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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이느은>의 무슨 대학교와 <2312>의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 본문

SF & 판타지/어떻게 읽는가

<우리사이느은>의 무슨 대학교와 <2312>의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

OneTiger 2019. 4. 1. 19:52

웹툰 <우리사이느은>은 로맨스 장르입니다. 만화 주인공 도가영과 한우진은 무슨 대학교 소속입니다. 교정. 캠퍼스. 청춘. MT(먹고 토하자?)와 흥겨운 대학교 거리와 술잔치들과 각종 행사들. 사회 초년생이라는 미묘한 위치. 고등학생은 아직 학생 신분이나, 대학생은 거의 성인에 가깝습니다. 성인처럼 대학생들은 연애하고, 사랑하고, 섹스하고, 결혼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직 대학생들은 본격적인 사회 생활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대학생들에게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치열한 사회 전쟁에서 몇 발자국 물러날 수 있습니다. 직장인들과 달리, 대학생들은 여름 방학을 즐길 수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두근거리고 설레는 연애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할 겁니다. 대학교는 화기애애한 연애를 그리기 위한 좋은 무대입니다. <우리사이느은>은 아무 이유 없이 대학교를 배경 무대로 삼지 않았을 겁니다. 만화 1화는 무슨 대학교 영상학과 오리엔테이션 모임을 그립니다. 그 이후에도 화기애애한 연애를 위해 꾸준히 무슨 대학교는 배경 무대가 됩니다. 재미있게도 '무슨 대학교'가 무슨 대학교인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무슨 대학교'는 정말 무슨 대학교입니다. 웹툰 <우리사이느은>은 그저 '무슨 대학교'가 무슨 대학교라고 모호하게 처리할 뿐입니다.



웹툰 <우리사이느은> 속에서 무슨 대학교는 허구적인 공간, 익명의 공간입니다. 현실 속에서 무슨 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웹툰 <우리사이느은>에서만 무슨 대학교는 존재합니다. 이연지 작가는 특정한 대학교보다 보편적인 대학 생활을 묘사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이연지 작가는 특정한 대학교보다 발랄하고 풋풋하고 활기차고 설레는 대학 생활을 묘사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특정한 대학교를 우회적으로 지목하고 비판하기 위해 이연지 작가는 '무슨'이라는 익명을 붙였을지 모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무슨 대학교는 허구적인 공간입니다.


독자가 인터넷 브라우저에 접속하고 웹툰 사이트에 들어가고 <우리사이느은>을 읽기 전까지, 무슨 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웹툰 <우리사이느은>을 읽고 무슨 대학교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무슨 대학교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사이느은>을 읽지 않는다면, 무슨 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독자들이 <우리사이느은>을 인식할 때, 무슨 대학교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무슨 대학교가 특정한 대학교라고 해도, 이런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사이느은>이 고려 대학교를 묘사한다고 해도, 현실 속의 고려 대학교와 <우리사이느은>의 고려 대학교는 다릅니다. 만화 속의 고려 대학교는 허구적인 공간입니다. 현실 속의 고려 대학교에는 도가영과 한우진이 없습니다.


오직 만화 속의 고려 대학교에만 도가영과 한우진은 있습니다. 도가영과 한우진을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사이느은>은 고려 대학교를 그립니다. 도가영과 한우진이 입학한 고려 대학교는 <우리사이느은>이라는 만화에 속합니다. 아무도 <우리사이느은>을 읽지 않는다면, 도가영과 한우진은 존재하지 못할 테고, (만화 속의) 고려 대학교 역시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어쩌면 어떤 대학교의 먹자 골목에는 <수리술술>이라는 술집이 정말 존재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화 속의 <수리술술>과 현실 속의 <수리술술>은 다릅니다. 현실 속에서 독자들이 <수리술술>을 찾아간다고 해도, 독자들은 도가영과 한우진을 만나지 못합니다.



물론 아무도 <우리사이느은>을 읽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사이느은>이라는 만화 그 자체는 존재합니다. <우리사이느은>이라는 만화 그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사이느은> 속에서 무슨 대학교나 고려 대학교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만화의 용도입니다. 기본적으로 만화는 독자를 요구합니다. 이연지 작가는 작가이고 동시에 최초의 독자입니다. 이연지 작가가 만화를 그리는 순간, 이연지 작가는 최초의 독자가 됩니다.


하지만 오직 혼자 만화를 읽기 위해 이연지 작가가 <우리사이느은>을 그렸나요? 이연지 작가가 오직 혼자 만화를 읽고 싶었다면, 왜 이연지 작가가 <우리사이느은>을 공개했나요? 인터넷 서버 용량을 채우기 위한 지상 목표 때문에? 그건 아닐 겁니다. 이연지 작가가 <우리사이느은>을 공개하는 순간, <우리사이느은>은 독자를 요구합니다. 이연지 작가가 얼마나 많거나 적은 독자들을 예상했든, 공개적인 창작물로서 <우리사이느은>은 독자를 요구합니다. 아무도 <우리사이느은>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사이느은>은 가치를 잃을 겁니다. 아무리 통장에 억만 대금이 있다고 해도, 무인도에서 신용 카드는 무용지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아무도 <우리사이느은>을 읽지 않는다면, 도가영과 한우진과 무슨 대학교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사이느은>은 유명한 만화이고, 무슨 대학교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우리사이느은>을 읽는 중인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만화를 읽는다면, 무슨 대학교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사이느은>이 고려 대학교를 묘사하고 독자가 그걸 읽는다면, (허구적인) 고려 대학교는 존재할 수 있어요.



하지만 만화 <우리사이느은>이 고려 대학교를 묘사한다고 해도, <우리사이느은>은 고려 대학교의 모든 것을 묘사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려 대학교에서 어떤 학생들은 공부할 테고, 어떤 학생들은 알콩달콩하게 캠퍼스 연애를 즐길 테고, 어떤 학생들은 술을 한 잔 걸치러 갈 겁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고려 대학교는 존재하고, 고려 대학교 학생들 역시 존재합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사이느은> 속의 고려 대학교는 존재하지 못할 테고, 도가영과 한우진 역시 존재하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대학교를 묘사하기 위해 만화 작가로서 이연지 작가는 특정한 그림체를 이용합니다. <우리사이느은>이 고려 대학교를 묘사한다고 해도, 만화 속에서 특정한 그림체로서 고려 대학교는 존재합니다. 현실 속에서 이런 그림체로서 고려 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림체로서 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은 그림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만화 속의 대학교와 현실 속의 대학교는 똑같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사이느은>이 특정한 대학교보다 무슨 대학교를 묘사하기 때문에, 무슨 대학교는 훨씬 허구적인 공간이 됩니다. 독자는 무슨 대학교의 영상학과 강의실에 책상들이 몇 개인지 직접 세지 못합니다.


이연지 작가가 말하지 않는다면, 독자는 그걸 절대 알지 못할 겁니다. 독자가 알고 싶다고 해도, 독자에게는 그걸 조사하기 위한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사이느은>에서만 무슨 대학교는 존재하고, 따라서 이연지 작가가 설명하지 않는다면, 영상학과 강의실에 책상들이 몇 개인지 독자는 알지 못할 겁니다. 사실 이연지 작가가 설정하기 전까지, 영상학과 강의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연지 작가가 만화를 그리거나 설정을 공개하고, 독자가 그걸 인식할 때, 영상학과 강의실에서 책상들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화를 보는 동안, 독자들은 허구적인 공간을 인식합니다. 이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독자들에게는 현실이 있습니다. 독자들은 만화 속의 허구적인 무슨 대학교를 현실로 끌어오고 현실을 허구적인 무슨 대학교에 반영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무슨 대학교라는 허구적인 공간을 아무렇지 않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독자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독자는 무슨 대학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조선 시대 황진이가 만화 <우리사이느은>을 읽을 수 있다고 해도, 황진이는 무슨 대학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조선 시대에는 4년제 대학교가 없었고, 황진이는 4년제 대학교 학생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21세기 남한 독자들은 고려 대학교를 비롯해 숱한 대학교들과 숱한 대학생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이 있기 때문에, 21세기 남한 독자들은 <우리사이느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황진이는 4년제 대학교들을 알지 못하고 현실을 만화에 반영하지 못합니다. <우리사이느은>이 고려 대학교를 묘사한다고 해도, 황진이에게 그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자체로서 <우리사이느은> 속의 무슨 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자가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무슨 대학교에게는 가치가 있습니다.



황진이처럼 독자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허구적인 공간은 허구적이라는 한계를 드러낼 겁니다. 황진이가 <우리사이느은>을 제대로 읽기 원한다면, 황진이는 먼저 4년제 대학교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황진이는 왜 MT가 먹고 토하자(?)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황진이는 왜 오유진이 '신나게 달리자'고 말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신나는 술판과 육상이 무슨 관계를 맺나요? 왜 술자리에서 대학생들이 달리자고 말하나요? 왜 아무도 달리지 않음에도, 다들 신나게 달리자고 말하나요?


황진이는 이런 것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고립되고 공허한 공간 속에서 4년제 대학교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인 공간 속에서 4년제 대학교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1세기 남한이라는 특정한 사회 속에서 4년제 대학교들은 존재합니다. 사실 다른 나라들에도 대학교들이 있으나, 다른 나라 대학교들과 남한 대학교들은 다릅니다. 외국 대학교 학생들은 남한 대학교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남한 사회 속에서 남한 대학교들은 존재합니다. 따라서 황진이는 남한 대학교들과 함께 남한 사회를 이해해야 합니다.


조선 시대 황진이는 쉽게 21세기 남한 사회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21세기 독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우리사이느은>을 읽을 수 있으나, 황진이에게 이건 너무 어려운 과정입니다. 우리가 어떤 창작물을 이해할 때, 우리는 그저 창작물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창작물을 둘러싼 여러 제반 사항들을 함께 받아들입니다. 황진이는 <우리사이느은>을 둘러싼 여러 제반 사항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황진이는 쉽게 <우리사이느은>을 읽지 못할 겁니다. 황진이는 물을지 모릅니다. "아니, 왜 자꾸 다들 달리자고 말하지? 왜 술집에서 다들 달리고 싶어하지? 왜 다들 오직 달리자고 말할 뿐이고, 아무도 달리지 않지?"



다행히 21세기 남한 독자들은 <우리사이느은>을 둘러싼 여러 제반 사항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사이느은>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우리사이느은>은 일상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만약 창작물이 일상을 반영하지 않는다면? 창작물이 일상을 반영한다고 해도, 만약 창작물에서 비일상적인 부분이 아주 커진다면?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2312>처럼, 만약 SF 소설이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을 묘사한다면? 21세기 남한 독자들은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을 구경하지 못합니다. 21세기 인류 문명은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을 만든 적이 없고,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은 허구적인 공간이라는 한계를 훨씬 크게 드러냅니다. <우리사이느은>은 무슨 대학교가 일상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무슨 대학교는 일상적이고, 그래서 무슨 대학교는 자신이 허구라는 사실을 쉽게 감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2312> 속의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은 일상보다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훨씬 크게 보여줍니다. 무슨 대학교와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은 똑같이 허구적이나, 무슨 대학교보다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은 훨씬 허구적입니다. 독자들이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독자들은 구태여 어려운 과학 지식들을 공부해야 합니다.



조선 시대 황진이에게 무슨 대학교보다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은 훨씬 곤혹스러울 겁니다. 21세기 독자들이 하드 SF 소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조선 시대 황진이는 훨씬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우리사이느은>은 만화이고, <2312>는 소설입니다. 소설보다 만화는 훨씬 시각적입니다. 만화 <우리사이느은>을 읽는 순간, 독자는 도가영의 겉모습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반면, 소설 <2312>를 읽는 순간, 독자는 글자들을 이해하고 글자들로 세상을 그려야 합니다. 조선 시대 황진이가 먹고 토하자(?)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황진이는 <우리사이느은>을 보고 도가영의 겉모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황진이는 도가영이라는 그림체를 이해하느라 애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2312>는 다릅니다. 황진이가 21세기 미국 영어를 안다고 해도, 황진이는 글자들로 <2312>를 이해해야 합니다. 황진이가 영어를 알지 못한다면, 황진이는 절대 <2312>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21세기 남한 사람들이 영어를 알지 못한다면, 21세기 남한 사람들 역시 절대 <2312>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언어는 사회적인 기호입니다. 언어는 사회적으로 파생합니다. 술집에서 아무도 육상 경기를 벌이지 않음에도 대학생들이 달리자고 말하는 것처럼, 언어는 사회와 문화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아직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을 만든 적이 없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언어는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을 인식하는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소설 <2312>는 이런 언어를 이용해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을 묘사해야 합니다. 소설 <2312>는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을 반영하지 못하는 언어를 이용해 소행성 야생 보호 구역을 묘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사이느은>보다 <2312>는 훨씬 불리합니다. <2312>는 허구적인 한계를 훨씬 크게 드러내고, 동시에 <2312>는 (허구적인 한계를 감추지 못하는) 글자들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사이느은>보다 <2312>는 훨씬 어려울 겁니다.



※ MT가 '먹고 토하자'라면, OT는 '엄청 먹고 토하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자까 작가가 그린 만화 <대학일기>처럼, 사실 대학생 새내기들은 자신들의 주량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정말 OT는 엄청 먹고 토하자가 될지 모릅니다. 먹고 토하는 즐겁고 씐나는 대학 생활은… 하하, 좋지 않아요. 위장에 빵구가 뚫린다는 농담은 농담이 아닐지 모릅니다. 열정적으로 달리는 술판은 대학 생활 최고의 친구이고 동시에 최고의 웬수가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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