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아시모프를 읽는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 본문
"아직도 아시모프를 읽으십니까?" 이건 2011년 5월에 웹진 alt.SF가 올린 기사입니다. "아직도 아시모프를 읽으세요?" 이는 2012년 8월에 프레시안이 올린 기사입니다. 양쪽 기사는 비슷한 제목을 썼으나, 내용은 서로 다릅니다. alt.SF는 국내 SF 출판사들과 독자들이 아직 아시모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질타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분명히 그랜드 마스터이고, 천재적인 작가이고, 수많은 업적들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국내 SF 출판사들과 독자들은 아이작 아시모프를 너무 편애합니다. alt.SF는 이제 우리가 아시모프에서 벗어나고 좀 더 현대적인 SF 소설들이나 다른 SF 소설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프레시안 기사는 여전히 우리가 아이작 아시모프를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라는 이름은 더 이상 새롭지 않아요. 아시모프는 고전 냄새를 물씬 풍기나, 다른 관점에서 고전은 구닥다리입니다. 그래서 국내 독자들은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죠. 그렇다고 해도 <영원의 끝> 같은 소설은 아주 놀랍고, 아시모프를 읽을 가치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양쪽 기사는 똑같이 "아시모프를 읽는가?"라고 물으나, 서로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군요.
솔직히 저는 프레시안 기사보다 alt.SF를 편들고 싶습니다. 프레시안 기사가 말한 것처럼, 분명히 아시모프를 읽을 가치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명예의 전당에서 언제나 우리는 아시모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아시모프 번역 소설들은 많고, 어쩌면 이제 우리는 아시모프보다 다른 작가들에게 시선을 돌려야 할지 몰라요. 해외에는, 영어권 출판 시장이나 일본어 출판 시장에는 정말 놀라운 SF 소설들이 가득합니다. 그런 소설들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은 오직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만을 이야기하고 SF 장르를 오해합니다.
만약 켄 맥레오드나 피터 해밀튼 같은 작가들이 국내에 알려진다면, 만약 이안 뱅크스나 스티븐 백스터 같은 작가들이 국내에 더 많이 알려진다면, 만약 국내 독자들이 옥타비아 버틀러 같은 작가를 훨씬 깊게 파고들 수 있다면, SF 장르를 바라보는 인식은 바뀔지 모릅니다. 하지만 국내 출판 상황은 그렇지 못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오직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만을 이용해 SF 장르를 이야기하죠. 어떤 사람들은 스팀펑크 장르가 영상물에 특화되었다거나 스팀펑크 장르가 해맑은 내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찰스 스트로스 같은 작가가 스팀펑크 소설들이 너무 범람한다고 지적했음에도, <아누비스의 눈>이 어둡고 추레한 19세기 유럽 뒷골목을 누볐음에도, 국내 사람들은 스팀펑크를 오해하죠. 소설들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따라서 국내 출판사들이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쏠리는 자원을 다른 작가들에게 돌린다면, 국내 독자들은 훨씬 풍성하게 SF 장르를 논의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먹고 살기 바쁜 사회에서 그건 꽤나 어려운 시도일지 모릅니다. 독서는 영화 관람이나 게임 플레이보다 훨씬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합니다. 저는 독서가 영화 관람이나 게임 플레이보다 훨씬 번거로운 문화 행위라고 생각해요.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텍스트에서 이미지들을 연상해야 합니다. 만화나 영화나 게임과 달리, 소설은 이미지를 곧바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독자는 연상 과정을 한 번 거쳐야 하고,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조합해야 합니다.
따라서 독서는 영화 관람이나 게임 플레이보다 훨씬 번거로울 겁니다. 특히, SF 소설들이 비일상적인 설정들을 묘사하기 때문에 SF 독자들은 훨씬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할지 몰라요. 하지만 먹고 살기 바쁜 상황에서 누가 일부러 번거로운 문화 행위를 추구할까요? 빡빡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소설보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나 게임을 선호할 테고, 출판사들은 입에 풀칠하지 못하겠죠.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SF 출판사들 역시 다른 작가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하겠죠.
이런 논의는 SF 출판사들과 독자들에게 아주 중요하겠으나, 이 글에서 저는 다른 주제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alt.SF와 프레시안 기사는 "아시모프를 읽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아시모프를 읽을 수 있을까요? 아이작 아시모프는 소설책이 아닙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인간 작가입니다. 인간은 읽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읽히는 대상은 소설책이죠. 따라서 alt.SF와 프레시안 기사는 "아시모프 소설들을 읽는가?"라고 물었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문구들이 꽤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작가를 읽는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특히, 철학이나 인문학 서적이 사상을 담기 때문에 우리는 철학자나 인문학자를 읽는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누구는 발터 벤야민을 읽고, 누구는 시몬 드 보부아르를 읽고, 누구는 에릭 홉스봄을 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읽는 대상은 시몬 드 보부아르가 아니라 <제2의 성>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시몬 드 보부아르를 읽을 수 있겠어요? 보부아르는 인간 작가입니다. 우리는 인간을 읽지 못해요. 적어도 <제2의 성>을 읽을 때, 우리는 인간 작가가 아니라 인간 작가가 쓴 책을 읽습니다. 책과 작가는 다릅니다. 책은 작가의 완전한 목소리가 아닙니다. 때때로 책과 작가는 완전히 다를 수 있어요. 보부아르가 쓴 책들이 시몬 드 보부아르라는 인간을 완전히 담았을까요? 글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단 책만 아니라 블로그 게시글 역시 비슷하겠죠. 우리는 글을 판단해야 합니다. 글쓴이가 아니라.)
영화나 게임에는 이런 문구가 붙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임스 카메론을 관람한다'거나 '패러독스 스튜디오를 플레이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를 관람한다'거나 '패러독스 스튜디오의 게임을 플레이한다'고 말하죠. 하지만 책을 이야기할 때, 유독 우리는 작가를 읽는다고 말합니다. 왜 이런 문구가 많이 퍼졌을까요? 왜 사람들이 발터 벤야민의 책들이 아니라 발터 벤야민을 읽을까요? 왜 사람들이 <강철 도시>나 <네메시스>를 읽는다고 말하지 않고 아시모프를 읽는다고 말할까요?
우리는 책이 오직 작가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책에 자신을 투영하고, 우리는 작가와 책을 동일시합니다. 책은 작가의 사상이나 철학이나 주제입니다. 책을 쓰는 행위는 오직 작가의 임무이고 역할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숱한 철학책들이나 사상책들은 그렇게 나타났습니다. 벨 훅스가 쓴 책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벨 훅스를 담았습니다. 그렇게 작가와 책이 똑같아진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반면, 영화나 게임은 다르죠. 영화나 게임은 수많은 사람들이 매달리는 창작물입니다. 영화나 게임이 종합 매체이기 때문에 혼자 영화나 게임을 만드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죠.
예전에 몇 번 말한 것처럼, 글은 저렴한 매체입니다. 글을 쓰는 행위는 쉽습니다. 사상과 연필과 종이가 있다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어요. 좋은 글을 쓰기는 쉽지 않으나, 글쓰기 그 자체는 상대적으로 쉽죠. 그래서 작가는 글에 더욱 자신을 투영할 수 있고, 글은 작가를 반영할 수 있죠. 이는 글이 무조건 작가를 반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작가 그 자체와 글은 달라요. 하지만 우리는 여러 매체들 중 글이 작가를 가장 온전하게 담을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시모프를 읽는다고 말하겠죠. 게다가 정말 책이 오직 작가 혼자 완성하는 결과물일까요? 출판사와 편집부와 비평가 역시 책에 기여할 수 있겠죠. 좋은 작가처럼 좋은 편집자는 정말 중요하고요. 그래서 저는 작가를 읽는다는 문구가 어색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