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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의 펜텍스 설정 본문

생태/환경 보호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의 펜텍스 설정

OneTiger 2017. 12. 21. 20:11

[어머니 자연을 지키기 위한 마음은 좋아요. 하지만 늑대인간들은 아주 결정적인 것을 빠뜨렸습니다.]



스토리텔링 게임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는 제목처럼 늑대인간을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인 고딕 호러 창작물들 속에서 늑대인간은 사람들을 잡아먹는 식인귀입니다. 하지만 이 사이언스 판타지 속에서 늑대인간은 자연을 수호하는 전투적인 정령에 가깝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 등장하는 드루이드가 좀 더 포악해지고 호전적으로 변한다면, 아마 이렇게 되겠죠. 늑대인간들은 환경 오염을 향해 분노하고, 생물 다양성과 자연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수많은 악마들, 로봇들, 괴수들과 싸웁니다.


이 게임 속에서 자연 환경이 오염되는 이유는 웜이라고 하는 거대한 악마 드래곤이 폭주하기 때문입니다. 웜은 파괴를 담당하는 우주적인 질서이고, 지구의 자연 환경 역시 이런 폭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덕분에 지구의 생명체를 관장하는 어머니 가이아는 병들고, 가이아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연의 수호자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수호자들 중 하나가 늑대인간들이죠. 늑대인간들은 가이아를 지키기 위해 싸우나, 이런 싸움은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웜이라는 질서가 너무 강하고 거대하기 때문이죠. 어떻게 일개 늑대인간들이 우주적인 힘에 맞서겠어요.



특히, 늑대인간들이 치를 떠는 적들 중 하나는 펜텍스라는 기업입니다. 시간에 따라 설정이 많이 바뀌었으나, 펜텍스라는 거대 다국적 기업은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는 가장 중대한 존재들 중 하나입니다. 펜텍스는 그 어떤 악마와 로봇과 괴수보다 무섭습니다. 웜을 신봉하는 자본가들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회사를 운영하고, 덕분에 이 다국적 기업은 전세계에서 온갖 악행들을 일삼습니다. 펜텍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악덕 기업의 면모들을 골고루 갖추었습니다. 산업 폐기물들을 함부로 버리고, 유해한 화학 약품들을 조합하고, 밀림을 함부로 밀어내고, 야생 동물들을 밀렵하고, 불량 식품들을 생산하고, 노동자들을 마구 해고하고, 폭력적인 매체들을 광고합니다.


이 모든 것은 가이아를 병들게 합니다. 해고를 당한 노동자는 실의에 빠지고, 그런 부정적인 감정은 악마나 괴수에게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유해한 화학 약품은 돌연변이 괴수를 소환하고, 폭력적인 매체에 빠진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웜을 떠받드는 광신도가 됩니다. 늑대인간들은 최고의 전사들이고 무시무시한 생체 병기들이나, 이런 다국적 기업을 어쩌지 못합니다. 늑대인간들이 몇몇 직원을 살해한다고 해도, 다국적 기업을 뒷받침하는 체계가 무너지지 않는다면, 펜텍스는 계속 악행을 저지르겠죠.



게다가 펜텍스는 어마어마한 자금으로 다양한 기술들을 연구합니다. 덕분에 펜텍스 고위 간부는 최첨단 방어 구조를 갖췄습니다. 늑대인간들이 펜텍스 간부를 습격한다고 해도 이 간부는 방탄 차량과 근력 강화복과 은탄환 전용 총기를 소지했을 겁니다. 어쩌면 이 간부는 늑대인간 전용 병기를 소지했을지 모르죠. 아니면 강력한 살상 로봇이나 생체 병기를 대동했을지 몰라요. 닐 게이먼이 말했듯 상상 과학과 마법은 멋진 대립 구도를 이루죠.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 역시 '상상 과학 대 마법'을 중요하게 여기고요. 액션을 강조하는 사이언스 판타지답게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에는 다양한 로봇들과 첨단 장비들과 고성능 무기들이 등장합니다. 전투적인 자연 정령과 첨단 살상 로봇이 싸우죠. 멋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늑대인간들에게 이런 상황은 별로 멋지지 않겠죠. 이런 상황에서 늑대인간들이 펜텍스 간부를 습격한다고 해도 오히려 늑대인간들만 피해를 입을 겁니다. 이 고위 간부는 여유롭게 늑대인간들을 물리치고, 그들을 실험 표본으로 사용하겠죠. 늑대인간들이 각종 악마들과 로봇들과 괴수들과 싸우는 이유 역시 펜텍스에서 비롯합니다. 펜텍스가 노동자들을 절망에 빠뜨리거나 해로운 화학 약품들을 조합하거나 위험한 실험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악마들이나 로봇들이나 괴수들도 나타나지 않겠죠. 늑대인간들은 펜텍스를 끔찍하게 싫어하나, 문제는 펜텍스를 건드릴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늑대인간들이 고위 간부를 공격한다고 해도 각종 최첨단 기술에 가로막힐 겁니다. 하급 직원들을 도륙한다고 해도 그들은 평범한 노동자입니다.



따라서 늑대인간들은 "도대체 어쩌라는 말이냐?"라고 울부짖을 겁니다. 그런 암울함이 이 사이언스 판타지의 매력이고요. 하지만 아무리 펜텍스가 위압적인 세력이라고 해도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 스토리텔링 게임은 악덕 기업을 가장 무서운 적으로 설정했으나, 악덕 기업만 강조할 뿐이고, 자본주의라는 체계를 걸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실 다국적 기업이 무서운 이유는 기업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기업을 뒷받침하기 때문이죠. 자본주의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빠진다면, 가령, 임금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일으키거나 엄청난 교섭력을 강화한다면, 기업들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모 기업 자본가가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노조는 안 된다."고 떠드는 거고요. 물론 아무리 사회주의적인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웜이라는 우주적인 드래곤을 떠받들기 때문에 펜텍스는 쉽게 망하지 않을 겁니다. 설사 전세계가 <에코토피아> 같은 생태 혁명을 지향한다고 해도 결국 웜은 그런 생태 혁명을 짓밟겠죠. 생태 사회주의 혁명은 절대 웜이라는 거대한 악을 이기지 못해요. 하지만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는 무엇보다 환경 오염을 이야기하는 사이언스 판타지입니다. 그리고 이 사이언스 판타지에서 다국적 기업 펜텍스는 제일 치명적인 적대 조직이고요. 따라서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가 자본주의와 환경 오염을 이야기했다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사이언스 판타지는 그저 인류 문명과 다국적 기업만 나쁘다고 이야기하죠. 자본주의 체계가 아니라. 악덕 조직만 나쁘다고 이야기하고, 그런 조직을 뒷받침하는 구조 자체를 언급하지 않아요. 그런 분석은 장벽에 부딪힐 테고, 현대 문명의 근원적인 문제를 파헤치지 못하겠죠. 저는 그런 점이 꽤나 아쉽습니다. 게임 제작사는 설정을 멋지게 만들었으나, 그 설정에 현대 문명의 구조적인 모순을 충분히 집어넣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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