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웬디고의 저주> - 19세기 과학과 이성의 갈등 본문
<괴물학자>는 고딕 호러풍 소설입니다. 정식 번역 제목은 '몬스트러몰로지스트'입니다. 아이고, 발음하기 힘들군요. '괴물학자'라는 편한 번역을 놔두고 왜 이런 어려운 발음을 그대로 차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목답게 괴물학자가 나오고, 각종 괴물들을 연구하는 내용입니다. 책 뒷표지에 러브크래프트 운운하는 홍보 문구가 있으나, 책의 주제나 분위기는 러브크래프트와 거리가 멉니다. 뭔가 괴악한 존재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무조건 러브크래프트를 갖다 붙일 수 없겠죠.
소설의 분위기는 러브크래프트보다 아서 코난 도일과 에드거 앨런 포를 연상하게 합니다. 19세기 서구. 과학이 한창 발달하고, 미신과 강령술이 유행하고, 산업이 부흥하고, 빈민들이 뒷골목을 떠돌고, 뭔가 요란하고 화려하고 지성적이지만, 한편으로 을씨년스럽고 추악하고 지저분한 배경. 주연 인물은 괴팍한 괴물학자와 어린 조수입니다.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는 콤비가 주인공이죠.
괴물학자는 개성이 사방으로 흘러넘치는 인물이고, 전형적인 '무뚝뚝하고 고집 불통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괴짜 천재'입니다. 오직 괴물학이라는 분야에만 헌신하고, 과학과 이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그 외에 다른 분야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당연히 결혼하지 않았고 여자에게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외모는 거지 꼴을 면하지 못하지만, 일단 제대로 차려입으면 품위 넘치는 미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괴물학 지식으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기 때문에 학계에서 인정을 많이 받고, 학계 밖의 사람들도 이 양반을 전문가로 인정해요.
겉보기와 달리 체력이 굉장하기 때문에 이상한 존재를 열심히 쫓아가거나 밤을 새서 연구하거나 그럽니다. 소설의 화자는 13살 소년이고, 어디로 보나 별로 괴물학자와 어울리지 않을 듯합니다. 다소 의기소침하고, 영민하지만 엉뚱한 구석이 있고, 뭔가 사건을 이끌기보다 괴물학자의 보조를 맞추는 편입니다. 음, 이거 어딘지 셜록 홈즈와 존 왓슨을 보는 듯하군요. 그 괴팍한 성격과 소심한 태도의 조합도 그렇고, 사실 소설 속에서 괴물학자와 어린 조수는 영 안 어울리는 찰떡궁합 같습니다.
만약 셜록 홈즈 시리즈에 고딕 호러를 결합한다면, 딱 이런 소설이 나올 듯합니다. 우주적 공포와 다소 거리가 있어요. 특히 이 글에서 설명하는 <웬디고의 저주>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주적 공포 소설은 인간의 인식 너머 형용할 수 없는 뭔가를 막막하게 바라봅니다. 인간은 그 심연의 비밀을 추구하지만, 절대 거기에 닿지 못하죠. 때때로 소설 주인공은 좌절하거나 미쳐버릴 수 있습니다. 금단의 지식을 연구하거나 다른 차원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만큼 댓가를 치뤄야 합니다.
반면, <웬디고의 저주>는 다릅니다. 인간의 인식 너머 뭔가가 나올 듯하지만, 그건 인류를 압도하는 절대적 힘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소설의 주제는 과학(이성)과 신화(미신)의 대결입니다. 주인공 괴물학자는 미신을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혐오하는 수준이고, 과학만이 인류의 앞길을 밝힐 거라고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듯합니다. 19세기 과학 만능주의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문제는 괴물학이라는 분야가 그 이름처럼 뭔가 괴상망칙하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괴물학이 흡혈귀나 좀비를 연구한다고 생각하지만, 주인공 괴물학자는 그런 오해를 경멸해요.
주인공 괴물학자는 토마스 에디슨 같은 인물을 바라보고, 괴물학이 그런 엄밀한 과학 분야로 성장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대세는 주인공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아요. 권위적인 연구자들은 괴물학에 미신을 포함시키려고 애쓰고, 괴물학은 미신과 강령이 판치는 음모론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괴이한 시간이 터지고, 그 사건은 어딘지 초자연적이고 신비로운 기운을 풍깁니다. 신화를 추종하는 연구자들은 이것이야말로 진짜 증거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그 사건의 전모를 완전히 밝힐 수 없습니다.
주인공 괴물학자는 그 사건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애쓰고, 다른 권위자는 그걸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해요. 두 인물의 의견이 부딪힐 때마다 사건은 과학과 전설 사이에서 오락가락합니다.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작가는 어느 한쪽의 손을 완전히 들어주지 않습니다. 이게 탐정 소설이라면, 작가는 당연히 전설을 물리치고 과학의 손을 들어줄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작가는 어느 한쪽을 완전히 두둔하지 않고, 가능성은 양쪽으로 무한히 열렸습니다. 음, 어쩌면 그 사건의 본질이 자연 과학적인지 혹은 조차연적인지 밝히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과학과 전설 사이를 오가는 소설의 분위기입니다. 소설 배경은 19세기입니다. 과학 혁명이 꽃을 피우고, 산업이 발달하고, 진보가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영혼을 소환하고, 요정을 목격하죠. 게다가 종교는 과학을 깔아뭉갰죠. 19세기는 과학과 마법이 교차하는 시대이고, 그래서 스팀펑크 소설들은 곧잘 19세기 배경을 채용합니다. 과학과 마법을 동시에 이야기하기 좋거든요.
스팀펑크 소설 속에서 마법사는 주문을 외우고 전투 비행선은 바다 괴수를 폭격하곤 하죠. <웬디고의 저주>는 전형적인 스팀펑크 소설이 아니지만, 고딕 호러와 스팀펑크의 분위기를 충분히 이어갑니다. 적어도 팀 파워스 소설만큼 스팀펑크를 구현한다고 할 수 있죠. 이런 배경 속에서 이성과 미신의 갈등은 훨씬 극적으로 돋보입니다. 그런 갈등 과정 자체가 이 소설의 핵심일 겁니다. 작가가 어느 한 편을 두둔하지 않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일 겁니다. 물론 결말부에서 이야기는 전환점을 마련하나, 그런 결말보다 과정이 훨씬 중요할 겁니다.
이 소설을 SF 소설로 볼 수 있을까요. 흠, 아마 반대하는 평론가들과 독자들이 많겠죠. 저 역시 이 소설이 전형적인 SF 소설이라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과학과 전설이 부딪히는 광경은 불꽃이 튀고, 소설은 나름대로 과학적 방법론을 운운합니다. 엄중한 과학적 고증은 좀 부족하지만, '뭔가 과학스러운 것'을 추구하죠. 이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독자는 그런 과학적 방법론에 매력을 느낄 수 있어요.
저는 그런 점이 좋았습니다. 만약 이 소설이 21세기나 훨씬 더 먼 미래를 배경으로 삼았다면, 분위기가 많이 달랐을지 모르겠군요. 21세기 배경도 과학과 전설의 충돌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역시 이런 주제는 19세기 배경 속에서 불꽃을 튀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화적인 상상력에 비해 과학적인 상상력의 폭이 좁고, 그게 살짝 불만이지만, 개인적인 취향일 뿐입니다. 어쨌든 작가는 실존 인물들까지 여러 차례 거론하고, 19세기 특유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 속에서 이성을 물리치는 끔찍한 전설이 활보하고요.
셜록 홈즈를 몇 번 언급한 이유는 <웬디고의 저주>가 기본적으로 탐정 소설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대도시에서 잔인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괴물학자와 어린 조수는 범인을 뒤쫓습니다. 괴물학자는 경찰과 몇 번 논의하지만, 경찰은 그저 걸림돌에 불과해요. 그 와중에 잔인한 사건은 더 많은 희생자들을 낳고, 공황과 불안은 도시를 채웁니다. 이 정도면 딱 빅토리아 시대 탐정 소설이 아닙니까.
괴물학자와 어린 조수가 적막한 야생을 탐험하는 과정도 재미있지만, 이 소설의 진짜 흥미로운 부분은 대도시의 추격일 겁니다. 살인 사건은 엽기적이고 피가 철철 넘쳐 흐릅니다. 범인은 신출귀몰하고 단서와 실마리는 오리무중입니다. 그 와중에 범인과 관련된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연쇄 살인은 멈추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명철한 두뇌를 빛내지만, 경찰들과 사사건건 부딪힙니다. 주인공의 치밀한 논리와 엄중한 이성 역시 기이한 사건 앞에서 맥을 못 춥니다. 이 모든 것들이 흥미진진한 탐정 소설처럼 전개됩니다. 괴물학자가 주인공인 탐정 소설 같군요.
분명히 재미있고 흥미진진하지만, 파격이나 전복은 좀 부족한 듯합니다. 세상을 통째로 뒤집는, 인식의 지평선이 아득히 멀어지는…. 그런 측면은 없습니다. 작가는 이성과 미신의 싸움을 계속 조명하고 뭔가 발상의 전환을 꾀하지만, 그 충격이 그리 크지 않군요. 분위기나 인물 설정, 소재를 꽤나 멋지게 구성했으나, 그걸 파격적인 주제로 끌어올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작가가 아예 그런 파격에 관심이 없을 수 있죠.
어쩌면 작가는 그저 신나고 으스스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바랐을지 모릅니다. 장르 소설들이 전부 파격적이거나 전복적일 필요는 없겠죠. 재미만 있으면 장땡이 아니겠어요. 일단 <웬디고의 저주>를 손에 잡는다면, 내려놓을 생각을 못 할 것 같아요. 그만큼 페이지가 휙휙 잘 넘어갑니다. 그 숱한 호평들이 근거가 없는 칭찬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책은 흥미진진한 수사와 추리를 보장하고, 적어도 독서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겁니다. 고딕 호러나 스팀펑크를 좋아하는 독자, 뭔가 괴이한 19세기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멋진 선물이 될 수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