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우리는 매일 오후에>, 핵 발전소와 비현실 설정 본문
SF 장르에서 환경 오염과 비(非)현실 설정은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환경 오염과 비현실 설정을 함께 묘사한다면, 독자는 이게 기발한 소재라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이미 이게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고지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수소 폭탄 실험은 고지라에게 영향을 미치고, 고지라는 선박들을 습격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고지라는 도시에 상륙하고 문명을 파괴합니다. 1954년 원작 영화가 환경 오염(수소 폭탄 실험)과 비현실 설정(거대 괴수)을 함께 묘사했기 때문에, 이 시리즈에서 환경 오염은 필수적인 소재가 되었습니다. 2014년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014년 영화 <고지라>에서 핵 발전소는 거대 괴수 무토를 자극하고, 무토는 깨어나고 문명을 파괴합니다. 만약 고지라가 무토를 처치하지 않았다면, 인류 문명은 석기 시대로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핵 발전소는 대표적인 환경 오염이고, 무토(거대 괴수)는 비현실 설정입니다. 2014년 <고지라>는 핵 발전소와 비현실 설정을 결합합니다. 이 영화는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만약 어떤 이야기가 핵 발전소와 비현실 설정을 결합한다면, <고지라>가 사이언스 픽션인 것처럼, 이 이야기가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나요? 박솔뫼 작가는 <우리는 매일 오후에>를 썼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어떤가요?
<우리는 매일 오후에>에서 주된 소재는 핵 발전소 사고입니다. 이 단편 소설은 핵 발전소를 연이어 언급합니다. 또 다른 주된 소재는 작은 남자입니다. 단편 소설 화자는 여자이고, 여자는 남자가 계속 작아진다고 말합니다. 여자와 남자는 연인 같으나, 남자가 아주 작기 때문에, 여자에게 남자는 이상한 뭔가가 됩니다. 한때 여자와 남자는 연인이었으나, 이제 여자에게 아주 작은 남자는 이상한 뭔가입니다. 작은 남자는 비현실 설정입니다. 현실에서 거대 괴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게 비현실 설정인 것처럼, 현실에서 작은 남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작은 남자는 비현실 설정입니다.
<고지라>가 핵 발전소와 비현실 설정(거대 괴수)을 결합하는 것처럼,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핵 발전소와 비현실 설정(아주 작은 남자)을 결합합니다.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비슷합니다.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비슷하고, <고지라>가 사이언스 픽션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사이언스 픽션이 되나요? 글쎄요, 대답은 애매합니다. 많은 SF 팬들은 <고지라>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인정할 겁니다. 하지만 SF 팬들은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부정할지 모릅니다. 왜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닌가요?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비슷하나, 왜 전자가 사이언스 픽션이고, 왜 후자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닌가요? <우리는 매일 오후에>에서 비현실 설정이 과학에게 기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지라>에서 비현실 설정은 과학에게 기반합니다. 과학자들은 거대 괴수들을 연구합니다. 그들은 고생물학에게 기반합니다. 고생물학은 인류 문명이 나타나기 전에 거대 괴수들이 방사능 에너지 생태계에 속했다고 분석합니다. 고생물학은 과학입니다. 거대 괴수 설정은 과학에게 기반합니다. 거대 괴수는 비현실 설정입니다. 비현실 설정은 과학에게 기반합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고지라>와 달리, 아주 작은 남자는 과학에게 기반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아주 작은 남자가 이상하다고 느끼나, 여자는 과학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왜 남자가 아주 작은지 분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과학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과학, 논리, 합리성과 비현실 설정을 결합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마법 때문에 남자는 아주 작아졌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저주 때문에 남자는 아주 작아졌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다른 이유 때문에 남자는 아주 작아졌는지 모릅니다. 여자는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사실 여자는 여기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습니다.
남자는 아주 작아졌으나, 여자는 이유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아주 작은 남자 그 자체를 인정합니다. 남자가 무엇이든, 여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SF 팬들은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고지라>에서 고생물학은 선사 시대 생태계(거대 괴수 생태계)가 방사능 에너지에게 기반한다고 분석하고, 그래서 핵 발전소는 무토를 자극했습니다. 고생물학과 비현실 설정과 핵 발전소는 이어집니다. <우리는 매일 오후에>에서 과학과 비현실 설정과 핵 발전소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 단편 소설은 과학에게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오후에>에서 과학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다릅니다. <고지라>는 사이언스 픽션이나,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사이언스 픽션이 100%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소설 독자들은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비슷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친근한 짝궁이기 때문에, SF 작가들은 판타지 소설들을 쓰곤 합니다. SF 작가들이 판타지 소설들을 쓰는 것처럼,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친근한 짝궁이 될 수 있습니다.
<고지라>와 <모스라>는 비슷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지라>와 <모스라>가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고지라> 시리즈에서 모스라는 아주 중요한 거대 괴수입니다. 고지라, 킹기도라와 함께 모스라는 주연 3대 괴수입니다. 모스라가 중요한 괴수이기 때문에, 비록 <고지라: 싱귤러 포인트> 예고편이 모스라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거대 괴수 매니아들은 모스라를 기대하는 중입니다. <고지라> 시리즈에서 모스라는 아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나, 모스라는 SF 설정보다 판타지 설정에 가깝습니다. 고지라는 SF 설정이고, 모스라는 판타지 설정이나, <고지라>와 <모스라>는 비슷합니다.
SF 설정과 판타지 설정이 어울릴 수 있는 것처럼, 비록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사이언스 픽션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독자들은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비슷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비슷한 것처럼, SF 장르는 이 단편 소설을 100% 밀어내지 않습니다. 파올로 바치갈루피는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을 썼습니다. 이건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엘리자베스 베어는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를 썼습니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처럼, 이 단편 소설이 사이언스 픽션인가요?
분명히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과 달리, 어떤 독자들은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가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느낄 테고, 어떤 독자들은 이게 판타지에 가깝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종말 문학 걸작선>은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과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를 포함합니다. 두 단편 소설이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기 때문에, <종말 문학 걸작선>은 두 단편 소설을 포함합니다. 비록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가 판타지에 가깝다고 해도, 비록 이게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해도, 이 단편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과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모음집에 속하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는 짝궁입니다.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가 짝궁이기 때문에,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비슷할 수 있습니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과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가 비슷한 것처럼,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비슷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네 가지들은 어울릴 수 있습니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과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두 단편 소설은 인류 문명이 멸망했거나 암울한 위기에 빠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고지라>에서 무토가 도시를 파괴하기 때문에, <고지라>는 묵시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고지라>가 묵시적인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고지라>와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는 비슷합니다.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핵 발전소 사고를 비롯해 여러 거대 사고들, 거대 사건들을 언급합니다. 이 단편 소설은 인류 문명이 너무 너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고 암시합니다. 무엇보다 <고지라>와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과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처럼,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비현실 설정과 심각한 위기를 함께 묘사합니다.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비슷합니다.
<고지라>와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과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교집합을 형성합니다. 비현실 설정과 묵시적인 분위기는 교집합이 됩니다. 네 가지들이 교집합을 형성하기 때문에, 네 가지들은 비슷할 수 있습니다. 만약 <종말 문학 걸작선>이 <우리는 매일 오후에>를 포함한다면, 이건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인류 문명이 멸망했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나, 이 단편 소설은 심각하고 묵시적인 위기들을 묘사하고 비현실 설정을 제시합니다. 비록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종말 문학 걸작선>에 속한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SF 팬들은 고개들을 저을 겁니다. 그들은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종말 문학 걸작선>에 속하지 못한다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이 단편 소설이 묵시적인 위기와 비현실 설정을 함께 묘사한다고 해도, 이 단편 소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오후에>와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는 교집합을 형성하고,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는 <종말 문학 걸작선>에 속하나,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속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비슷하다고 해도, 이건 그저 표면적인 유사성에 불과합니다. 두 가지는 다릅니다.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에서 교집합이 그저 표면적인 유사성에 불과한 것처럼, 아무리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교집합을 형성한다고 해도, 이건 그저 표면적인 유사성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교집합이 그저 표면적인 유사성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다릅니다. 두 가지는 비슷하지 않습니다. SF 팬들은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다르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이 사례들은 장르와 분류가 고정적이지 않다고 보여줍니다.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종말 문학 걸작선>에 속할 수 있거나 속하지 못합니다.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습니다. 분류가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SF 장르 역시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SF 장르는 분류이나, 분류가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SF 장르는 유동적입니다. 어떤 것들은 SF 장르에 100% 속하나, 어떤 것들은 애매합니다. <고지라>는 SF 장르에 100% 속하나, <모스라>는 애매합니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은 SF 장르에 100% 속하나, <그리고 깊고 푸른 바다>는 애매합니다. (골수 하드 SF 독자들은 <고지라>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릅니다.) SF 장르는 고정적인 경계선보다 유동적인 논의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SF 장르인지 끊임없이 논의합니다. 이 논의는 완벽한 합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논의하고, 논의하고, 논의하고, 계속 논의합니다. 이 논의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논의 과정은 끝나지 않습니다. 논의 과정 그 자체는 SF 장르가 됩니다. 그래서 SF 장르는 순간이 아닙니다. SF 장르는 과정입니다. 만약 우리가 SF 장르를 이해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순간보다 과정을 파악해야 합니다. 과정이 기나긴 흐름이기 때문에, 과정이 계속 흐르기 때문에, 순간보다 과정을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과정을 파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류에 빠질 겁니다.
비록 <고지라>와 <우리는 매일 오후에>가 비슷하지 않다고 해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우리는 매일 오후에>에서 핵 발전소는 주된 소재입니다. <고지라>에서 거대 괴수 생태계는 방사능 에너지에게 기반합니다. 오랜 동안, 지구에서 방사능 에너지는 줄어들었으나, 자본주의 사회가 핵 발전소를 지었기 때문에, 거대 괴수 무토는 깨어나고 문명을 파괴합니다.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핵 발전소를 비판하고, <고지라>에서도 핵 발전소는 위험한 것입니다. 모스라가 핵 폐기물을 정화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가 부족민을 납치하기 때문에, <모스라>에서도 핵 발전소는 나쁜 것입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약 핵 발전소가 사라졌다면, 여자와 아주 작은 남자는 핵 발전소 누출 사고를 이야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환경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약 핵 발전소가 사라졌다면, 거대 괴수 무토는 에너지를 쉽게 얻지 못했을 테고, 거대 괴수 생태계는 순환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무토가 고지라를 죽였다면, 아무도 무토를 막지 못했을 테고, 인류 문명은 석기 시대로 돌아갔을 겁니다. 비록 고지라가 죽었다고 해도, 만약 2019년 <고지라: 괴수왕> 설정이 2014년 <고지라> 설정에 적용된다면, 여전히 모스라가 살아있기 때문에, 모스라는 무토를 막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그림(링크)처럼, 아무리 모스라가 무토에게 덤빈다고 해도, 고지라보다 모스라는 약합니다. 토호 시리즈 모스라보다 몬스터버스 모스라는 약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모스라는 수컷 무토를 격퇴할지 모릅니다. 반면, 모스라가 육중한 떡대 암컷 무토를 격퇴할 수 있나요? 심지어 고지라 방사열선조차 암컷 무토를 한 번에 처치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모스라는 암컷 무토를 처치하지 못할지 모르고, 심지어 암컷 무토는 모스라를 죽일지 모릅니다. 만약 암컷 무토가 모스라를 죽이고, 다른 티타누스들이 무토를 처치하지 않는다면, 인류 문명에게 희망은 없을 겁니다. 진신무시 역시 심각한 문제입니다.
인류 문명이 암울한 석기 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핵 발전소는 위험합니다. 핵 발전소가 위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오후에>는 핵 발전소 사고를 비판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핵 발전소를 없애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핵 발전소를 없애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회들 역시 핵 발전소를 유지합니다. 다들 핵 발전소가 문명을 상징한다고 착각합니다. 암컷 무토는 모스라를 죽일지 모르나, 왜 자본주의 사회가 핵 발전소를 허물지 못하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게 돈벌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경 보호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벌이, 높은 이윤입니다.
자본주의는 돈벌이가 최고라고 간주합니다. 비록 지구 생물권이 멸종한다고 해도, 비록 인류 문명이 석기 시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오직 돈벌이만 중요합니다. 비록 진신무시가 모스라를 찢어발기고, 인류 문명이 희망을 품지 못한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오직 이윤 창출만 바라봅니다. 자본주의가 오직 이윤만 바라보기 때문에, 비록 핵 발전소가 너무 위험하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핵 발전소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돈벌이를 위해 자본주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기후 변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돈벌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합니다.
기후 변화가 돈벌이가 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환영합니다. 자본주의는 환경 오염을 환영합니다. 만약 인류 사회가 기후 변화와 핵 발전소를 비롯해 환경 오염들을 막기 원한다면, 인류 사회는 자본주의를 타파해야 합니다. 돈벌이 사회에서 인류 사회는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이미 기후 위기가 변곡점을 지났다고 걱정합니다. 22세기가 다가오기 전에, 만년설과 빙하들은 녹고 사라질지 모릅니다. 만약 기후 위기가 변곡점을 정말 지났다면, 인류 사회는 훨씬 심각한 상황에 처할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 게임 <고지라> 스크린샷 출처: Biollante /The Final-Form,
www.youtube.com/watch?v=tndEcah8lxA
※ 영화 <고지라> 컨셉 아트 출처: Legend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