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우드 엘프와 드루이드의 분위기 차이 본문
[이런 드루이드가 보여주는 모습은 우드 엘프가 보여주는 아름다움과 크게 거리가 있습니다.]
검마 판타지에는 다양한 종족들이 등장합니다. 그런 종족들은 전형적인 특성을 보이죠. 가령, 사람들은 드워프를 보고 든든한 방패 전사와 노련한 기술자를 떠올립니다. 드워프들은 판금 갑옷과 철벽 방패를 두르고, 적의 공격을 단단하게 막아냅니다. 아니면 깊고 깊은 광산 속에서 다양한 금속들을 채굴하고 증기 기관들을 작동시킵니다. 드워프는 검마 판타지에 증기 기관을 도입할 수 있는 유용한 종족이죠. 호비트는 유쾌하고 발랄하고 호기심이 많습니다.
호비트를 보고 단단한 판금 전사와 능숙한 공학자를 떠올리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호비트는 뛰어난 도적이나 쾌활한 음유 시인이 될 수 있고, 행복한 정원사나 농부가 될 수 있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드워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편견일 겁니다. 하지만 음유 시인 드워프는 그리 흔한 설정이 아니죠. 엘프는 자연 친화적인 종족이고, 숲을 보호하거나 다른 야생 동물들과 어울립니다. 엘프 중에는 하이 엘프나 다크 엘프도 있고, 이들은 그리 자연 친화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엘프의 이미지는 대부분 울창하고 우아한 삼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덕분에 엘프들은 흔히 드루이드나 레인저가 되곤 합니다. 드워프가 든든한 전사이고 노련한 공학자인 것처럼, 호비트가 은밀한 도적이거나 활발한 음유 시인인 것처럼, 엘프는 숲을 관찰하고 지키는 드루이드와 레인저가 되곤 합니다. 이런 엘프 드루이드는 여러 검마 판타지에서 널리 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드루이드가 오직 엘프만의 전유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엘프 이외에 인간이나 노움도 드루이드가 될 수 있습니다. 보드 게임 <패스파인더>는 노움 드루이드 리니를 예시 캐릭터로 내놨죠.
리니는 눈표범을 데리고 다니고, 각종 자연 주문들을 구사합니다. 이 노움 드루이드의 생김새는 엘프의 우아하고 가냘프고 아름다운 이미지와 꽤나 거리가 멉니다. 똑같이 자연 친화적이지만, 노움 드루이드와 엘프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 드루이드나 드워프 드루이드는 더욱 그렇죠.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에는 드워프 드루이드나 드워프 레인저도 나오는데, 이들의 모습은 결코 우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연 친화적인 엘프들은 우아하게 보이지만, 드루이드 자체는 별로 우아하지 않아요.
엘프와 드루이드의 이미지가 서로 다른 이유는 뭘까요. 저는 그게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연이라고 말하지만, 자연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여러 개념을 포함합니다. 아마 가장 널리 쓰이는 개념은 '조화'일 겁니다. 자연은 조화입니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어울리고 공생합니다. 문화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자연이 높은 차원의 조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조화 개념이 더욱 성장하면, 다른 생명들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이 세상 만물들은 서로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없지만, 적어도 최대한 죽음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죠. 그래서 생태주의자들 중에 채식주의자가 그렇게 많다고 봅니다. 사실 사람은 고기를 그렇게 많이 소비할 필요가 없죠. 성장기 아이나 환자나 유목민이라면 모를까, 모든 생산물을 풍족하게 누리는 현대 도시인들이 고기를 대량으로 소모할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가 있다면 그저 쾌락적인 이유 때문이겠죠. 한편 자연은 풍부한 생산력, 건강하고 활기찬 이미지를 대변합니다. 이런 자연의 이미지는 왕성한 생명력과 이어지고, 생산성을 나타냅니다.
소위 '어머니 자연'은 이런 왕성한 생명력에서 유래했을 겁니다.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에서 어머니 자연이라는 개념을 비웃었으나, 정원을 가꾸는 행복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정원을 가꾸면, 각각의 뿌리와 싹의 생명력에게 무엇을 할 수 있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물어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땅의 것이 썩어야 흙이 비옥해질 수 있다고 말했는데, 자연계의 물질대사를 드러내는 문장이죠. 어머니 자연을 비웃었던 고대 종교인조차 땅의 생명력, 자연의 생산력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좋아했죠. 게다가 푸르른 자연, 건강한 먹거리, 생명이 넘치는 환경은 오늘날 좋은 삶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잘 먹히는 소재입니다. 그래서 친환경과 유기농은 비싼 값에 팔리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TV 광고를 보면, 초록색 나뭇잎이나 싱그러운 초원을 이용해 각종 화장품이나 세재 등을 광고합니다. 아파트 같은 주거 지역도 친환경에서 결코 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짙푸른 녹음이 둘러싼 아파트는 광고 시장에서 아주 잘 나가는 이미지입니다.
물론 광고는 광고일 뿐입니다. 광고와 현실은 전혀 다르죠. 녹색 사업을 추구하겠다는 기업들은 많습니다. 심지어 환경 단체들과 연합하는 기업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기업들은 온실 가스를 팍팍 뿜고, 폐기물을 버리고, 자연 보호 구역을 침범합니다. 탄소 배출권은 투기의 대상이 되거나 가격이 둘쑥날쑥 오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자연 친화도 얼마든지 상품으로 써먹을 수 있어요. 정작 생물 다양성은 다국적 기업들 때문에 급속도로 줄어드는 중이지만, 기업들은 (돈만 벌 수 있다면) 자기네 껍데기를 얼마든지 녹색으로 칠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친환경을 잘 써먹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만큼 건강하고 싱그러운 자연 이미지에 혹하기 때문이겠죠. 자연적인 것은 아름답습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엘프가 우아한 종족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엘프는 자연 친화적이고 자연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특히 엘프들은 자연계 중에서 나무, 식물을 상징하죠. 엘프가 자연계의 다른 요소를 상징할 수도 있지만, 일단 이 종족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이양하의 <나무> 같은 수필처럼 나무는 사람들에게 밝고 긍정적인 기운을 선사합니다. 따라서 엘프들도 그런 기운을 받았을 수 있죠.
하지만 식물 역시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입니다. 식물들은 보이는 것만큼 밝고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애초에 자연계에는 긍정과 부정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연계의 여러 요소 중에서 이것저것 고를 뿐입니다. 소설 <쥬라기 공원>을 보면, 식물학자 엘리 새틀러가 사람들의 편견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공원 관계자들은 고대 식물을 심었는데, 하필 그게 독성 식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원 관계자들은 식물 따위가 무슨 피해를 끼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엘리 새틀러는 사실 식물도 진화 경쟁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생명체라고 생각하죠.
이런 사례를 우리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시박은 생물종 침입을 이야기할 때, 단골 손님처럼 등장합니다. 비단 가시박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외래종 식물들은 다양한 피해를 끼칩니다. 식물은 결코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생명이 아닙니다. 비록 움직일 수 없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공격하고 생존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물의 모습은 대중 문화에 그리 널리 퍼지지 않은 듯합니다. 트리피드 같은 식물 괴수도 있으나, 아무래도 식물의 대중적인 인상은 훨씬 온건하죠. 아마 엘프들도 식물의 좋은 면, 밝고 긍정적인 면만을 이어받았겠죠.
그렇다고 해서 검마 판타지의 엘프들이 항상 아름답다는 뜻은 아닙니다. 엘프는 인기가 많은 종족이고, 그래서 다양한 하위 분파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이 엘프는 이름처럼 귀족적으로 나옵니다. 이들도 어느 정도 자연 친화적이지만, 실반 엘프와 우드 엘프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이들이야말로 숲에 살고 숲에 죽는 엘프입니다. 이름부터 실반과 우드잖아요.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와일드 엘프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와일드 엘프는 실반 엘프나 우드 엘프처럼 널리 쓰이는 설정이 아닌 듯합니다. 제가 검마 판타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군요.
어쨌든 와일드 엘프, 우드 엘프, 실반 엘프는 야생적인 숲 속에 은거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움보다 거칠고 야성적인 면모가 두드러집니다. 뭐, 실반 엘프가 바바리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실반 엘프도 엘프이고, 오크나 홉고블린보다 훨씬 우아하죠. 하지만 하이 엘프와 문명화된 인간 제국과 드워프에 비한다면, 실반 엘프는 나름대로 야성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이런 하위 분파를 고려해도 엘프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우아함입니다. 숲 속의 엘프는 우아함 그 자체입니다. <드래곤 라자>의 이루릴을 보세요.
드루이드는 이와 다릅니다. 드루이드도 종종 우아할 수 있으나, 엘프처럼 언제나 천상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드루이드는 추레하고 지저분하고 그야말로 야성적이고 거칠거칠할 때가 있습니다. 엘프 드루이드는 아름다울 수 있으나, 인간 드루이드나 드워프 드루이드는 그렇지 않습니다. 창작물과 설정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드루이드는 엘프에 비해 확실히 추레합니다. 저는 드루이드가 자연계의 온갖 요소들을 모두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엘프는 아름답고 평온한 식물만 반영하지만, 드루이드는 식물, 동물, 벌레들, 심지어 대자연의 분노까지 끌어안습니다.
엘프는 우아하고 훤칠하게 자란 나무를 상징하지만, 드루이드는 그 외에 다른 것들도 상징합니다. 흉포하게 사슴을 찢어발기는 호랑이도 드루이드의 이미지가 될 수 있습니다. 맹독을 쏘는 말벌 떼도 드루이드의 이미지가 될 수 있습니다. 버섯이나 곰팡이의 부패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대한 폭풍이나 쓰나미, 천둥 벼락도 예외가 아닙니다. 드루이드가 상징하는 자연의 이미지는 엘프보다 훨씬 넓습니다. 그래서 추레하고 지저분한 드루이드도 우아한 엘프와 함께 검마 판타지에 자주 등장하겠죠.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의 히라비아스는 우아함과는 거리가 참….
이런 엘프와 드루이드의 대중 이미지를 살펴보면, 어떻게 사람들이 자연을 바라보는지 간접적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이게 뭐, 환경 사학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마 학자들은 엘프나 드루이드에게 큰 관심을 안 보일 것 같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어떤 자연 문화적인 요소를 찾는 학자가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학자들이 이미 그런 작업을 시도했을지 모르죠. 여하튼 저는 검마 판타지의 드루이드가 사람들의 자연관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신화와 종교는 자연물을 나름대로 이용했고, 그런 신화와 전설이 검마 판타지에까지 영향을 미쳤겠죠. 환경 사학자 요하임 라트카우는 수많은 종교들이 자연물을 이용했다고 주장합니다. 불교는 조화를 강조했고, 덕분에 여러 유럽의 동물 애호가들은 불교에서 영감을 받곤 했습니다. 기독교의 프란체스코 성인은 동물을 보호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판타지 창작가들은 설정을 만들 때 이런 신화들을 참고했을 테고, 신화가 이리저리 뒤바뀌고 오늘날 정착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 새틀러의 지적처럼 대중 문화와 상식은 자연계의 일부분만 고집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저 편리한 부분만 받아들일지 모르죠. 사람들은 풍성하고 싱그러운 숲을 자연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숲 속에는 커다란 호랑이도 있을 테고 작고 꿈틀거리는 기생충도 있을 겁니다. 그저 숲만 지킨다면, 그건 진짜 환경 보호가 아니겠죠. 우리가 후손들에게 자연 유산을 물려주고 싶다면, 호랑이와 기생충까지 함께 물려줘야 할 겁니다. 물론 그런 호랑이나 기생충이 사람들을 죽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21세기 인류는 거대한 생태 순환계를 충분히 보존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호랑이를 죽이거나 내쫓지 않아도 인류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어요. 데이빗 스즈키는 이 모든 게 자연 유산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말이 백 번 옳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