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어슐라 르 귄과 U.K.르 귄 본문
어슐라 르 귄은 <플레이보이>에 단편 소설을 실을 때, 작가 이름을 U.K.르 귄으로 썼습니다. 사실 르 귄 본인은 그걸 별로 원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보이> 편집부가 여자 작가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어슐라'라는 이름을 숨겼죠. 아마 편집부는 독자들이 여자 작가의 SF 소설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하긴 제임스 팁트리처럼 가명을 쓰는 작가도 있었고, 여러 작가들과 독자들은 제임스 팁트리의 성별 정체성을 두고 논란을 벌였죠. 그런 역사를 고려하면, 왜 'U.K.르 귄'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는지 이해할만합니다. 르 귄은 <플레이보이>에 소설을 낼 때, 저런 이름을 별 생각 없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생각이 바뀌었고, 이게 성 차별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저런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무조건 '어슐라 르 귄'이라는 이름만 썼다고 합니다. 메리 셸리가 본격적인 최초의 SF 소설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게다가 여자 작가들도 휴고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저런 소동은 참 코미디 같습니다. (물론 여전히 SF 세계에는 여자 작가들을 음해하는 무리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르 귄 여사'라는 호칭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어슐라 르 귄은 SF 작가들 중에서도 인기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작가입니다. 덕분에 어슐라 르 귄은 르 귄 여사라는 존칭으로 종종 불립니다. 하지만 '여사'라는 단어는 여자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존칭이지만, 여자만을 가리키는 존칭이죠. '남사'라는 말은 없어요. 남자들은 '선생님'이라고 불리죠. 아시모프 선생님이나 아서 클라크 선생님은 있겠으나, 아시모프 남사님이나 아서 클라크 남사님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사는 여자만을 가리키기 위한 용어죠. 생각해보면, 굳이 여자를 여사라고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어슐라 르 귄을 존중한다면, 그냥 '르 귄 선생님'으로 부르면 됩니다. 여자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할 이유가 없죠. 저는 이게 마치 고등학생과 여고생의 관계처럼 보입니다. 흔히 여자 고등학생은 여고생으로 불리고, 고교생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여고생은 마법의 단어입니다. 여자를 강조할 필요가 없을 때도 항상 여고생으로 불립니다. 여고생이 남자들의 성적 환상을 충족하기 때문인지, 여자는 무식해도 된다는 관습이 굳어졌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르 귄 여사'라는 호칭을 쓰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그냥 르 귄 선생님으로 부르면 됩니다. 솔직히 저도 예전에 별 생각없이 르 귄 여사님이라고 부른 적이 많습니다. 뭐, 실수였죠. 르 귄도 U.K.르 귄이라는 이름을 쓴 것처럼. 어쨌든 실수를 깨달았다면 되풀이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