 편견에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서구 제국주의, 가부장 편견 속에서 진보와 보수는 다툽니다. 아무리 진보와 보수가 다툰다고 해도, 서구 제국주의와 가부장 편견에서 진보와 보수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부장 제도 속에서 진보가 진보인가요? 아니, 이건 그저 수구 꼴통에 불과합니다. 가부장 제도 속에서 진보는 수구 꼴통에게 수렴합니다. 듀나님은 <설국 열차>에게 색깔론을 씌우지 말라고 주장했으나, 듀나님 본인은 가부장 문화에게 충성충성~했습니다. 결국 듀나님은 이데올로기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듀나님은 가부장 문화라는 이데올로기를 따랐습니다. 어떻게 가부장 문화가 색깔론을 운운할 수 있나요? 으으음~, 이건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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