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왜 이반 예프레모프가 <혼자 남았다>라는 그림을 이야기했는가 본문
소설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차라라는 등장인물은 성단 위원회의 학술 건물에 들어갑니다. 성단 위원회 건물에서 차라는 어떤 그림을 감상해요. 그 그림은 외계 행성에 불시착한 우주 승무원을 표현했습니다. 당연히 분위기는 적막하고 불길합니다. 거대한 보라색 화늘은 그림의 윗부분을 크게 차지했습니다. 보라색 하늘에서 작은 낫 같은 달은 희미한 빛을 뿜습니다. 죽은 달빛은 구식 성단 우주선을 비추고, 선홍색 노을 속에서 성단 우주선은 무기력하게 보입니다. 성단 우주선 옆에는 남색 외계 식물들이 줄지었고, 마르고 단단한 금속처럼 보입니다.
가벼운 방호복을 입은 우주 승무원은 깊은 모래를 간신히 헤쳐가는 중입니다. 우주 승무원은 망가진 우주선과 죽은 동료 승무원을 바라봅니다. 헬멧이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차라는 우주 승무원의 얼굴을 볼 수 없습니다. 헬멧 유리창은 그저 선홍색 노을을 반점처럼 반사할 뿐입니다. 하지만 차라는 낯선 세계에서 우주 승무원이 혼자 남았고 헬멧 안쪽에서 무한한 절망을 뿜어낼 거라고 느낍니다. 오른쪽 모래 언덕 위에는 뭔가 살아있는 생명체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건 형체가 분명하지 않고 혐오스럽게 기어와요.
무한한 절망을 표현하는 그림으로서 이 그림의 제목은 <혼자 남았다>입니다. <혼자 남았다>라는 이 그림은 낯선 외계 행성에 불시착하고 (문자 그대로) 혼자 살아남은 우주 승무원을 묘사합니다. 어쩌면 구조대는 오지 않을지 모르고, 우주 승무원은 고향별에 돌아가지 못하고 외계 행성에서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모르죠. <안드로메다 성운> 초반부에서 탄트라 우주선이 탐사할 때, 탄트라 대원들은 그렇게 불시착한 성단 우주선을 발견합니다. 우주 항해는 위험천만한 모험이고, 누군가는 정체 모를 외계 행성에 불시착하고 다시 고향별을 볼 수 없을지 몰라요.
SF 세상에서 이런 위험한 우주 항해는 드문 소재가 아닙니다. 비단 <안드로메다 성운> 이외에 숱한 SF 소설들, 만화들, 게임들은 불시착한 우주 승무원을 그립니다. 낯선 외계 행성이나 적막한 우주선 속에서 우주 승무원은 살아남아야 하고, 이는 짜릿하고 쓸쓸하고 급박한 생존 이야기가 됩니다. 예전부터 우주 생존 이야기는 커다란 인기를 끌었습니다. 다니엘 디포가 <로빈슨 크루소>라는 어마어마한 인기작을 남겼기 때문에 SF 작가들은 우주 로빈슨 크루소를 묘사하곤 했습니다. 아니, 다니엘 디포가 <로빈슨 크루소>를 쓰지 않았다고 해도, SF 작가들은 우주 생존이라는 소재를 그냥 놔두지 않았겠죠.
하지만 <안드로메다 성운>은 유토피아 소설입니다. 인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룩했고, 모두 행복하게 살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성단 위원회 건물에서 차라는 <혼자 남았다>라는 그림을 봅니다. <혼자 남았다>는 불시착한 우주선과 고독한 우주 승무원을 묘사했어요. 이런 불길하고 적막하고 외로운 분위기는 화사한 첨단 미래 유토피아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작가 이반 예프레모프가 이런 적막하고 불길한 그림을 집어넣었을까요? 이반 예프레모프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반 예프레모프는 우주 항해라는 장대한 여정을 강조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지구에서 인류 문명은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룩했으나, 우주에는 다른 외계 문명들이 존재합니다. 인류는 그들과 간신히 통화할 수 있을 뿐이고, 직접 만나거나 교류하지 못합니다. 우주 탐사대들은 머나먼 여정을 떠났으나, 어떤 탐사대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인류 문명이 심혈을 기울여도, 우주는 너무 멀고, 인류와 다른 외계 문명들을 쉽게 만나지 못해요. 심지어 외계 문명을 너무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무모한 실험을 저지르고, 아까운 목숨들을 잃어요.
어쩌면 이반 예프레모프는 그런 열망을 표현하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저기 머나먼 우주. 아직 인간이 닿지 못한 그 곳. 아무도 모르는 비경. 인류는 거기에 닿기 원하나, 그런 염원은 쉽게 현실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인류가 노력해도, 광대한 우주는 금단의 바다가 됩니다. 광대한 바다 속에서 표류하는 범선들처럼, 성단 우주선들은 외계 행성들에 불시착하고, 인류는 지구를 떠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고대부터 미래까지, 인류 문명은 꾸준히 발달했으나,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구에서 운명할 것 같습니다.
이런 감성은 <안드로메다 성운>을 전반적으로 꿰뚫습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유토피아 소설이나, 지구 유토피아에 절대 만족하지 못합니다. 인류 문명은 다른 행성들과 태양계 밖으로 뻗어나가야 하고, 다른 외계 문명들과 만나야 합니다. 어쩌면 이반 예프레모프는 광대한 우주가 힘든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표현하기 원했을지 모르고, 그래서 <혼자 남았다>라는 그림을 집어넣었는지 모르죠. 이는 개인적인 추측이고, 근거가 없습니다. 이반 예프레모프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광대한 우주가 위험하다는 사실과 <혼자 남았다>라는 그림은 잘 어울립니다.
흔히 <안드로메다 성운>은 그저 유토피아 소설로서 알려졌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유토피아 소설인 동시에 우주 탐사 이야기 같습니다. 인류 문명이 꾸준히 발달했기 때문에 우주를 향한 열망은 더욱 커집니다. 이 소설은 인류가 함께 힘을 합치고 우주로 진출하는 과정을 단계적이고 거시적으로 그립니다. 계급 투쟁에 별로 주력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우주 탐사 소설들은 이런 독특한 감성을 모방하지 못합니다. 아서 클라크 같은 작가조차 이를 모방하지 못하죠. 그래서 저는 <안드로메다 성운>이 감동적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