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어떤 대체 역사적인 상상 본문
진화론을 부정하는 종교 광신도들은 이 세상이 고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현재 모습 그대로 태어났고,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죠. 그들의 시각은 현재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반면, 진화론은 변화의 이론, 시간의 이론, 역사의 이론입니다. 진화론은 생물들이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뀜에 따라 계속 변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지구의 자연 생태계는 오래 전부터 계속 변했고 멸망과 폭발을 반복했습니다.
미생물들이 살았고, 좀 더 복잡한 동식물들이 등장했고, 생물적인 대폭발이 일어났고, 엄청난 멸종이 닥쳤고, 다시 생물들이 번성했고, 또 다시 거대한 멸종이 닥쳤고, 다시 생물이 번성하고…. 이런 장대하고 기나긴 역사가 지구의 자연 생태계를 거쳤죠. 그렇게 환경이 바뀌고 다른 생물들과의 상호 작용에서 각 생물들은 적응하고 특징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후손들은 진화를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광신도들은 자기네 경전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이런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 과거의 역사가 현재를 만들었음에도 그걸 모르죠. (어차피 그 경전을 쓴 사람들도 자연 생태계의 역사를 몰랐으니까요.)
자연 생태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언젠가 인류도 멸종할지 모릅니다. 이건 확신할 수 없는 물음이지만, 인류가 멸종한다는 주장은 그리 허무맹랑하지 않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몇 천 년 이내에 인류가 멸종할지 모른다고 말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죠. 멸종할 이유는 널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 멸종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인류가 멸종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어느 정도 과학적 근거가 있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종교 광신도들은 이런 이야기도 거부합니다. 그들의 시선은 오직 현재에만 머물렀으니까요.
이렇게 시각이 고정된 사람들은 종교계의 광신도들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류 사회를 현재에 고정된 것으로 보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현대의 인류 사회가 처음부터 이렇게 고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강대국은 처음부터 강대국이었고, 악당 독재 국가 역시 처음부터 악당 독재 국가였습니다. 북미나 유럽, 호주 등은 인류 최고의 문명국이고, 중국이나 러시아는 그들에게 대적하는 악당 국가들입니다. 아프리카 깜둥이들은 야만적이기 때문에 허구한 날 자기들끼리 학살하고, 동남 아시아나 남아메리카 사람들은 미개하기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계를 이렇게 고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아요.
하지만 세계는 그렇게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역사에는 많은 사건들이 존재했고, (흔히 문명국이라고 찬사를 받는) 강대국들의 엄청난 학살과 압박이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분명히 폭력적인 국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미나 유럽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느 나라든 학살에서 자유롭지 않겠으나, 애초에 미국 같은 국가는 학살에서 출발했습니다. 아, 누군가는 영국군이 북미 부족민들을 학살했을 뿐이고, 미국이 죄가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조지 워싱턴부터 이런 학살에서 별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지 워싱턴을 엄청난 위인으로 칭송할 뿐이고 학살자라고 기억하지 않죠. 아울러 조지 워싱턴 이후의 각종 학살도 별로 언급되지 않습니다. 사실 백인 이주민들이 북미에 정착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초강대국 미합중국은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건 세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겠죠. 만약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세우지 않았다면, 역시 세계 역사는 꽤나 많이 바뀌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북미나 유럽은 엄청난 학살을 저질렀고, 그 학살의 여파는 여전히 영향을 미칩니다.
심지어 그런 폭력은 여전히 곳곳에서 번집니다. 약소국의 농민들, 노동자들, 여자들, 아이들, (강대국과 약소국 모두의) 원주민들은 지금도 계속 고통을 호소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언론에서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공정성을 주장하는 언론들도 저런 '문명국'의 횡포를 은근슬쩍 넘어가죠. 미국의 중산층은 문명적으로 살아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문명인에게 쫓겨난 원주민이나 문명국 기업에게 수탈을 당하는 약소국 농민들은 어찌 해야 할까요.
세계 역사에서 거대한 학살은 수없이 많았고, 문명국들은 그런 대학살을 딛고 전진했습니다. 그런 학살이 없었다면, 어떻게 세계 역사가 바뀌었을지 상상조차 못하겠군요. 아마 이런 대체 역사 소설들도 많을 겁니다. 어쩌면 <쌀과 소금의 시대>가 그런 소설일 수 있겠죠. 만약 중국이나 러시아를 욕하고 싶다면, 유럽이나 북미의 횡포 또한 비판해야 할 겁니다. 아니, 비단 그것만 아니라 모든 기득권들(자본주의 오염, 무분별한 산업 발전, 권위적인 가부장제)의 폭력을 성토해야 할 겁니다.
과학자들은 종종 인류가 없었다면 어떻게 생태계가 변할지 상상하곤 합니다. 꽤나 사이언스 픽션적인 이야기입니다. 똑같은 사고 실험을 인류 역사에 적용할 수 있을 겁니다. 강대국들이 횡포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우리가 아는 세계상이 변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