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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 판타지/기타

우주 어뢰, 왜 당신의 이름은 어뢰인가요

OneTiger 2017. 6. 12. 20:15

데이빗 웨버의 아너 해링턴 시리즈는 우주 함대전을 묘사합니다. 당연히 다양한 우주 함선들과 우주 병기들이 등장합니다. 현실의 수상함들이 포탄과 로켓과 미사일과 어뢰를 쏘는 것처럼 소설 속의 우주 함선들도 레이저를 쏘고 미사일을 쏘고 중력 장창을 쏩니다. 우주 함선들은 중력장이나 에너지 장을 펼치고 선체를 보호합니다. 견인 광선도 있고, 정찰 무인기도 있습니다. 그리고 에너지 어뢰나 감마선 어뢰도 있습니다. 흠, 어뢰…. 감마선 어뢰이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어뢰가 아니겠죠.


저는 아너 해링턴 시리즈를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감마선 어뢰나 에너지 어뢰가 무슨 병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실리스크 스테이션>을 읽었으나, 거기에 감마선 어뢰가 나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분명한 점은 소설 속의 우주 함선들이 감마선 어뢰를 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죠. 왜 이 병기를 '어뢰'라고 부르는가? 사실 어뢰는 수중 전용 발사체를 가리킵니다. 창공이나 우주의 발사체는 어뢰라고 불릴 이유가 없습니다. 우주의 발사체는 그냥 포탄, 로켓, 미사일, 레이저, 광선 등으로 불려야 할 겁니다.



우주에서 함대전이 벌어질 때, 미사일과 어뢰의 차이는 뭘까요. 왜 어느 것을 미사일이라고 부르고, 어느 것을 광선이라고 부르고, 어느 것을 어뢰라고 부를까요. 사실 이런 물음은 예전부터 존재했습니다. 당연히 수많은 SF 작가들과 독자들이 왜 하필 우주의 발사체가 어뢰라고 불리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SF 작가들과 독자들은 암묵적인 합의를 맺은 듯합니다. 만약 우주에서 어떤 발사체가 빠르게 날아간다면 그건 미사일이나 광선이고, 느리게 날아간다면 어뢰입니다. 사실 어뢰는 빠르다는 느낌을 풍기지 않습니다. 어뢰는 물 속을 움직이고, 대부분 프로펠러를 이용합니다.


하지만 미사일은 제트 추진으로 날아가고, 아주 빠르다는 느낌을 풍깁니다. 미사일은 굉장히 역동적이고 위력적인 이미지입니다. 그보다 어뢰는 느릿느릿하고 조용한 이미지입니다. 따라서 우주 구축함이 느리고 조용한 발사체를 쏜다면, 그 발사체는 어뢰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이게 아마 암묵적인 합의 같습니다. 물론 모든 SF 작가들과 독자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솔직히 저도 몇몇 해외 동호회만 뒤적였기 때문에 정확한 답이나 모종의 합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우주 어뢰가 그냥 언어 유희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우주는 또 다른 바다이고, 스페이스 오페라는 수많은 해군 용어들을 이용합니다. 고속정, 구축함, 순양함, 전함, 항공모함, 함재기 등등 스페이스 오페라는 해군 체계를 따릅니다. 사실 아너 해링턴 시리즈는 <혼블로워>에게 찬사를 바칩니다. <혼블로워>는 나폴레옹 전쟁을 다루고요. 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 군대를 진지하게 생각하기보다 기존 해군의 이미지를 차용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주 함대에도 여전히 해병대가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주 어뢰 역시 이런 이미지의 잔재일 겁니다. 우주 구축함이나 우주 항공모함이 있다면, 우주 어뢰도 있을 겁니다. 작가들은 뭔가 '해군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어뢰라는 명칭을 이용했을 겁니다. 우주 구축함이 어뢰를 발사한다고 묘사한다면, 뭔가 그럴 듯해 보입니다. 함포나 로켓이나 미사일과 어감이 다르죠. 그래서 저는 스페이스 오페라 작가들이 어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설정을 지나치게 파고들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솔직히 저도 '우주 어뢰'라는 표현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해요.



SF 소설이 뭔가 설정을 내놓으면, SF 영화나 게임도 그런 설정을 모방합니다. 우주 어뢰나 에너지 어뢰는 수많은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 영화, 게임에서 등장합니다. 가령, <스텔라리스> 같은 게임에서 우주 함대는 엄청난 어뢰를 쏟아붓곤 합니다. 그게 언어 유희라고 해도 구태여 딴지를 걸 필요는 없겠죠. 흠, 만약 진짜 프로펠러 발사체가 우주를 날아간다면…. 아, 이건 스페이스 오페라보다 스팀펑크에 어울리는 설정이겠군요. 만약 증기 우주선이 우주에서 진짜 어뢰(프로펠러 발사체)를 쏴도 거기에 뭐라고 항의하는 독자는 없겠죠.


저는 읽어본 적이 없지만, 어쩌면 그런 스팀펑크 소설이 정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우주 어뢰는 장르적인 관습이지만, 뭐, 저는 그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전적인 우주 함대전은 (비록 케케묵었다고 해도) 로망입니다. 우주 함선들이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마주보고, (구시대적으로) 함포를 쏘고, (배경은 분명히 광대한 우주임에도) 자그마한 전투기가 날아가고, 기타 등등. 딴지를 걸 수 있다면 엄청나게 걸 수 있겠으나, 이런 구닥다리도 매력이 될 수 있죠. 우주 어뢰는 그런 매력 중 하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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