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어떻게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샌드 박스를 선사하는가 본문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시작하기 전에 게임 플레이어들은 캐릭터를 만들어야 합니다. 캐릭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과정은 클래스일 겁니다. 클래스는 그 캐릭터가 누구인지 결정하는 가장 커다란 요소입니다. 어쩌면 클래스는 캐릭터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일지 몰라요. 그래서 클래스들이 제대로 어울리지 못할 때, 게임 플레이는 균형을 잃습니다. 클래스는 캐릭터가 무슨 역할을 맡는지 결정합니다. 아무리 엘프가 하플링보다 크다고 해도, 하플링 전사는 엘프 마법사보다 근접 전투에 유능할 겁니다. 아무리 드워프가 마법에 소질이 없다고 해도, 드워프 성직자는 엄청나게 파괴적인 주문을 외울 수 있어요.
클래스는 종족보다 중요한 요소이고, 다른 능력치들이나 재주들, 기술들 역시 클래스에 종속됩니다. 클래스는 캐릭터를 좌우하는 요소죠. 이런 클래스를 잘못 선택한다면, 게임 플레이하는 동안 게임 플레이어는 후회를 거듭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던전스 앤 드래곤스>를 모방하는 수많은 롤플레잉 게임들은 클래스에 많은 비중을 둡니다.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사이트에는 클래스 게시판들이 있죠. 종족 게시판이 없다고 해도, 클래스 게시판들은 있습니다.
하지만 클래스는 캐릭터를 제약합니다. 클래스는 캐릭터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못한다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보다 자유로운 플레이를 원하는 게임 플레이어는 클래스가 갑갑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와 달리, 이 세상에는 클래스 없는 롤플레잉 게임들이 많습니다. 이런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자유롭게 기술에 점수를 매기거나 재주를 배울 수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훨씬 자유로운 캐릭터를 만들 수 있고, 훨씬 개성적인 캐릭터를 뽐낼 수 있겠죠. 반면, 전형성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런 게임 플레이는 다소 산만할지 모릅니다. 캐릭터가 이것저것 마구 배운다면, 그 캐릭터에게는 전문성이 없을 테고, 게임 플레이는 산만해질지 모릅니다.
클래스는 이런 산만한 플레이를 막습니다. 클래스는 전형적이나, 그런 전형성 덕분에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무엇을 배우고 무엇에 점수를 매겨야 하는지 인식할 수 있죠. 구태여 게임 플레이어가 배경 이야기를 설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클래스는 전형적인 배경 이야기를 제공하고요. 드루이드 클래스를 볼 때, 따로 배경 이야기를 읽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드루이드가 숲을 열심히 보호하거나 야생 동물들을 성실하게 치료할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전형성은 무조건 나쁘지 않아요. 클래스에는 그런 장점이 있습니다.
클래스가 있는 롤플레잉 게임과 클래스가 없는 롤플레잉 게임. 뭐가 더 좋을까요? 글쎄요, 이건 해답이 없는 문제일 겁니다. 다들 서로 다르게 생각하겠죠. 저는 4X 게임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4X 게임은 여러 세력들을 내놓습니다. 4X 게임을 플레이하기 전에 게임 플레이어는 어떤 세력을 선택해야 합니다. SF 4X 게임에는 전형적인 세력들이 있을 겁니다. 절지류 외계인을 볼 때, 우리는 그 세력이 개미 군집과 비슷하다고 추측할 겁니다. 그 세력에는 두뇌 개체와 왕족 개체가 있을 테고, 다른 일꾼 개체들이나 병정 개체들은 무조건 두뇌 개체와 왕족 개체에게 충성할 테죠. 이는 아주 전형적인 배경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런 전형성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스스로 세력을 만들고 싶어할지 몰라요. 그래서 여러 4X 게임들은 세력 창작 기능을 제공합니다. 롤플레잉 게임과 달리, 4X 게임들은 전형적인 세력들과 함께 세력 창작 기능을 제공하죠.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플레이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전형적인 외계 종족을 고르거나 아예 새로운 외계 종족을 만들 수 있습니다. 고수 플레이어들은 전형적인 외계 종족을 선택하는 것보다 새로운 외계 종족을 만드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세력 창작 기능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X 게임은 방대합니다. 방대하고 풍부한 내용은 4X 게임이 자랑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일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4X 게임을 대전략 게임이라고 부르죠. 일반적인 전략 게임은 정복 전쟁을 노리나, 4X 게임은 정복 전쟁 이외에 다양한 승리 방법들을 노릴 수 있어요. 하지만 전형적인 세력들은 이런 방대하고 풍부한 내용을 따라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전형적인 세력들은 방대하고 풍부한 내용을 오직 일부분만 활용할 수 있겠죠. 내용이 풍부하다면, 세력들 역시 풍부해야 합니다. 문제는 게임 제작진이 그런 풍부한 세력들을 내놓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게임 플레이어의 몫입니다.
만약 세력 창작 기능이 있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독특한 세력을 창작할 테고, 그 세력을 이용해 방대한 내용을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4X 게임이 세력 창작 기능을 갖춘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다행히 수많은 4X 게임들은 그런 기능을 갖췄습니다. 어쩌면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선구적인 4X 게임으로서 <마스터 오브 오리온>은 세력 창작 기능을 갖췄고, 다른 게임들은 이걸 본받았을지 모르죠. 게임 플레이어는 이런 기능을 이용해 4X 게임들을 더욱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겠죠. <대수학자> 같은 SF 소설은 아주 기발한 외계인을 상상합니다. 4X 게임 플레이어 역시 그럴 수 있어야 하겠죠.
물론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런 세력 창작 기능을 이용해 무적 세력을 만들지 모릅니다. 게임에는 언제나 꼼수가 있죠. <마스터 오브 오리온>에도 꼼수가 있고, 그런 꼼수를 이용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무적 세력으로 군림할 수 있어요. 이건 세력 창작 기능이 드러내는 단점이겠죠. 하지만 그런 단점이 있다고 해도, 저는 4X 게임들이 세력 창작 기능을 갖추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장점이 단점보다 크다면, 4X 게임들은 장점을 추구해야 할 겁니다. 어쩌면 이런 세력 창작 기능은 4X 게임들과 다른 전략 게임들을 가르는 중대한 차이점일지 모르겠습니다. 4X 게임은 사회, 경제, 과학, 문화에 걸쳐 숱한 철학들과 정책들과 기술들과 예술들을 다룹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직접 세력을 창작할 수 있다면, 그런 숱한 사회 철학들, 경제 정책들, 과학 기술들, 문화 예술들을 폭넓게 아우를 수 있겠죠. 이런 비유가 옳을지 저는 잘 모르겠으나, 4X 게임은 객관식 문제가 아니라 주관식 논설 문제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뭔가를 새롭게 만들고 새롭게 꾸밀 수 있습니다. 저는 4X 게임들에 샌드 박스 요소가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에이지 오브 원더스> 같은 게임보다 <스텔라리스> 같은 게임에서 샌드 박스 요소는 훨씬 두드러집니다. <스텔라리스>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창작할 수 있는 숱한 외계 종족들을 보세요.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환경 오염을 낮추고, 침략 전쟁을 회피하고, 탐험과 내정, 문화에 치중하고 싶다면? 일반적인 전략 게임들은 이런 소망을 구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4X 게임은 할 수 있습니다. 설사 게임 제작진이 그런 세력을 내놓지 못했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원하는 외계 종족을 만들고, 환경 오염을 낮추고, 침략 전쟁을 회피하고, 탐험과 내정, 문화에 치중할 수 있어요. 심지어 아주 극단적인 평화 지향 플레이조차 가능하죠. 저는 그게 4X 게임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