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압주>와 잠수부의 여성적인 측면 본문
※ 이 게시글에는 해양 생태계 게임 <압주>의 결말이 있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 속에서 주인공 잠수부는 다양한 해양 동물들을 '부활'시키고 퍼뜨립니다.]
비디오 게임 <압주>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정체 불명의 잠수부를 조종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잠수부를 이용해 다양한 해양 생태계들을 거칩니다. 싱그럽고 복잡한 녹색 켈프 숲부터 컴컴하고 을씨년스러운 해저까지, 잠수부는 여러 장소들에 방문합니다. 잠수부가 새로운 장소에 방문할 때마다, 잠수부는 해양 동물들을 부활시킵니다. 다양한 해양 장소들에는 부활 지점들이 있고, 부활 지점에서 잠수부가 뭔가를 활성화할 때, 해양 생물 다양성은 늘어납니다. 녹색 켈프 숲의 부활 지점에서 잠수부는 표범 상어들을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잠수부가 표범 상어들을 부활시키는지 게임 플레이어는 알지 못합니다. 잠수부는 반짝거리는 어떤 것을 가슴에서 꺼내고 그걸 이용해 부활 지점을 활성화합니다. 그때 해양 동물들은 부활하고 해양 생태계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는 반짝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잠수부가 누구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왜 잠수부가 해양 동물들을 부활시키는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잠수부가 그럴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니, 정말 잠수부가 표범 상어들을 '부활'시켰나요? 이게 '부활'인가요? 잠수부가 해양 동물 유전자 지도를 가슴 속에 보관하나요?
어쩌면 반짝거리는 부활 지점은 생체 조립 공장인지 모릅니다. 부활 지점은 공장 같지 않으나, 그 속에는 첨단 생체 공장이 있는지 모릅니다. 잠수부의 가슴 속에는 유전자 지도가 있는지 모릅니다. 반짝거리는 어떤 것은 유전자 지도인지 모릅니다. 잠수부는 유전자 지도를 제공하고, 부활 지점은 생체 조립 공장을 가동합니다. 그래서 표범 상어를 비롯해 온갖 해양 동물들은 다시 살아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추측에 불과합니다. 뚜렷한 근거는 없습니다. <압주>는 감동적인 게임이나, 절대 친절한 게임이 아닙니다. <압주>는 여러 유적들과 벽화들을 보여줍니다.
이것들을 이용해 게임 플레이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추측은 추측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무슨 이야기를 대입하든, 정확한 해답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 지점이 생체 조립 공장이라고 추측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부활 지점이 전송 장치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 지점이 감옥이라고 추측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부활 지점이 야생 보호 장치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반짝거리는 것은 열쇠이고, 잠수부는 열쇠를 이용해 야생 보호 장치를 풀었는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무엇을 추측하든, 게임 플레이어는 추측을 입증하기 위한 근거를 들이댈 수 있습니다.
잠수부가 반짝거리는 것을 꺼내고 야생 동물들을 다시 만들 때, 이건 부활이거나 전송이나 해제거나 방생일 수 있습니다. 이건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정확한 해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부활은 가장 가능성이 높을지 모릅니다. 잠수부는 야생 동물들을 부활시키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잠수부가 죽은 백상아리를 부활시키기 때문입니다. <압주>에서 지적 문명은 무너졌습니다. 문명인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이한 기계들은 바다를 장악했습니다. 백상아리는 기계를 증오하고 기계들을 공격합니다. 왜 백상아리가 기계들을 공격하나요? 기계들이 지적 문명을 무너뜨렸나요?
아니면 기계들이 해양 동물들을 멸종시켰나요? 지적 문명이 백상아리와 친교를 맺었나요? 지적 문명이 백상아리를 숭배했나요? 백상아리가 자연 생태계를 지키는 수호자인가요? 어쩌면 백상아리는 가이아의 수호자인지 모릅니다. 백상아리는 단순한 야생 동물이 아닐 겁니다. 백상아리는 정령이거나 신성이거나 마법적인 동물인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건 백상아리와 비슷하게 생긴 외계 생명체인지 모릅니다. 아니면 해양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지적 문명은 백상아리를 생체 병기로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백상아리가 자연 생태계를 지키는 생체 병기인가요? 그건 확실하지 않으나, 백상아리는 기계들을 증오하고 기계들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백상아리가 기계들을 공격한다고 해도, 공격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계들은 너무 거대합니다. 백상아리는 혼자입니다. 백상아리는 생체 병기인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백상아리는 혼자 거대한 기계들에게 맞서지 못합니다. 기계 중심부를 공격한 이후, 결국 백상아리는 숨을 거둡니다. 잠수부는 마지막 순간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잠수부는 고대 바다를 거치고 어떤 신비한 장소에 도달합니다. 여기에서 잠수부는 백상아리를 부활시킵니다. 죽은 백상아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이건 부활입니다. 이건 부활이 아닐지 모르나, 죽은 백상아리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이건 부활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잠수부는 백상아리를 부활시켰는지 모릅니다. 따라서 다른 장소들에서 잠수부가 표범 상어를 비롯해 온갖 해양 생물종들을 퍼뜨릴 때, 이건 부활 작업인지 모릅니다. 물론 그것과 이것은 서로 다른 행위인지 모릅니다. 잠수부는 백상아리를 부활시켰으나, 표범 상어들을 그저 풀어줬을 뿐인지 모릅니다. 잠수부가 정말 백상아리를 부활시켰다고 해도, 이건 잠수부가 반드시 표범 상어들을 부활시켰다는 뜻이 아닙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여러 차례 <압주>를 플레이한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잠수부가 무엇을 하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압주>는 별로 친절한 게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잠수부는 꾸준히 해양 동물들을 퍼뜨립니다. 기계들은 바다를 장악했으나, 잠수부는 기계들을 물리치고 해양 동물들을 아주 풍성하게 퍼뜨립니다. <압주>에서 잠수부는 단순한 잠수부가 아닙니다. 잠수부는 해양 동물들을 퍼뜨리는 모체입니다. <압주>는 환경 아포칼립스이고 결말로서 생태 유토피아를 보여줍니다. <압주>의 줄거리가 뚜렷하지 않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압주>가 환경 아포칼립스에서 생태 유토피아로 향한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기계들은 무너지고, 해양 생태계는 훨씬 풍성해지고, 풍요로운 생물 다양성 속에서 잠수부와 백상아리는 우아하게 여유를 즐깁니다.
분명히 이건 생태 유토피아입니다. 그리고 환경 아포칼립스들과 생태 유토피아들에는 '생명체를 부활시키는 역할'이 있습니다. 환경 아포칼립스에서 누군가는 생명체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생명체를 퍼뜨려야 합니다. 이런 역할은 비단 생태 유토피아를 만들 뿐만 아니라 중요한 주제를 전달합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타크베르는 이런 역할을 맡았습니다.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부발리니 씨앗 할머니는 이런 역할을 맡았습니다. <압주>에서 잠수부는 타크베르와 부발리니 씨앗 할머니와 비슷한지 모릅니다. 타크베르와 씨앗 할머니와 잠수부는 모두 생명체들을 퍼뜨리기 원합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 및 영화 <분노의 도로>와 달리, <압주>는 사막이 아닙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과 영화 <분노의 도로>는 황량한 사막을 보여줍니다. <빼앗긴 자들>에서 대기근 때문에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분노의 도로>에서 삭막한 환경은 아비규환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크베르와 씨앗 할머니는 생명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생명체들을 퍼뜨리기 원합니다. <압주>에서 잠수부는 풍성한 생물 다양성들을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만약 기계들이 훨씬 많은 지역들을 장악한다면, 기계들은 해양 생태계들을 사막으로 만들지 모릅니다. 아직 기계들이 바다를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풍성한 생물 다양성들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백상아리는 죽어라 기계들을 공격하는지 모릅니다.
<압주>가 풍성한 생물 다양성들을 보여준다고 해도, <압주>는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사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가 보여주는 것처럼, 풍성한 자연 생태계 역시 환경 아포칼립스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 아포칼립스 속에서 마이나와 미아나는 생명이 승리라고 말합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과 영화 <분노의 도로>와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와 비디오 게임 <압주>는 모두 환경 아포칼립스입니다. 이런 환경 아포칼립스 속에서, 타크베르와 씨앗 할머니와 마이나 및 미아나처럼, 잠수부는 생명체들을 퍼뜨립니다. <압주>는 불친절한 게임이고, 게임 플레이어는 자세한 줄거리를 알지 못하나, 게임 플레이어는 타크베르와 씨앗 할머니와 마이나 및 미아나와 잠수부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건 무리한 비교가 아닐 겁니다.
게다가 타크베르와 씨앗 할머니와 마이나 및 미아나는 여자입니다. 이게 우연인가요? 이건 우연이 아닌지 모릅니다. 여자들이 사회적인 약자이기 때문에, <빼앗긴 자들>과 <분노의 도로>와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여자들이 생명체들을 퍼뜨린다고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이 활약하고 저항할 때, 삭막한 세상은 풍성해질 겁니다. 아니면 여자가 자연과 비슷하기 때문에, <빼앗긴 자들>과 <분노의 도로>와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타크베르와 씨앗 할머니와 마이나 및 미아나를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고대부터 여러 인류 문화들이 어머니 자연을 숭배하는 것처럼, 여자와 자연은 비슷하고, <빼앗긴 자들>과 <분노의 도로>와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는 이런 측면을 반영하는지 모릅니다.
씨앗 할머니는 더 이상 임신하거나 수유하지 못하나, 씨앗 할머니는 젊은 산모 대그에게 자신의 유지를 물려줍니다. 젊은 대그는 아기를 낳고, 젖을 먹이고, 텃밭을 가꿀 겁니다. 비단 <빼앗긴 자들>과 <분노의 도로>와 <고지라: 괴수 행성> 시리즈만 아니라 여러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여자와 자연을 이야기합니다. 비디오 게임 <압주>에서 잠수부는 여자가 아닙니다. 사실 잠수부는 로봇이고, 잠수부에게는 성별이 없습니다. 하지만 잠수부가 여자가 아니라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잠수부가 '모성적인 역할'을 맡았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압주>에서 잠수부는 해양 동물들의 모성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